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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개미 Jan 23. 2020

여자와 담배와 농구

농구 일기

나는 흡연가였고, 농구인이다. 농구 코트에 근 십 년 간 다섯 번 갔고 다섯 번의 방문 모두 근 삼 개월 일이다. 삼 개월 전, 농구동호회에 가입했다. 내겐 담배와 농구가 가진 공통점이 있는데, 시작할 때 마음이다. “이걸 내가 왜 못해?”하는 오기에서 시작했다.


첫 흡연은 독일 교환학생이 끝나가는 시기, 누군가의 작별 파티에서였다. 교환학생 말미에 한두 사람씩 한국으로 돌아갈 때마다 우린 작별 파티를 열고 오늘이 독일에서 마지막 날인 사람이 마치 본인이라도 되는 듯 독일 맥주랑 와인을 들이켰다. 그다음 날 집으로 돌아가는 주인공은 흡연자였는데 걔가 롤링 타바코를 말면서(독일은 갑에 들어있는 담배가 비싸서 다들 담배와 필터와 종이를 따로 사서 말아 피웠다.) 그랬다. “아 이제 한국 가면 담배 이렇게 마음대로 못 피우는데.” 내가 왜냐고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길에서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 사람들이 쳐다보는 일도 잦고 시비를 거는 일도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갑자기 열불이 났다. “나도 하나 말아주라.” 담배에 전혀 관심 없던 나의 흡연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실제로 한국에서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종종 불쾌한 사건을 마주할 걸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언론사를 준비하면서 스터디에 들어갔고, 두 번째 만남 전에 남자 스터디원이 건물 아래서 담배를 피우고 있길래 가볍게 인사를 하고 옆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다 피우고 나서 들어갈 때 그 사람이 대뜸 “담배 피우는 거 부모님도 아세요?” 물었다. 야 그러는 너는 담배 피울 때마다 부모 허락받고 피냐? 이거 경솔한 사람이네, 라는 말이 리얼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참고 “아는데 왜요?” 내 성질머리보다 얌전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뭐 자기가 공대 다녀서 여자 선배들도 담배 많이 피웠고(무슨 관계?) 그래서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것에 대한 편견은 없지만(누구 물어본 사람?) 가방 깊숙한 곳에서 꺼내길래 물어봤단다.(그럼 담배 한 개비씩 귀 뒤에 꽂고 다니다 필까?) 남이사 진짜.


두 번째 시비도 그 즈음의 일인데 친구와 술집 앞에서 담배를 꺼내는데 갑자기 지나가던 아저씨가 자기도 담배 한 대 달라는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면 안 되지만 행색이 초라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배 살 돈이 없어서 나에게 달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표정. 나한테 담배 맡겨 놓는 것 같은 그 당당한 표정. 나는 확신했다. 지금 우리가 만만해서 그러는 거지. “없는데요.” 그랬더니 방금 담뱃갑에 있던 담배는 뭐냐는 아저씨. 그는 나를 잘못 건드렸다. 술 먹은 오개미와 담배 피우는 오개미는 허세와 만용이 머리 끝까지 차 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술 먹다 중간에 담배 피우러 나왔다.  “아저씨 줄 담배 없는 데요.” 그랬더니 갑자기 놀랍게도 한 마디에 그 남성은 노발대발하며 우리 보고 여기를 전세 냈냐고 손가락질을 했다. 우리가 전세 냈다기엔 옆에 담배 피우는 무리가 서넛은 더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 빨리 가시라고요!”까지 외치며 생각했다. 나는 시선과 시비에 굴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겠다. 담배 피우는 여자가 되겠다!

슬램덩크 정대만과 머리가 비슷한 나

농구를 시작한 이유도 비슷하다. 친구들이 농구단을 만들었다. 갑자기 눈이 번뜩였다. 그래, 농구. 내가 왜 농구를 잊고  있었지? 그 치욕의 농구를.


내 작은 키에 콤플렉스를 가진 엄마가 농구를 하면 키가 큰다고 믿은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방학마다 농구 교실에 다녔다. 농구를 좋아했다. 눈치가 빠르고 운동신경도 나쁘지 않아서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대로 곧잘 따라 했다. 슛을 시도하는 것은 그때도 두려워했지만 드리블하며 코트를 뛰어다니는 건 나름 잘했다. 그렇게 몇 번의 방학을 농구로 보낸 중학생은 농구교실에 갔다가 좀 놀란다. 초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남녀 비율이 거의 반반이었는데, 중학생이 되자 또래 여자가 나밖에 없었다. 다들 그만뒀다. 연습 시합에 뛸 ‘여자’는 나뿐이었다. 선생님도 좀 염려하는 눈치였다. 연습 게임을 하기 전 팀을 나눌 때 남자애들이 나를 끼워주지 않을 걸 염려했는지, 가위바위보를 하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여자가 골 넣으면 점수 두 배로 줄게.” 나는 그 반에서 가장 자유투를 많이 넣는 학생이었고, 오래 다닌 고인물이었고, 선생님의 코칭을 가장 빨리 캐치해서 구현해 내는 애제자였지만 그 순간 그냥 ‘여자’가 되었다.


그 게임이 아직도 선연하다. 슛보다 드리블을 좋아하던 나는 게임 내내 망부석처럼 골대 밑에 서서 패스를 받았다. 다른 애들과 같이 뛰어다닐 자격이 없는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남자애들이 코트를 누비는 틈틈이 우리 팀 공격 타임이 되면 소리쳤다. “여자가 골 넣으면 사 점!” “여자가 넣으면 사 점!!!!” 그 게임을 마지막으로 나는 농구교실에 가지 않았다. 그다음은 뭐 뻔하다. 고등학교 땐 남자애들 농구 과 대항전을, 대학교 땐 남자 농구팀 학교 대항전을 그저 바라보는 관중이었다. 딱히 플레이에 관심 있던 것도 아니다. 응원이 재밌었지. ‘여자’는 농구를 잊어갔다.


그런데 여기 농구하는 여자가 있다. 주말에는 농구팀에 나가고 평일 저녁에 두 번씩 농구 학원에 다니고 안 가는 날에는 농구를 위해 근력 운동을 하는 여자가 있다. 내 친구다. 친구 덕분에 농구팀 사람들을 촬영할 일이 있었는데 이들은 만나면 진짜 농구 얘기밖에 안 했다. 여자 농구 리그, 여자 농구 선수, 자기네 팀 선수, 팀 코치, 농구화, 농구 대회 얘기. 두 번째 촬영 때는 수원에 있는 코트에서 만났는데 그때 누군가 제안했다. “개미님도 같이 하실래요?” 팀 말고 농구 얘기였다. 저요? 저는 십 년 동안 농구공도 안 잡아 봤는데요.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드리블을 할 줄 알았다. 패스도. 골밑슛도 넣을 줄 알았다. 이 모든 것은 완전히 착각이었고 드리블도 패스도 슛도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십 년 만에 농구공을 양손으로 잡으니 서서히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농구하고 싶다. 곧 마음은 이렇게 바뀌었다. 나도 시험만 끝나면 농구를 해야겠다!


그렇게 시험이 끝나기도 전에 농구팀에 가입했다. 개미님은 몇 분의 농구 연습만 제안했을 뿐인데 아예 농구팀에 합류해 버렸다. 그리고 실제론 자신이 드리블도, 패스도, 슛도 까먹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고 만다. 그러나 절망하기도 잠시, 또 농구를 향한 오기를 활활 지필 일이 생겼다. 틴더에서 농구 유니폼 입고 있는 사진이 프로필인 남자에게 “나도 농구한다”는 말을 하자 그는 “헐 진짜요?”로 시작해 너무 신기하다, 농구하는 여자 처음 본다, 농구 좋아하는 여자도 본 적 없다, 와 같은 말을 연달아 했다. 갑자기 짜증이 확 나서 “근데 왜 바지에 손 넣고 있는 사진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프로필로 했어요?”라고 면박을 주고 말았다. 그가 “유니폼 정리하는 거예요...”라고 했지만 누가 몰라서 물은 줄 알아, 바로 차단해 버렸다.


담배와 농구의 공통점. 나 담배 피우는 여자야, 나 농구하는 여자야, 라는 자부심이 든다는 것. 그런 마음은 실제로 담배와 농구를 더 즐겁게 한다. 열심히 피고 말 거야. 열심히 하고 말 거야! 누가 뭐래든.


담배와 농구의 다른 점. 담배 피우는 나는 꽤 멋있지만 농구하는 나는 좀...사실은 많이...볼품 없다. 못하는 게 한두 개가 아니지만 지금 눈 앞 가장 큰 벽은 ‘레이업 슛’이다. 분명 이거 중학교 때 수행평가 만점 맞았는데 왜 지금은 하나도 안 되지? 세월은 내가 농구공을 무서워하게 만들어 버렸다. 골대 밑에서 발을 헛디디고, 반대 발로 점프하고, 드리블을 너무 많이 한 나머지 림 밑을 지나버리는 등, 기초 레이업 슛을 하면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실수를 하며 자신을 객관화했다. 아 나 여러 모로 좀 구린 거 같은데.


그러나 치명적인 구림도 나를 멈출 순 없다. 오기는 나의 동력이기 때문에. 담배와는 달리 오기 말고도 갖가지 이유로 농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이유로 농구를 사랑하게 될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얼른 날이 따뜻해지면 좋겠다. 집 앞 농구 코트에서 개인 연습해야 된다. 그래야 다음 주엔 좀 덜 구릴 수 있다. 꾸준히 농구하는 여자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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