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웃음가스 (8)

by 곡도




그 때 사업가와 여배우가 등장한다. 꽃과 보석으로 장식된 크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배우의 손에는 작은 핸드백과 부채가 들려있다.


시장 아, 마침 저기 오시네요. (사업가에게)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잘 오셨습니다.


사업가, 여배우, 시장, 호레이스 박사가 서로 인사를 나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무명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누구도 무명을 의식하지 않는다.


시장 아까부터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업가 뭔가 좋은 소식이라도 있나보군요.


시장 대단한 제안거리가 있지요.


사업가 제안이라. 돈벌이가 될 만한 일인가요?


시장 그럼요. 돈벌이지요. 큰돈을 벌수가 있어요. 하지만 단순한 돈벌이가 아닙니다. 돈보다 더 큰 명예가 걸린 일이죠. 역사적인 사건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거니까요.


사업가 역사적인 사건이요?


시장 자자, 이리 오세요. 차근차근 얘기를 나눠봅시다.


시장, 사업가, 호레이스 박사가 뒤쪽 테이블 끝으로 가서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린다. 세 사람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혼자 남은 여배우는 지루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제서야 무명을 발견하고 다가온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에도 시장, 사업가, 호레이스 박사의 수군거리는 소리는 계속된다.)


여배우 당신은 누구죠?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거예요?


무명 아, 저는…….


여배우 호레이스 박사님의 시종이라도 되나요?


무명 아닙니다. 저는…….


여배우 아아,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저 사람들이 지금 꾸미고 있는 일과 관계가 있는 모양이군요. 보나마나 대단한 일이겠죠. 너무 대단해서 시시하기 그지없는 일말이에요. 예를 들면 요즘 남자들이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그 땅따먹기 같은 거 말이죠. 하지만 전 그런 어린애 같은 일에는 관심 없어요. 어떻게 그토록 조숙하던 소년들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철이 없어지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아니,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낯이 익네요.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나요?


무명 예, 얼마 전에 자선 파티에서요.


여배우 그렇군요. 그런데 실례지만 잘 생각이 안 나네요. 그 때 어떤 옷을 입고 있었죠?


무명 지금 이 의상과 똑같았어요.


여배우 아하, 이제 기억나네요. 그 때의 그 웨이터/웨이트리스군요. 말을 더듬던.


무명 네, 맞아요.


여배우 지금은 말을 안 더듬네요.


무명 지금은 괴상한 질문을 하지 않으시니까요.


여배우 어머나, 누군가 괴상한 질문을 했었나 봐요? 하긴 그런 사람들이 있죠. 괴상한 걸 고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요. 하지만 그런 질문을 받더라도 당황할 필요 없어요. 그건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니까요. 제가 그런 질문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줄게요. 자, 이렇게 손을 튕기면서 대답하는 거예요. 어머, 누가 요즘도 그런 촌스러운 주제에 관심을 가져요? 자, 한 번 해봐요. 어서요.


무명 제가요? 아.... 음..... 어.... (자신 없이) 어머, 누가 요즘도, 그런 촌스러운 주제에, 관심을 가져요?


여배우 아니아니, 더 도도하게 해야죠. 더 뻔뻔하게, 눈을 이렇게 내리 깔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오히려 질문한 사람이 부끄러워질 만큼 말이에요. 요즘은 무지한 것 보다 촌스러운 게 더 부끄러운 세상이니까요. 그 때 파티에서 받았던 질문이 뭐였죠?


무명 그건, 저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냐고…….


여배우 자, 그럼 내가 다시 한 번 그 질문을 해볼게요. 내가 가르쳐준 대로 해보세요. (근엄한 척하며)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나요?


무명 (도도하게, 뻔뻔하게, 눈을 내리깔며,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어머, 누가 요즘도 그런 촌스러운 주제에 관심을 가져요?


여배우 (박수를 치며) 좋아요. 잘 했어요. 완벽해요. 그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럼 다시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이미 촌스러운 질문이 되었으니까요. 그나저나 정말 무례한 질문이군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냐니.


여배우는 핸드백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 화장을 고친다. 무명이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무명 옷이 정말 화려하네요. 너무 아름다워요.


여배우 그렇죠? 하지만 이 옷이 보기엔 예뻐도 보통 무거운 게 아니랍니다. 30킬로그램이나 나가니까요. 하지만 그 정도는 견딜 가치가 있죠. (손거울을 핸드백에 집어넣으며) 자아, 보세요. 대답해 봐요. 제가 누구라고 생각해요?


무명 어, 그게, 어머, 누가 요즘도 그런 촌스러운…….


여배우 에그, 나한테 그런 대답은 집어치워요.


무명 아, 미안해요. 날 시험하는 건 줄 알았어요.


여배우 자아, 잘 보세요. 나는 누구일까요?


여배우는 치마를 펼치며 한 바퀴 돌아 보인다.


무명 (안데르센 주인공들) 엘리자 인가요? 아니, 눈의 여왕인가? 사람이 된 인어 공주?


여배우 아니에요. 다 틀렸어요. 난 앙트와네트라구요.


무명 앙트와네트요? 그 프랑스의 요녀 말이군요.


여배우 (요염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할 수도 있죠. 그녀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말이에요.


무명 앙트와네트도 당신이 맡았던 배역 중에 하나였나요?


여배우 그래요. 작년이었죠. 바로 이 옷을 입고서요. 흥행은 영 신통치 않았어요. 연출가가 도통 감각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난 이 역할이 좋았어요. 앙트와네트, 참 흥미로운 인생이에요, 그렇죠?


무명 하지만 끝이 좋지 않았죠. (머리 잘리는 시늉을 한다.)


여배우 그래서 더 좋은 거죠. 머리가 잘리지 않은 왕비 얘기가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무명 그런가요?


여배우 이 30킬로그램짜리 옷에서 마침내 탈출하는 그 아름다운 왕비의 머리를 상상해 봐요. 그녀의 목에서 쏟아져 내리는 수백 가지의 이야기로 이 옷은 붉게 물들 거예요.


여배우는 옷자락을 펼치며 우아하게 춤을 춘다.


무명 (감탄하며) 배우는 정말 대단하군요.


여배우 어째서요?


무명 모든 이야기 속을 자유자제로 출입할 수 있는 만능열쇠를 가지고 있잖아요.


여배우 (박장대소하며) 멋진 말이지만 그건 헛소리에요. 배우에 대해 허튼 환상을 갖고 있군요. 하긴 다들 그렇죠. 하지만 배우들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순 없어요. 이야기에는 문이 없으니까요. 그러니 만능열쇠 같은 것도 있을 턱이 없죠. 그저 우리는 그 이야기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며 흉내를 내는 것뿐이랍니다. 하지만 그 그림자가 토끼인지 오리인지 누가 알겠어요?


무명 토끼든지, 오리든지, 다른 뭐든지 간에, 배우는 그 무엇이든 믿게 만들 수 있지요.


여배우 하지만 그건 쓸쓸한 생각이에요.


무명 왜죠?


여배우 마치 배우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것 같잖아요.


무명 아니, 거짓말쟁이인 걸 자랑스러워해야죠. 거짓말이 없었다면 이야기도 없었을 테니까요. 실은 저도 어렸을 때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저 그렇고 그런 엑스트라 배우가 될까봐 두려워서 포기하고 말았죠.


여배우 아, 하긴 누가 엑스트라가 되고 싶겠어요. 그들이야 말로 그림자들의 그림자들인데요.


무명 (두 팔을 벌리며) 하지만 어쨌거나 저는 결국 엑스트라가 되어버렸어요.


여배우 그건 사실이에요. (손을 뻗어 무명의 턱을 만지며) 불쌍하기도 해라. 흠, 그럼 오늘 잠깐이라도 주인공이 되어보면 어때요?


무명 주인공을요? 제가요?


여배우 네, 이 옷을 입고 앙투아네트를 연기해 보는 거예요. 대사는 내가 가르쳐 줄게요.


무명 앙투아네트요?


여배우 주인공 중의 주인공이죠.


무명 주인공 중의 주인공.


여배우 모든 조명이 나를 비추고, 모든 관객이 나를 바라보는 그 순간을 한 번 느껴보세요. 내가 세상의 그림자인지 세상이 나의 그림자인지 알 수 없는 그 끔찍한 구원의 순간을요.


무명 구원이라구요?


여배우 (옷을 벗으며) 자아 자, 망설이지 말아요. 저기 저 사람들은 얘기가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으니까요. 그 때까지 우리도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드레스를 넘겨주며) 이걸 입고 당신의 옷을 내게 주세요. 어서요.


무명은 자신의 옷을 벗어 여배우에게 주고 그녀의 드레스를 받아 입는다. 여배우도 무명의 옷을 입는다.


여배우 (드레스를 입은 무명을 보며) 어머나, 이것 봐요. 멋지잖아요. 뭐, 아주 잘 어울린다고 할 수는 없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타당하기 마련이죠. 아, 한 가지가 빠졌네요. (핸드백에서 붉은색 립스틱을 꺼내며) 입술을 붉게 칠해야죠.


무명 이런, 색깔이 너무 붉은데요. 희극적으로 보이겠어요.


여배우 (립스틱을 칠해주며) 희극적으로 보이라고 칠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여자들이 뭐 하러 얼굴에 화장을 하겠어요.


무명 아하, (우리) 여자들이야 말로 선천적인 배우들이군요.


여배우 그럼요. 그래서 가장 위대한 배우는 여배우인 거죠. (립스틱을 거두며) 됐어요. 이제야 그럴듯하네요. 좋아요. (무명을 무대 앞으로 세우며) 여기 앞에 서세요. 네, 거기 앞에요. 자아, 이제 자신을 앙투아네트라고 상상해 보는 겁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자신을 누구라고 상상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죠. 차라리 자신을 앙투아네트와 자신의 중간 어디쯤이라고 상상해 봐요. 말하자면 끝없는 미로에 갇혔지만 어딘가에는 반드시 출구가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거죠. 자, 고개를 들어요. 아니, 고개를 숙여요. 허리를 펴고, 아니아니, 허리를 구부리세요. 머리를 단정히 넘기고, 아니죠. 마구 헝클어뜨려 봐요. 아, 나도 모르겠네요. 본인이 내키는 대로 해봐요. 그냥 내키는 대로요. 다시 말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결국 타당하기 마련이니까요.


무명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포즈를 잡는다.


여배우 그래요. 그렇게요. 좋아요. 그게 바로 당신의 앙투아네트군요. 그럼 그게 틀림없는 앙투아네트인 거죠. 자아,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요? 내가 불러주는 대사를 그대로 따라해 보세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지옥의 배심원 여러분, 내가 오늘 여기-


무명 잠깐만요. 이야기의 배경이 지옥인가요?


여배우 그런데요?


무명 대체 앙투아네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여배우 에이, 이야기는 알아서 뭐하게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이야기는 그저 텍스트를 공중에 매달아 두기 위한 끈에 불과할 뿐이에요. 텍스트가 심연으로 떨어져 내리지 않도록 묶어둔다지만, 결국 그 끈으로 텍스트의 목을 매다는 거죠. 이야기가 텍스트의 목을 매달고, 그 텍스트들이 다시 배우들의 목을 매달구요.


무명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군요. 어쨌거나 이야기의 내용도 모른 채 마구 대사를 뱉어낼 순 없어요.


여배우 (한숨) 그럼 할 수 없죠. 정 목을 매달 끈이 필요하다면야. 이건 그러니까, 앙투아네트가 지옥으로 자신의 아들인 루이 찰스를 찾아가는 얘기에요.


무명 그 가엾은 아이가 지옥으로 갔다는 말인가요?


여배우 왜요? 지옥에는 무고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아요?


무명 뭐, 물론 그건 아니지만요. 그나저나 지옥이라니, 19세기 치고는 좀 고루한 설정이군요. 새하얀 악마들이 검은 불을 내뿜고, 붉은 하늘에서 펄펄 끓는 황산비가 내리고, 발밑을 뒤흔드는 천둥소리보다 죄인들의 비명 소리가 더 시끄러운 곳- 뭐, 거기 인가요?


여배우 네, 고루한 건 사실이에요. 안타깝게도 작가들은 아직도 고루한 설정을 좋아해요. 그게 자신들의 작품을 더 문학적으로 만들어 준다고 믿고 있거든요. 심지어 더 고루한 게 뭔지 아세요? 지옥으로 내려가는 그녀가 들고 있는 바구니 안에는 그녀의 잘린 머리가 들어있다는 사실이에요.


무명 그건 마음에 드는 데요.


여배우 그럼 다행이구요. 자, 자신의 머리를 바구니에 넣고 아들을 찾아 지옥으로 내려간 앙투아네트는 지옥의 법정에 서게 됩니다. 지옥의 배심원인 유령들의 투표에서 이겨야만 아들을 다시 데려갈 수 있지요.


무명 민주주의가 지옥까지 점령한 모양이군요.


여배우 아니오. 반대로 민주주의는 원래 지옥에서 시작된 거예요. 오직 지옥에서만이 모두가 평등하니까요. 아, 그리고 로베스피에르가 앙투아네트의 변호를 맡아요.


무명 뭐라구요? 그녀의 죽음을 선동했던 로베스피에르가 그녀의 변호사라구요? 세상에, 어째서요?


여배우 어째서라뇨? 그거야 당연히 그가 지옥에서 가장 유능한 변호사이기 때문이죠. 자아, 바로 그 지옥에서 벌어지는 재판이 이 연극의 내용이랍니다.


무명 거 참 비극적이군요.


여배우 (웃으며) 지옥이요?


무명 희극적인가요?


여배우 (정색을 하며) 지옥이요?


무명 연극적이라고 해두죠.


여배우 그럼 우리의 연극을 계속해 볼까요. 이건 앙투아네트가 지옥의 재판장에서 자신을 변론하는 장면이에요. 이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죠. 실제 공연에서는 연극을 보는 관객들을 향해 말하게 되어 있어요. 그들이 지옥의 배심원들이라는 설정이거든요. (주변을 둘러보다가 관객들을 가리키며) 음, 우리는 여기, 오래된 사망 증명서가 쌓여있는 이쯤에 관객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죠.


무명이 앞으로 나가 관객들을 바라본다. 여배우는 뒤로 물러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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