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손톱이 자란다 (11) - 완결

by 곡도



노인은 침대 옆에 숨겨놓았던 담배를 챙겨서 병실을 나간다. 홀로 남은 아버지는 창밖의 꽃가지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어느새 햇빛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예전에 세 인물상들이 불렀던 가사 없는 생일축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인물상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때 성민이 조용히 다가와 졸고 있는 아버지 앞에 선다. 예전에 성민이 지훈에게 씌워줬던 웃는 입모양의 마스크를 쓰고 있다. 마스크를 벗자 그의 표정도 마찬가지로 웃는 입모양이다. 노래는 성민이 무대에 머무르는 동안 계속된다.


성민 안녕하세요.


아버지는 잠에서 깨어나 성민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버지 아니, 어떻게…….


성민 왜요. 제가 죽은 줄 아셨어요? (웃는다.) 거의 그럴 뻔했죠. 그런데 병원을 옮기자마자 운 좋게 심장 이식 수술을 받았어요. 지금 병원에서 퇴원하고 오는 길이에요. (지훈을 빤히 바라보며) 실은 꼭 사과드리고 싶었어요. 그때는 정말 죄송했어요.


아버지 아니다. 됐다. 다 지나간 일이니까. 건강해 보이는구나.


성민 네. 감사한 일이죠. 이게 다 심장을 기증해 주신 분 덕분이에요. (환하게 웃는다.)


아버지 잘 됐구나.


성민 오면서 좀 걱정했어요. 혹시나 안 계실까 봐서요. 그런데 여긴 변한 게 하나도 없네요. 아저씨도, 여기 형도.


아버지 그래, 그렇지, 뭐.


성민 그 대신 누군가가 죽었겠죠.


아버지 뭐?


성민 그냥 그렇다구요. (빙글빙글 웃는다.) 아, 오늘은 날씨가 참 좋아요. 화창한 봄날이에요.


아버지 그래, 그렇구나.


성민 살아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그렇죠?


두 사람은 침묵한다.


성민 그럼 이만, 저는 가 볼게요.


아버지 그래. 잘 가라.


인사하고 돌아서던 성민이 갑자기 돌아서며 말한다.


성민 너무 서운해하진 마세요.


아버지 어?


성민 누가 아나요? 아저씨가 말한 것처럼 거기 형이 나보다 더 오래 살지도요. 그게 10년 후가 될지, 20년 후가 될지, 50년 후가 될지는 모르지만요.


성민은 낄낄거리며 참았던 웃음을 터트린다. 무대가 점차 어두워지면서 노랫소리가 뭉개지더니 어느새 속닥거리는 소리로 바뀐다. 성민은 계속 웃음소리를 내며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세 인물상들이 나타나 수군거린다.


인물상1 사과하러 온 게 아니야.


인물상2 복수를 하러 온 거야.


인물상3 생명은 대단해.


인물상1 어쩌면 저리도 자신만만할까?


인물상2 어쩌면 저리도 오만할까?


인물상3 자신들은 절대 죽을 리 없다고 생각해.


인물상1 절대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인물상2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주제에


인물상3 역시 난 살아날 줄 알았다고 큰소리를 치네.


인물상1 과연 그럴 만하지 않아?


인물상2 과연 그럴 자격이 있지 않아?


인물상3 그렇게 생명이 모든 생명 없는 것들을 깔보고 조롱할 때


인물상1 죽음은 그 생명의 오만과 허물까지


인물상2 겸손하게 감싸 안을 거야.


인물상3 무참하게 감싸 안을 거야.


아버지 그럼 지훈이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우리 지훈이는?


무대가 어두워졌다가 순식간에 밝아지며 아버지는 깜짝 놀라 눈을 뜬다. 그는 의자에 앉아있다. 창밖에는 여전히 따듯한 봄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때 간호사가 빈 종이상자와 새 침대시트를 들고 들어와 노인의 침대를 정리한다.


아버지 뭐 하는 거예요?


간호사 물건을 정리하는 거예요.


아버지 아니, 왜요?


간호사 여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소스라치며) 돌아가셨다고? 죽었다구요?


간호사 네. 갑자기 폐출혈이 와서 쇼크사했어요. 손을 쓸 시간이 없었어요.


아버지는 말을 잇지 못한다. 간호사는 정리를 계속한다.


아버지 (혼잣말하듯) 방금, 방금 성민이가 왔었는데.


간호사 누구요? 오늘 병실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버지 아무도 없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어. 아, 그럼 어제였나? 그저께? 아니, 아니, 저번 주였던가?


간호사 꿈을 꾸셨나 보네요.


간호사는 침대 정리를 마치고 병실을 나간다. 아버지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지훈의 옷을 벗기고 몸을 닦아주기 시작한다. 잠시 후 아이와 엄마가 들어와 노인의 침대에 앉는다. 엄마는 아이를 환자복으로 갈아입히고 노인의 침대에 짐을 풀어놓는다. 아이는 장난감 비행기를 들고 성민의 침대 위에서 펄쩍펄쩍 뛰다가 지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아이 엄마, 저 아저씨 죽었어?


엄마 얘, 조용히 해. 그런 거 아냐.


아이 그런데 왜 잠만 자? 왜 꼼짝도 안 해? 그럼 죽은 거 아냐?


엄마 아니 그게…….


아버지 (버럭 소리 지르며) 안 죽었어. 우리 지훈이는 안 죽었어. 이거 봐. 이거 보라고. (지훈의 손을 들어 올려 마구 흔들어 대며) 손톱이 이렇게 자라고 있잖아. 깎아줘도 깎아줘도 계속 자란단 말이야. 이거 봐. 이거 봐.


아버지는 그대로 주저앉아 지훈의 손톱을 깎기 시작한다. 신호음과 기계음이 들려오며 무대가 완전히 어두워진다. 창문이 사라지고 하얀색 봄꽃이 점점 클로즈업되더니 거대한 꽃송이들이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빛난다. 암전. 신호음과 기계음이 점점 멀어진다. 막.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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