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화정 <소설이 빠트린 세계>에서
‘무엇을 쓰는가'는 무엇을 쓰지 않는가’의 문제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보기 위해 무언가를 보지 않는다.
장마철인데도
습도를 느낄 수 없는 방 안에 앉아,
여름이니까 여름처럼 축축해지고 싶어서,
벌레를 만나려고, 흙이 되려고,
에어컨을 튼 방에서 조용히 반다나 싱을 펼친다.
최화정 <소설이 빠트린 세계> 중에서
한 여름의 중턱 에어컨이 고장났다. 원망스럽게도 한밤중 뚝 그쳐버렸다. 그렇게 장마의 중간에서 35도를 웃도는 여름 사이, 3주를 에어컨 없이 보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뚝뚝 떨어졌고, 아무것도 못하고 선풍기 아래 퍼질러져 있었다. 자연의 온도가 이렇게 뜨거울 수 있나, 집안의 습도계가 고장난 건 아닐까 하며.
상냥함은 탄수화물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여름철의 관용은 에어컨에서 나온다. 한여름 만원 지하철에서 타인과 살짝 스쳐도 올라오는 불쾌감 비슷하게 남편의 사소한 말투나 행동도 곧잘 다툼으로 이어졌다. 그럴 땐 근처 카페로 대피했다. 습하고 더운 기운을 날려주는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나의 인간성은 돌아왔다. 말 그대로 살인적인 더위와 습도다. 이젠 에어컨 없는 여름을 상상하기 어렵다.
사실, 사무직인 나는 에어컨 영향권 아래 살고 있다. 집-버스-지하철-사무실을 거치며 에어컨을 환승하듯 더위와 에어컨 영향권 사이를 오간다. 그래서 지난 여름의 기억은 쨍한 뙤약볕은 아니었다. 지구는 한껏 뜨거워졌다는데 나는 적당히 덥고 적당히 서늘했다. 에어컨이 없는 여름을 보내며, 그동안 내가 체감한 기후는 실제 기후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는 ”전자제품으로 둘러싸여 날씨조차 체감하기 어려운“ 한국에서 ”소설 속에서 바퀴벌레와 곰팡이, 축축함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라고 말한다. 요즘의 이야기는 사람이 등장하고, 사람이 미워하고, 사람이 사랑한다. 어쩌면 자연과 단절된 공간에 살면서 자연에 대한 이야기하는 건 상상의 영역이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월든 같은 자연주의 서사보단 매트릭스가 더 일상적인 서사처럼 느껴진다. 문득 인간의 감정과 인간의 생각에 골몰한 우리는 오히려 이 우주에서 더 소외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아득한 생각을 해봤다.
에어컨 영향권 아래 나는, 에어컨이 없는 한 여름을 느끼지 못하고 눈을 가린다. 이 더위가 얼마나 심각하게 치솟고 있는지, 뉴스에 나오는 백 년 만의 더위라는 수치에 무감각해져 있는지. 에어컨 영향력 아래 없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 더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출근 준비를 하며 사무실은 춥겠지 하고 얇은 가디건을 챙기는 나는 얼마나 사치스러운지를.
에어컨은 다시 돌아가고, 나는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내가 감각하는 여름이 덜 불쾌하길 바라며 차가운 음료를 마시고, 에어컨은 최저 온도로 밤새 틀 것이다. 마음 한편엔 에어컨이 주는 상쾌함이 내년 여름에 더 큰 더위로 돌아올지도 모른단 불편함을 가지고서, 에어컨이 없는 여름을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