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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각시 Jan 27. 2020

정답이 없는 시험

[서른, 무직입니다만 04]

서른 무직입니다만
서른 살 백수. 시험용 글쓰기가 아니라 내 얘기를 쓰고 싶어서 시작한 에세이.







“난 솔직히 서울대랑 같은 대우받는 거 안 바라.”


M의 말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입은 열지 않았지만 얼굴이 벌게지고 미간을 찌푸리는 등 표정을 그대로 노출시킨 탓에 다른 친구들은 내가 화가 났다는 걸 눈치챘을 터다. 어쩌다 서울대 얘기가 나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M은 나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의 소신을 계속 털어놓았다.


“서울대 가기까지 얼마나 노력을 했겠어. 보상에 차이가 있어도 난 괜찮아.”


그 자리에는 나와 M, E와 K 총 4명이 있었다. 우리는 같은 시험을 준비할 목적으로 모인 스터디원이었다. 셋은 모두 같은 학교 학생이었고 나만 타대생이었다. 나는 그들의 학교에서 스터디를 1년쯤 넘게 같이 하고 있었다.


스터디를 그 학교에서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공짜였으니까. 스터디를 하는 공간은 그 학교 학생들 중에서도 특정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곳이었다. 그 건물에 들어가려면 입구에서부터 비밀번호를 눌러야 했다. 당연하게도 타대생인 내게 그 번호는 공유되지 않았다.


스터디를 하는 날이면 난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고 친구가 안에서 문을 열어줄 때까지 건물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이 시간이 꽤나 뻘쭘하고, 나를 바라보는 그 학교 학생들의 시선(얜 뭐지? 하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차라리 담배라도 피울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밖에서 서성이는 건 이 건물에 들어갈 자격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라는 정당한 목적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만 이런 굴욕 아닌 굴욕을 견디면 좋은 스터디원이면서 친구들인 이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 참을 만했다.


이 스터디는 내가 유독 아끼는 모임이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효용도 효용이지만 스터디원들과 마음이 맞았다. 우리는 동갑내기로 말이 잘 통했다. 오전에 스터디를 마치고 함께 점심식사를 한 뒤 가지는 티타임 30분이 유일한 낙으로 느껴질 만큼 난 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다. 그런데 M의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나의 모교는 이들의 학교보다 '입결'이 낮았다. M은 속으로 내가 본인과 다른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이걸 차마 물어볼 순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 나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스터디를 나왔다.


언젠가 내가 준비하는 시험이 ‘정답이 없는 시험’이라 답답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 자신만의 논리를 구성해 완성된 글을 대상으로 평가하는 이 시험은 수학공식처럼 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래서 내가 잘 썼다고 생각하는 글이 떨어지기도 하고, 왜 떨어졌는지 명확한 이유를 알기도 어렵다.



나는 정확히 반대의 이유로 이 시험이 좋았다. 하나의 정답을 맞히는 게 아니라 각자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즐거웠다. 찬성이든 반대든 입장이나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하게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하면 이기는 게임. 빈틈없는 논리를 쌓아 올리고, 상대의 주장을 논파했을 때 묘한 쾌감을 느꼈다. 내가 정량평가와 잘 맞지 않는 인간이라서 이런 유형의 평가방식을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험을 치르면 치를수록 이 시험에도 ‘답이 정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정성평가 성적이 좋더라도 면접에서 성별, 출신학교, 나이가 당락을 가를 때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느낌에 근거한 판단만은 아니다. 실제로 면접을 보기 전 대기하고 있던 장소에서 한 인사담당자는 “우리 회사가 남자들한테 인기가 없나 봐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필기 통과를 못한 건데요..?) 어떤 회사는 필기에서부터 성별을 고려해 여자 남자를 동수로 뽑아놓고 면접을 봤다. (시험 응시자는 여성이 압도적 다수다) 여성 10등과 남성 10등이 과연 ‘같은 성적’이었을까.


나는 ‘명문대, 젊은, 남성’이라는 정답에 어느 하나도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내가 떨어진 이유에는 실력이 부족한 탓도 클 것이다. 하지만 30대, 여성, 비명문대, 긴 취업 공백기가 합격에 마이너스 요소인 건 부인할 수 없다.


요즘 유행하는 블라인드 평가도 보여주기일 때가 많다. 이전 과정에선 블라인드더라도 임원면접에선 학교와 학점 등을 요구하거나 블라인드라 해놓고 면접에서 언제 졸업을 했는지, 언제부터 시험을 준비했는지 등을 물어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블라인드라는 명분은 취하고 싶고 지원자 스펙은 알아야겠고. 하나만 해라...



M은 이러한 냉혹한 현실을 일찍이 받아들이고 체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덤빌 수 없는 싸움이라면 체념하는 게 속편 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사회에서 정해놓은 정답과는 거리가 먼 경로를 걷고 있는 나는, 자의든 타의든 내가 준비하는 시험의 속성처럼 나만의 해답을 찾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체념과 수용보다 이 길이 나은지 확신은 물론 없다. 어쨌건 난 M과 함께하는 스터디를 나와버렸고, 이렇게 취업과는 무관한 나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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