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웃음가스 (9)

by 곡도





여배우 이제 내가 불러주는 대사를 따라 해봐요. 지옥의 배심원 여러분,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무명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여배우 내 아들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무명 내 아들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여배우 나는 오늘 여기....


무명 나는 오늘 여기....


여배우는 점차 어둠 뒤편으로 사라진다.


여배우 어머니의 자격으로 왔습니다.


무명 어머니의 자격으로 왔습니다.


여배우 (작은 목소리로) 그 외의 모든 것을 버리고....


무명 그 외의 모든 것을 버리고....


여배우 (더 작은 목소리로) 그 외의 모든 것을 버리고....


무명 모든 과거를 버리고....


여배우 (더 작은 목소리로) 모든 과거를 버리고....


무명 모든 영광을 버리고....


여배우 (더 작은 목소리로) 모든 영광을 버리고....


무명 이야기들, 그 모든 이야기들도 버리려고 합니다.


여배우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버리려고 합니다.


무명 모두들 내 삶을, 심지어 내 죽음까지도 부러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혁명의 상징이자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하는 인간 드라마의 표상으로 말이에요. 내 이야기는 영원히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며 더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죠. 사람들은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영원히 살아있다고 말해요. 그래요. 나는 이야기 속에서 끝없이 모차르트를 만나고, 끝없이 루이와 첫날밤을 치르고, 끝없이 수십 개의 구두를 주문하고, 끝없이 빠삐용의 털을 빗질하고, 끝없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말하고, 끝없이 한 밤중에 왕궁을 탈출하고, 끝없이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고, 끝없이 기요틴에 목이 잘리죠. 그래요. 주인공이 된다는 건 대단한 일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망각에서 태어나 망각으로 돌아가고 마니까요. 아무도 그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허무라고 말하기에도 하찮은 그런 쓸쓸함. 내가 아는 한 화가는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맹세했어요. 어릴 적 어느 꿈속에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던 걸까요? 그래요. 나는 행운아에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왕비이지요. 주인공 중의 주인공 이구요. 나는 그 모든 것에 감사해야 마땅해요. 하지만, 모르겠어요. 내가 언제 마음껏 웃어봤을까요? 기꺼이, 사심 없이, 자신도 모르게, 언제 웃어봤을까요? 내 웃음소리가 기억나질 않아요. (사이) 아, 내 아들의 웃음소리는 기억나요. 내 아들은 늘 웃고 있었어요. 기꺼이, 사심 없이, 자신도 모르게 말이에요. 그 아이의 웃음소리가 내 입가를 긴장시키곤 했어요. 나도 아들처럼 웃고 싶었어요. 함께 큰 소리 웃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어요. 내 양쪽 입가에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 매달려 있었거든요. (버럭 소리 지르며) 바로 앙투아네트가요. 하하, 이제 그 앙투아네트는 죽었어요. 뒤져버렸어요. 그럼 이제 나도 아들을 따라 웃을 수 있을까요? 함께 큰 소리로 웃을 수 있는 걸까요? (사이) 아니면 이제는 내 아들이 웃음을 잃어버렸을까요?


여배우 솔직히 말할까요?


무명 솔직히 말할까요?


여배우 나는 지옥으로 죽은 아들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무명 나는 지옥으로 죽은 아들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라....


여배우/무명 내 웃음을 찾으러 왔습니다.


시장, 사업가, 호레이스 박사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며 무대가 밝아진다.


시장 좋습니다. 좋아요. 그렇게 합시다.


사업가 이건 정말이지 대단한 히트를 칠겁니다. 모두들 이 얘기를 하고 다닐 거예요. 온 세계가 열광할 겁니다.


호레이스 박사 다 여러분 덕분입니다. 저 혼자는 이 모든 걸 감당하지 못했을 거예요.


시장 별 말씀을요. 박사님이 주인공인 걸요.


사업가 그럼요. 우린 들러리일 뿐이죠.


호레이스 박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시장 자, 모두에게 본때를 보여줍시다.


사업가 모두들 정신을 번쩍 차릴 거예요.


시장 역사가 이 모든 걸 기억할 겁니다.


호레이스 박사 저야말로 여러분의 도움을 잊지 않겠습니다.


사업가 그럼요. 그렇구말구요.


시장 우린 이제 한 배를 탄 겁니다.


시장, 사업가, 호레이스 박사가 큰 소리로 웃는다.


시장 그래, 그래서, 그 첫 번째로 마취 수술을 받게 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사업가 그래요. 그 행운아가 누굽니까?


호레이스 박사 아, 내 정신 좀 봐. 오늘 여기에 같이 왔습니다.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죠.


호레이스 박사가 사람들을 무명 쪽으로 안내하다가 무명의 차림새에 깜짝 놀란다.


호레이스 박사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시장 (속삭이며) 저 사람입니까?


사업가 (속삭이며) 벌써 마취제를 몇 통 마시고 온 건가요?


여배우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세요. 같이 놀이를 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서로 옷을 바꿔 입는 놀이 말이에요.


사업가 (웃으며 여배우에게) 장난꾸러기 같으니. 예술가들은 모두 장난꾸러기들이죠. 기회가 있으면 놓치질 않아요. 여기 또 한건 한 모양이군요.


시장 (웃으며 무명에게) 뭐, 다시 보니 제법 잘 어울리는데요.


호레이스 박사 에, 어쨌거나 정식으로 소개를 올리죠. 바로 이 사람이 그 역사적인 일을 수행할 환자입니다.


무명이 얼떨결에 치맛자락을 넓게 펼치며 우아하게 인사한다. 사업가와 시장도 깍듯하게 격식을 갖추어 인사한다.


시장 그래서, 이 사람은 그날 어떤 수술을 받게 되나요?


호레이스 박사 어금니를 뽑게 될 겁니다.


사업가 어금니 발치라, 좀 시시하지 않을까요?


호레이스 박사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수술 중에 가장 어려운 수술인데요.


시장 아니, 오히려 더 좋습니다. 이빨이 뽑히는 고통이야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들 잘 알고 있으니까요.


사업가 하긴, 그건 사실이에요. 치과에서는 언제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죠.


호레이스 박사 네, 제 환자 중에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치과야말로 웃음을 잃은 곳이랍니다.


시장 하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질 겁니다. 모두들 웃으면서 이빨을 뽑게 될 거예요.


사업가 치과야말로 웃음이 가득한 곳이 되는 거죠.


여배우 바로 극장처럼 말이죠?


무명의 옷을 입고 있는 여배우가 이빨이 뽑히며 괴로워하는 연기를 우스꽝스럽게 해 보인다. 모두들 큰 소리로 웃는다.


시장 (호레이스 박사에게) 참, 그날 성공적으로 시연을 마친 후에 청중들 앞에서 한마디 하셔야죠?


사업가 당연히 하다마다요. 모두들 박사님 얘기를 듣고 싶어 할 텐데요. 거절 하시면 안 돼요.


호레이스 박사 실은 조금 준비하기는 했는데…….


시장 아, 벌써요? 그럼 우리가 먼저 그 연설을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호레이스 박사 지금 여기서요?


사업가 연습이라고 생각하세요. 모든 무대는 연습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시장 맞습니다. 그거야 제가 제일 잘 알죠. 자, 이럴 게 아니라 아예 이 위에 올라가서 제대로 해보도록 합시다.


사업가 좋은 생각입니다. 위로 올라가세요.


시장과 사업가가 호레이스 박사를 탁자 위로 올려 보낸다.


호레이스 박사 (관객들을 향해) 아, 예, 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와주셨군요. 여러분과 이 순간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큰 영광입니다. 에, 무엇보다 먼저 최초의 마취제가 탄생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해주시고 응원해 주신 (시장과 사업가를 가리키며) 여기 두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작은 발견이 역사의 큰 발자취가 될 수 있도록 두 분께서 물신양면으로 도와주셨지요. 여러분이 제게 보내주시는 이 열렬한 박수를 모두 이 두 분께 돌리는 게 마땅한 도리라고 봅니다. (시장과 사업가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여러분, 저는 의사로서 언제나 환자만을 바라보며 묵묵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길은 고단하고 외로웠지만 환자들의 고단함과 외로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죠. 환자를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히려 환자를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빠트려야 한다는 사실이 언제나 저를 괴롭혔습니다.


여배우 (시장과 사업가에게 속삭이며) 박사님은 치과의사잖아요?


시장, 사업가 쉿.


호레이스 박사 아아, 고통을 주지 않고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다면. 이것이 저의 평생의 꿈이자 목표였습니다. 이제 그 꿈을 이루었으니 제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상의 환호에 화답한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앞으로 더욱 연구에 매진해서 여러분의 이 큰 사랑에 보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 뿐만 아니라 오늘 이 위대한 수술을 목격한 정직한 증인으로서 여러분의 역할 또한 가볍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되도록 멀리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십시오. 이제 우리는 병뿐만 아니라 고통도 치료하게 되었다구요. 그리고 확신하건데, 언젠가는 분명 죽음도 치료하게 될 것입니다.


호레이스 박사가 가상의 환호성에 몇 번이고 정중하게 인사하며 손을 흔든다. 시장, 사업가, 여배우가 박수를 친다.


시장, 사업가, 여배우 브라보, 멋져요. 훌륭합니다. 완벽해요.


테이블에서 내려온 호레이스 박사와 시장, 사업가, 여배우가 왁자지껄하게 자축한다. 그 때 무영이 불쑥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다.


무명 저기, 실례지만…….


호레이스 박사, 시장, 사업가, 여배우 모두 의아하게 무명을 바라본다.


무명 저는요?


호레이스 박사, 시장, 사업가, 여배우 에?


무명 저, 저도 한 마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시장 당신이요?


여배우 사람들 앞에서?


사업가 아니, 왜?


무명 저, 그게, 그거야.... 저도, 이번 일의 주인공이니까.


시장 주인공?


사업가 당신이 주인공라고?


여배우 어머, 대담하기도 해라.


무명 (당황하며) 아니, 그게, 저도 이 역사적인 수술에 참여하고 있으니까요. 아주 중요한 역할로요. 네에, 박사님도 그러셨잖아요. 우리는 한 쌍이라고 말입니다.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구요. 그러니까, 로미오와 줄리엣처럼요.


시장, 사업가, 여배우, 호레이스 박사가 박장대소한다.


시장, 사업가, 여배우 (큰 소리로 웃으며)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니. 그것 참 로맨틱 하군요.


호레이스 박사 (웃으며) 아, 여러분, 내가 그렇게 말한 건 사실입니다. 설명하다 보니 그런 표현이 나왔습니다만, 이제 보니 조금 부적절했던 것 같군요.


무명 부적절이요?


호레이스 박사 이봐 이봐. 내 말 좀 들어 봐. 이 최초의 마취 수술에서 우리가 한 쌍인 건 사실이야. 아니, 한 쌍이라는 건 아무래도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한 팀이라고 해두지. 아, 물론 멋진 팀이지. 난 우리의 팀워크에 아주 만족하고 있어. 하지만 우리 관계를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유하는 건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 말하자면, 그게, 구조적으로 말이야. 뭐랄까. 음, 그래, 자네가 좋아하는 안데르센 동화를 예로 들어볼까. [성냥팔이 소녀] 알고 있지? 말하자면 성냥팔이 소녀는 나이고, 자네는 성냥인 셈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이야기에서 성냥이 중요하긴 하지만, 성냥에게 무슨 대사가 필요하겠나.


무명 하지만, 안데르센의 다른 이야기에서는 성냥들도 얘기를 합니다. 성냥들은 이렇게 외치죠. [아, 그 때 우린 푸른 가지 위에서 자랐어. 가지들처럼 우리도 푸르렀지.]


호레이스 박사 그래, 그래, 성냥이 말을 한다니 굉장히 독특하군. 흥미로워. 하지만 지금 이 이야기에서는 아니야.


무명 (사이) 아닌가요?


호레이스 박사 물론 아니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나니까. 나야말로 오랫동안 이런 이야기를 꿈꿔왔거든. 평생 동안. 사실 거의 포기할 뻔 했지. 그런데 마침내 이렇게 주인공 자리를 따내게 된 거야. 내 힘으로 말이야. 그래, 어쩌면 난 처음부터 이런 운명이었는지도 몰라. 이야기는 돌고 돌다가 결국 자신의 결말로 굴러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대단한 이야기일 줄 누가 알았겠나? 미안하지만 난 이 이야기를 누구하고도 나눠가질 생각이 없어.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말게. 자네도 이번에 꽤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니 언젠가는 주인공 자리를 꿰찰 수 있을 거야. 자네만을 위해 준비된 대사도 사람들 앞에서 멋들어지게 읊어 보고 말이야. 암, 그렇고말고.


시장, 사업가, 여배우 자, 어서 갑시다. 준비할 게 많아요. 역사를 만들어야죠.


호레이스 박사, 시장, 사업가, 여배우가 자신들끼리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무대를 빠져나간다. 무명은 혼자 우두커니 서 있다가 관객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긴 치마 옷자락을 끌며 무대를 빠져 나간다. (암전)





(계속)




이전 20화[희곡] 웃음가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