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웃음가스 (10) - 완결

by 곡도




무대가 밝아진다. 무대 한 가운데에는 치과용 진료 의자가 관객들을 향해 놓여 있고, 무대 뒤쪽으로는 층계처럼 점점 높아지는 단이 진료 의자를 중심점으로 반원을 그리고 있다. (진료 의자는 실제 관객들까지 포함해서 수많은 관객석에 의해 둘러 싸여있는 셈이다.)

힘찬 음악 소리와 함께 검은색 정장에 검은색 모자를 쓴 사람들이 입장한다. 그들은 마취와 수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지만 모두들 한꺼번에 떠드는 바람에 소음으로 들린다. 사업가와 여배우도 입장해서 가장 높은 단 한 가운데 앉는다. 여배우는 검은색 드레스 차림에 가장 무도회 가면을 쓰고 있다. 미지막으로 시장이 입장하자 모두들 박수를 친다.


시장 감사합니다, 여러분. 하지만 박수는 좀 더 아껴두도록 하십시오. 누가 뭐래도 오늘 박수를 받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니까요. 모두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역사적인 수술에 참관하기 위해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주셨습니다. 어떤 분은 먼 지방에서 이틀 동안이나 기차를 타고 오셨고 (단 위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일어나서 인사한다), 또 어떤 분은 중요한 사업 계약까지 미루고 오셨고 (단 위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일어나서 인사한다), 또 어떤 분은 지금 부인이 진통 중인데도 이렇게 참석해 주셨습니다. (단 위에 앉아있던 한 사람이 일어나서 인사한다) 그만큼 모두들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장담하건데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두고 보세요. 오늘 이 자리에 있었던 것만으로도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될 테니까요. 여러분에게 얘기를 들으려고 조르는 사람들을 위해 매일 저녁 시간을 비워둬야 할 걸요. 온갖 모임에 불려 다니겠죠. 아주 바빠질 거예요. 아주 유쾌해질 겁니다. 자, 모두들 준비 되셨습니까? 그럼 오늘의 주인공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위대한 과학자이자 의사, 마취의 아버지, 박애주의의 표본. 여러분, 호레이스 박사님을 모시겠습니다.


조명이 번쩍거리더니 한껏 멋을 부린 호레이스 박사가 화려하게 등장한다. 그 뒤를 헐렁한 회색 수술복을 걸친 무명이 따라 나오지만 아무도 주목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 모두 박사를 향해 환호를 보내며 열렬히 박수를 친다.


시장 어서 오십시오, 박사님. 어서 오세요. 정말 대단한 날입니다. (관객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열렬히 박사님을 환호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세요. 박사님의 수술에 참관하기 위해 온갖 어려움도 마다않고 오신 분들입니다. 티켓 가격도 만만치 않았는데 전부 매진되었어요. (손을 한쪽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고가의 암표까지 돌았다는 소문입니다.


호레이스 박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시니 정말이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일개 치과의사일 뿐인데요.


시장 오늘 부로는 더 이상 일개 치과 의사가 아니지요. 곧 온 세상이 박사님의 존함을 알게 될 텐데요.


호레이스 박사 원 별 말씀을요. 그거야 세상이 하는 일이지 제가 하는 일은 아니지요.


시장 아아, 역시 평생을 연구에만 헌신하신 학자다운 말씀이군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럼 오늘 수술에 대해 박사님께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호레이스 박사 네, 그러죠. 오늘 제가 여러분께 보여드릴 수술은 썩은 어금니 발치입니다.


시장 (과장하며) 세상에. 저도 6년 전에 오른쪽 어금니를 뽑은 적이 있지요. 정말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이었어요. 이빨이 아니라 턱이 뽑혀나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호레이스 박사 (과장하며) 맞습니다. 정말 그래요. 이빨을 뽑아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수술실인지 고문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라니까요. 의자에 꽁꽁 묶인 환자의 짐승 같은 비명소리에 온 병원이 떠나갈 듯 하고, 탈진한 환자는 몇날 며칠을 이불 속에서 뒹굴며 몸서리치죠. 고통 앞에서 지성이니 이성이니 인격 따위는 단번에 무너지고 말거든요. 하지만 이제까지는 의사들도 환자들도 그걸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어쩔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당연한 것, 어쩔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연구자의 사명이니까요. 자신이 서 있는 단단한 땅덩어리도 계속 의심하고 파내려가야 하는 거죠. 설사 그 구덩이 밑으로 끝없이 추락하게 될지라도 말입니다. 에, 그러니까 새로운 시대는 언제나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가들과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선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으며…….


시장 (말을 가로채며) 자아, 자, 여러분, 박사님께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정말 기대가 되는 군요.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기적과도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겁니다. 뺀찌로 자신의 이빨이 뽑혀 나가는 데도 미동도 없이 평온한 사람을 보게 될 거예요. 자신의 이빨이 뽑혀나가는 동안 한가하게 점심 메뉴를 고를 수도 있을 거구요. 원한다면 맥스웰 방정식이라도 풀어볼 수 있겠죠. 와우, 그게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호레이스 박사 저는 기적이라는 말 대신 무통수술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시장 뭐, 좋습니다. 좋아요. 박사님, 그럼 이제 그 무통수술을 시작해 주시겠습니까?


호레이스 박사 그러죠. 자, 환자, 앞으로 나와 보세요.


무명이 앞으로 나선다. 수술가운이 너무 헐렁해서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무대는 전체적으로 마술쇼 같은 느낌을 풍기기 시작한다.


호레이스 박사 (무명에게) 환자, 입을 크게 벌려보세요. 더 크게. 더, 더, 더. 그렇지. 그렇게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지 말고. (박사는 가늘고 긴 지휘 막대기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흔들어 댄다.) 여러분에게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이 환자는 여기, 오른쪽 두 번째 어금니가 썩었습니다. 색깔도 까맣게 변하고 이미 구취도 풍깁니다. 지금은 가끔씩 쑤실 뿐이지만 몇 달 안에 썩은 부위가 잇몸 신경까지 건드릴 겁니다. 그럼 볼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고 두통이 생길 정도로 통증이 심해지죠. 제일 좋은 방법은 곧바로 발치하는 것인데 모두들 통증이 무서워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더 심각해지기 일쑤입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파수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 훼방꾼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제 오늘부터는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아니에요. 제가 고통에 단단히 고삐를 틀어 맬 테니까요. 고삐를 매고, 길들이고, 원한다면 재주를 부리게 할 수도 있지요. (시장이 헛기침을 한다.) 흠, 네네, 자아, 그럼 이제 최초의 무통수술, 인류 역사상 가장 박애적이고 가장 인격적인 수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명에게) 환자. 진료의자에 앉으세요.


무명이 미동도 없이 물끄러미 호레이스 박사를 바라본다.


호레이스 박사 환자, 뭐하고 있습니까. 빨리 자리에 앉아요.


무명이 미동도 없이 물끄러미 호레이스 박사를 바라본다.


호레이스 박사 (당황하며) 아아, 환자가 수술이 두려워서 망설이는 모양입니다. 당연한 일이죠. 그렇고 말구요. 치과에는 언제는 오는 사람들보다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이 더 많은 법이니까요. 하지만 이번 수술은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제가 약속하죠. 자, 그러니까 나를 믿고-, 자아, 아무 걱정 말고-,자리에 앉아요, 어서.


물끄러미 호레이스 박사를 바라보던 무명은 마침내 진료 의자에 앉는다. 박사는 가스통에 연결된 호스 끝을 무명의 입 속에 넣는다.


호레이스 박사 이게 바로 아산화질소라는 마법의 가스입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해주죠. 환자는 어금니 한 개가 아니라 이빨 서른두 개를 모두 뽑는다 해도 태연하게 다음 휴가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거예요. 물론 가스에 취해서 우스꽝스러운 계획이 될 테지만요. 오늘은 캐나다를 갔다가 다음 날에는 중국을 가고 또 다음 날에는 프랑스를 간다는 식이죠. (혼자 고개를 흔들며 큰 소리로 웃는다) 자, 이 정도면 마취가 충분히 된 것 같군요. (무명의 입에서 호스를 꺼낸 뒤) 입을 크게 벌려보세요. 더 더 더 크게요. 좋아요. 좋습니다. (두 손을 비비며) 자, 기대하시라. (긴장을 고조시키는 음악이 나온다.) 이제 뽑습니다.


호레이스 박사가 뺀찌를 무명의 입안에 넣는다. 모두들 쥐죽은 듯 조용해진다. 박사가 손에 힘을 주더니 이빨을 뽑아낸 뺀찌를 머리 위로 높이 쳐든다. 와, 모든 사람들이 그 이빨을 올려다본다. 잠시 침묵. 호레이스 박사는 황홀한 미소를 짓는다. 그 때 별안간 무명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친다.


무명 아악. 아파. 너무 아파요.


호레이스 박사 (당황하며) 뭐?


무명 아아아, 너무 아파. 아파 죽겠어.


호레이스 박사 어어, 아니, 이거…….


무명 아아, 아파요. 아파. 너무 아프다고.


호레이스 박사 왜 이러지? 응? 왜 이래? 어? 알았으니까, 일단 조용히 해봐. 조용히 좀 하라고.


무명 아악. 아악. 아프단 말이야. 아파. 아파.


호레이스 박사 좀, 좀 닥쳐, 좀, 제발, 제발.


참관인들이 조금씩 웅성거리더니 급기야 야유를 퍼붓기 시작한다.


시장, 사업가, 여배우, 참관인들 사기꾼. 뻔뻔한 인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런 짓을 벌이다니. 거짓말쟁이. 협잡꾼. 이틀을 걸려서 왔는데. 중요한 계약도 미루고. 애가 아들인지 딸인지도 보지 못한 채. 고통을 느끼지 않는 수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말도 안 되는 소리.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엉터리. 비열한. 쓰레기. 대가를 치러야 돼. 본때를 보여줘야 돼.


호레이스 박사 왜? 왜? 왜?


시장, 사업가, 여배우, 참관인들이 몰려나와 호레이스 박사에게 다가간다. 그들의 검고 커다란 그림자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박사는 비틀거리며 도망가고 모두들 그 뒤를 쫓는다. 그 때까지 비명을 지르고 있던 무명은 무대에 혼자 남게 되자 거짓말처럼 비명을 멈춘다. 그리고 진료의자에서 일어나 환자 가운을 벗어 던지고 다시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치마 차림으로 돌아간다. 무명은 무대 앞 쪽으로 나와 관객들에게 말한다.


무명 호레이스 박사는 더 이상 이곳에서 의사 노릇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어느 곳에서도 할 수 없었죠. 박사는 그 길로 도망치듯 도시를 떠나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어느 시골 촌구석에 처박혀버렸습니다. 시집간 제 사촌 여동생이 마침 박사와 같은 마을에 살고 있어서 가끔씩 박사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박사는 매일 술이나 퍼마시며 망나니로 살다가 그만 클로로포름에 중독되었다고 하더군요. 뭐, 요즘 의사들에게는 흔한 일이죠.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도 모두 탕진하고, 가족과 친구들도 떠나고, 심지어 매춘부에게 앙심을 품고 황산을 뿌리다가 경찰서에 잡혀갈 정도로 폐인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오늘, 오늘 아침에, 저는 사촌 여동생에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박사가 이틀 전에 자살했다구요. 넓적다리의 동맥을 절단했다고 합니다. 흠, 의외로 겸손한 자살이네요. 호레이스 박사라면 좀 더 거창한 방법을 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뭐, 나름 의사답게 기술적인 자살이긴 합니다만. 자, 이렇게 제 이야기는 끝이 났습니다. 그럭저럭 그럴 듯한 엔딩이었죠? 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보도록..... (마치 관객 중에 누군가가 질문한 것처럼 행동하며) 네? 네에? 뭐라구요? 네, 네, 아아, 호레이스 박사의 수술에서 대체 뭐가 잘못됐던 거냐구요? 전혀요. 잘못된 건 전혀 없었습니다. 그건 완벽한 수술이었어요. 호레이스 박사님은 정말 솜씨가 좋으시더군요. 하나도 아프지 않았으니까요. 네? 그런데 왜 그렇게 비명을 질러댔냐구요? 으악, 아파요. 아파 죽겠어요. -왜냐구요? (사이) 저도 웃어보고 싶었거든요.


무명은 조금씩 웃기 시작하더니 결국 박장대소한다. 그리고 그의 웃음에 맞춰 하얀색 풍선이 한 개씩 한 개씩 나타나 결국 무대를 가득 채운다.


무명 (계속 박장대소하며) 보시다시피 전 세계 최초의 무통 수술 환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역사에 남지도 못했죠.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가 되지 못했어요. 네에, 압니다. 저는 영원히 잊혀지겠죠. 이제까지 잊혀졌던 그 수많은 사람들처럼. 여기에 앉아있는 바로 당신들처럼. 하지만 전 제 이야기가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 그걸로 됐어요. 아, 이 자리를 빌어 호레이스 박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셨거든요. 완벽한 결말까지 말이에요. 자살이야 말로 완벽한 결말이니까요. 그렇죠? 자아, 어떠셨습니까, 여러분. 제 이야기가 재미있었나요? 뭐, 재미 없으셨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아, 이런, 벌써 헤어져야 할 시간이군요. 여러분도 이제 돌아가셔야죠.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요. 어때요? 여러분의 이야기도 제 이야기만큼 재미있나요? 물론 그러시겠죠. 여러분도 최선을 다 하고 계실 테니까요. 이야기의 결말을 향해서 말입니다. 자아, 그럼 안데르센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안데르센으로 이야기를 끝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연극은 끝났어요. 교훈을 주었어요. 마땅히 박수를 쳐야죠.]


무명은 박장대소 하며 무대를 가득 채운 하얀색 풍선 뒤로 사라진다. 풍선은 관객들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하고 어느새 무대는 텅 빈다. 암전 없이 관객석에 불이 들어온다.





(완결)



이전 21화[희곡] 웃음가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