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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희수 Nov 21. 2019

장녀 콤플렉스를 뽀개고 싶을 때 보세요.

넷플릭스 ‘디스인첸트’를 봤습니다.

아래 보기 중에 자신에게 해당되는 문항이 몇 개나 있는지 테스트해보세요.


1.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직급이 높은 사람이 어렵다.

2. ‘듬직하다, 착하다, 성실하다’라는 말을 자주 들어봤다.

3. 실수를 하면 크게 당황하고 자책을 심하게 한다.

4.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게 무섭다.

5. 타인을 돌보는 일에 익숙하다.

6.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다 나라고 느껴지시나요? ‘장녀 콤플렉스’를 굳이 검색해서 읽어보고 있는 당신은 이미 장녀 콤플렉스가 있으신 듯하군요.



장녀 콤플렉스라니.


그렇다면 장녀만 힘들단 이야긴가? 아니다. 둘째라면 가운데 껴서 서럽고 막내라면 형제들에 치여서 겨우 자랐다고 할 것이다. 외동이라면 ‘외동이라 그렇지’라는 편견 섞인 말을 종종 듣는다. 우리는 모두 힘들다. 하지만 이번에 이야기하고 싶은 건 장녀 콤플렉스다. 왜냐면 내가 장녀이니까.

건들지 마..


나에겐 남동생이 하나 있다. 가풍상 여자라서 차별받았다거나 한적은 없다. 오히려 첫째라는 이유로 동생보다 얻은 게 많을 것이다. 부모님은 내게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근거 없는 기대감이 있었다. 가끔 무거울 때도 있었지만, 그 기대감에 부응하는 게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같았다.


내 입으로 말하기에 웃기지만, 십 대의 난 창피할 정도로 모범생이었다. 반에서 존재하는지도 모를 만큼 선생님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 하나쯤 있으면 마음 편한 그런 모범생. 규칙은 따르라고 존재했고, 공부는 잘해야 하는 거라서 열심히 했다. 그게 당연한 거였으니까.


뭔가 빠진 것 같단 상실감이 종종 들었지만,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린다거나 모범생 이미지를 버리는 게 더 두려웠다. 학교가 싫어서 자퇴하고 싶어 하는 친구의 고민이나, 매일 아침 7시 등교가 힘든 반 친구의 잦은 지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른들의 인정과 적당한 보상들에 만족했다. 이런 장녀 마인드는 성인이 된 후에 혼돈을 맞게 된다.



디스인챈트는 심슨 가족의 제작자 맷 그로닝이 넷플릭스에서 내놓은 신작이다.


익숙한 그림체로 바로 알아볼 수 있다. ‘퓨처라마’가 미래를, ‘심슨 가족'이 현재를 배경으로 했다면, 디스인챈트는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야기는 드림랜드라는 중세시대쯤으로 추정되는 왕국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빈은 드림랜드의 공주다. 주인공은 전형적인 디즈니 공주님과 거리가 멀다. 헤비 드렁커에 놀기 좋아하고 성에 남자도 끌어들인다. 노래를 부르면 새들이 날아온다거나 귀엽게 생긴 난쟁이들과 춤추며 논다거나 하지 않는다. 지옥에서 온 루시퍼와 타락한 요정 엘모와 베프 먹고 술집에서 노는 게 주요 일과다.



‘빈이 손대는 대부분이 망쳐진다’가 대다수 에피소드의 중심 이야기다. 이웃나라 왕자와의 결혼식에서 약혼자를 죽여버리고(의도한 건 아니지만), 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성에서 파티를 열다가 바이킹에게 왕국을 뺏기기도 한다. 그 와중에 바이킹 우두머리와 썸도 탄다.



맷 그로닝이 만든 심슨 가족과 퓨처 라마를 좋아한다. 그래서 디스인챈트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사실 맷 그로닝 시리즈 중에서 제일 재미가 없었다. 스토리도 고만고만했고, 유머나 풍자도 이전 시리즈만큼 재치 있진 않았다. 하지만 한 시즌을 몰아보고 나서 느껴지는 묘한 쾌감이 있었다.


빈은 드림랜드의 유일한 후계자고 왕은 빈이 정숙한 딸이자 책임감 있는 공주가 되길 바란다. 신하들은 계속 빈을 평가하고 백성들의 눈은 항상 빈을 향해있다. 그럼에도 빈은 누군가 정한 역할과 기대에 부응하기를 거절한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더 큰 사고를 치고 다닌다.


생각 없이 사고를 친 후에 수습하는 걸 반복하는데 대부분은 수습되지 않고 더 엉망이 되어버린다. 제대로 알아서 책임지거나 해결하는 게 별로 없다. 그렇다고 마냥 생각 없는 캐릭터는 아니어서 자책으로 이어진다. 그럴 때 왕으로나 아버지로나 엉망인 조그 왕, 빈 보다 더 막장인 엘모와 루시가 함께 해준다. 그러면서 어쩔 때는 함께 힘을 합쳐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어쩔 때는 엉망인 채로 끝이 난다. 성 안에서 지루해하며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면서 모든 게 불만이던 공주님은 점점 자신이 누군지 발견한다.



서른을 앞두고 있는 지금, 십 대 소녀인 빈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


성인이 되고 부모님과 선생님을 대신해 나에게 높은 기대감을 심어준 건 스스로였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알아볼 여지도 주지 않고 무형의 사회가 주는 기준을 따라갔다. 회사에서도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주어진 내 역할에 충실하고 상사의 기준에 만족스러운 직원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고분고분한 모범생의 유통기한은 딱 학생 때까지였다. 말 잘 듣는 첫째 딸 역할도 집에서나 가끔 잘하면 되는 거였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서 아니 원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회사나 내가 속한 집단과 사람에게 갈릴 필요는 없었다. 가끔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해보기도, 엉망인 채로 내버려 두기도 했어야 했다.



더 용기내야 할 모든 사람들에게


꼭 장녀만이 아니어도, 우리나라는 한 사람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역할에 맞게 행동하길 기대하며 기준도 높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떠맡은 역할에 치여 살고 있다. 심지어 엄격한 기준으로 자기 검열을 하기도 한다. 더 자유로워져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빈에게 배운 게 있다. 세상엔 한 사람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내가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봐도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의 경우는 그럴수록 용기내기 보단 움츠러들기를 선택했다. '정상'이란 모호한 기준으로 스스로를 그만 괴롭히자. 모든 자아의 성장이 사고와 탈선으로 완성되는 건 아니지만 우리에겐 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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