'2021년 수능 국어영역' 중에서
수능 날은 유독 춥다. 수험생들의 한이 폭발한 날이기 때문일까. 코끝에 찬 바람이 스치면 12년 전 내가 수능을 본 날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점심에 죽을 먹고 체해버렸고, 다음 교시 외국어 영역은 글자가 나인지 내가 글자 인지도 모르게 봐버렸다. 마지막 교시를 마친 뒤 낯선 고등학교 교문을 나섰고, 유달리 그 저녁은 깜깜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울었다. 시험을 망쳐서가 아니었다. 3년 동안 매일 밤 야자를 했고, 주말과 연휴 쉬지 않고 공부했다. 그렇게 달려온 결과가 오늘 하루 이 시험을 위해서였다는게 허무해서 눈물이 났다.
올해 수능날은 그렇게 춥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유달리 불수능이었다는 말이 자주 들려왔다. 특히 국어영역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올해 수능 변별력은 국어영역에 있다고.
그러다 어느 기사를 봤다. 국어 영역 문제 난이도 자체는 어렵지 않으나, 학생들의 문해력이 점점 낮아지는 탓에 난이도가 높게 체감된 거라고 한다. 요즘 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하고 정보 검색도 유튜브에서 한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10대는 책을 안 읽고, 그래서 요즘 10대는 문맹에 가깝다고 걱정 섞인 이야기가 쏟아진다.
이 기사를 읽고 나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들어가 국어영역을 프린트했다. 그리고 점심을 먹은 후 풀 수 있는 만큼 문제를 풀어봤다. 두 번째 문단부터 헤겔의 변증법이 나왔다. 아주 턱 막히는 기분에 방금 점심이 소화가 안됐다. 수능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달까.
국어 영역 첫 문제는 독서의 의미를 주제로 한 비문학이었다. 폐허 속에서도 서가를 찾은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해. 독서가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힘을 길러준다는 결론으로 끝나는 그런 글이었다.
독서는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며 외부 세계로의 확장이다.
수능 1교시 첫 문제로 이 문장을 만난 수험생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 문제를 1분 33초 내에 풀어야 하는 현장에서 글의 의미를 묻는다. 한 문제가 당락을 결정하는 시험에서 글은 자신의 내면을 알게 해준다고 한다.
이 아이들에게 글을 빼앗은 건 누구일까? 글로 오래전 인류를 만나고, 글 속에서 나를 찾고, 글로 혼란한 세상의 해결법을 찾는. 이 모든 경험을 아이들에게 빼앗은 건 누구일까? 유튜브와 스마트폰일까? 아니면 글은 곧 경쟁이 된 교육의 현실일까?
청소년인 나에게 책의 힘을 알려준 건 공부하기 싫을 때 야자 시간에 짬짬이 읽었던 책들이었다. 이때의 경험은 지금도 나에게 글을 쓰고 읽게 해 준다. 얼마 전 수능을 치른 분들도 글이 경쟁이 아니게 된 어느 날에 읽고 쓰는 마음을 되찾을 수 있길 바라본다. 그리고 시험 하나만으로 판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당신들에게 있음을 말해주고 싶다.
점심을 먹고 30분 동안 내가 푼 문제는 13문제, 그중 9개를 맞혔다.
'일 등급은 물 건너갔네'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이 스쳤고 시험지를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