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성여대 포스트모더니즘 2차 과제 _ 데리다의 법과 정의
차별금지법은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나는 기억한다. 사람들은 법 앞에서 모두가 공정하다고 하지만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법을 만드는 사람들의 합의가 필요하고, 그들을 설득해야만 하고, 종종 다른 ‘중요한’ 일들에 밀리기도 한다. 그것은 과연 정의라고 볼 수 있을까.
데리다는 과연 이런 상황을 어떻게 살필까. 그는 법과 정의 사이에 있는 해소되지 않는 난제(이하 아포리아)를 몇 가지 제시한다. 첫 번째로는 규칙의 판단 중지, 쉽게 말하자면 규칙을 의식 없이 따르기만 하는 것은 결정이라고 볼 수 없으며 진정한 결정은 언제나 책임이 요구되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내가 동성과 연애한다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해고되었을 때, 나에게는 나를 ‘직접적으로’지켜줄 수 있는 법이 없지만 나를 해고한 사측을 보호할 수 있는 법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판사가 만약 사측은 혐의가 없다고 판결한다면 판사는 법에 따르는 기계에 불과한 결정 아닌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판사가 마치 그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의지대로 새로운 판결을 내려 사측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비록 법에 순응하는 행위는 아닐지라도 법의 지평을 한층 더 넓히는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후자와 같은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난다 하더라도 소수의 판사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전자의 경우 사측은 무혐의, 무죄라는 판결을 받았다는 이유로 정당해지고, 판사는 ‘기계적으로만 판단할 뿐’이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라도 판사는 법 밖에서 자의적으로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정당한 판결을 내렸다고 볼 수 없다. 이렇게 법 앞에서 판결을 내려도, 법 밖에서 판결을 내려도 우리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이런 ‘결정 불가능한’ 사안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데리다는 이를 두 번째 아포리아라고 말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결정내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환상에 불과하며 이분법을 초과하는 존재가 있다. 데리다는 이것을 유령이라고 말한다. 유령은 언제고 우리의 삶에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형이상학자들은 반복적으로 재등장하는 유령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라캉은 철학과 예술이 주인과 히스테리자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고 말한다. 히스테리자가 자신을 정의해 보라고 하거나, 진리에 대해 말해보라고 한다면 주인은 자신의 학식을 동원해 대답하지만 히스테리자는 그것은 답이 아니며 현재를 붙잡고 있지도 않는다고 대답하는 예시는 유령과 형이상학자의 관계와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유령은 지극히 현상적이며 형이상학적 논리에 속하는 법에게 계산 불가능한 것을 계산하고, 결정 불가능한 것을 결정토록 촉구하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히스테리자와 주인은 서로 개별적인 존재이지만 유령은 현상의 기원이자 조건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결국 앞으로 법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데리다는 법을 수립하는 것은 결국 유령과도 같은 정의라고 말한다. 정의는 법을 넘어서 법에게 그가 앞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기 때문이다. 감히 법 바깥에서 우리에게 그것이 과연 정당한지,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지,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간에 이 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들은 꾸준히 발생하고, 결국 인간은 유령이 제시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법을 창조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가 유령을 설명하는 방법이다.
앞선 질문에 답을 해보자. 나는 유령 같은 존재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성정체성을 숨기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성소수자’라는 속성을 가진 나는 존재하고, 그것은 불쑥불쑥 법익 앞에 나타날 것이다. 법은 사회적 합의라는 지극히 현상적인 근거를 통해 제정되지만, 결국 그것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은 유령이기 때문이다. 현상적 근거를 통해 반복되기만 하는 결정은 결정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이 정당하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유령은 결정할 수 없는 문제를 결정하라고 사람들을 호도한다. 언젠가는 이 문제가 결정되리라 믿는다. 아마 지금 당장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유럽 전체를 떠돌아다녔던 공산주의의 유령처럼, 지금 한국을 떠돌아다니는 성소수자의 유령을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본다. 그러니 이 앞에서 합의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결국 법은 언젠가 확장되어야 한다. 성소수자의 유령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법이 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이야기하며 존재한다. ‘차별을 금지하라.’는 방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