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웃음가스 (7)

by 곡도




2부



호레이스 박사의 연구실. 책들과 의학 도구들이 무대 한쪽에 차려져 있고, 다른 쪽에는 화려한 의상들이 가득 걸린 옷걸이와 화장대가 있다. 호레이스 박사는 연구실을 가로지르며 서성이고 있다. 무명은 무대 앞쪽에 놓여있는 진료 의자에 앉아 관객들을 바라보고 있다.


호레이스 박사 나왔어?


무명 아니요.


호레이스 박사가 연구실을 몇 번 더 왔다 갔다 한다.


호레이스 박사 나왔어?


무명 아니요.


호레이스 박사가 연구실은 몇 번 더 왔다 갔다 한다.


호레이스 박사 이제 나왔나?


무명 아직이요.


호레이스 박사 그것 참. 좀 더 힘을 줘봐.


무명 (힘을 주다가) 안 되는데요.


호레이스 박사 답답하구만. 집중을 하라고, 집중을. 힘을 한 곳에 모으고 근육을 조이는 거야. 이렇게, 이렇게 말이야. (양 손으로 근육을 조이는 흉내를 낸다.) 그럼 불시에 불쑥 튀어나온다니까. 일단 입구가 열리기만 하면 그 뒤로는 술술 따라 나오지.


무명 (힘을 주다가) 안 돼요.


호레이스 박사 거 참. 이상한 일이군. 아산화질소 가스를 마시면 대부분 자동으로 웃음이 나오는 데. 마치 평소에 웃음이 뱃속에 가득 차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무명 (힘을 주다가) 안 돼요. 못하겠어요.


호레이스 박사 영문을 모르겠구만. 그럼 가스를 좀 더 마셔 봐. 있는 힘껏 말이야.


무명이 진료 의자 뒤에서 가스통을 꺼내 가스를 들이마신다.


호레이스 박사 어때? 이제 웃음이 나올 것 같아?


무명 (힘을 주다가) 아니요. 안돼요. 아, 머리가 아파요.


호레이스 박사 머릿속까지 가스가 가득 차서 그래. 그냥 웃어버리면 편할 텐데. 자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힘을 내보자고. 마음을 편하게 먹고 방귀를 뀌는 거라고 생각해. 쓸모없는 가스를 내보내는 거지. 웃음도 다를 게 없어. 쓸모없는 감정과 생각을 내보내는 거야. 이렇게. (바람 빠지듯 웃는 시범을 보인다.)


무명 (힘을 주다가) 안 돼요. 나오질 않아요.


호레이스 박사 (한숨을 쉬며) 안됐지만 웃는 건 포기해야겠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아마 체질적인 문제일 거야. 특이체질 말이야. 일종의 신경증적 강박의 반작용일 수 있어.


무명 반작용적 강박의 신경증이라구요?


호레이스 박사 뭐-어, 그렇게도 얘기할 수 있겠지. 그런데 웃음은 그렇다 치고, 아산화질소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건 틀림없는 거지?


무명 네, 그럼요. (자신의 팔을 꼬집으며) 이렇게 해봐도 아무 느낌이 없어요.


호레이스 박사 그 정도로는 부족해. 좀 더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 몇 가지 실험을 해봐야겠어. 아, 물론 자네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겠지?


무명 물론이죠. 보수도 넉넉히 쳐주기로 하셨잖아요.


호레이스 박사 한심하긴. 서민들은 어쩔 수가 없다니까. 지금 몇 푼의 보수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 이건 역사적인 사건이란 말이야. 의학의 미래가 활짝 열리는 거라고. 모르겠어? 지금은 불가능한 수술들이 앞으로는 가능하게 될 거야. 지금은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 앞으로는 살 수 있게 되는 거지. 그래, 이거야 말로 죽은 자의 부활만큼이나 대단한 일이 아닌가. 말하자면 자네가 바로 첫 번째로 부활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 공식적으로 말이야. 최초라는 건 언제나 가치 있는 일이지. 모든 이야기가 거기서부터 시작되니까.


무명 이야기의 시작?


호레이스 박사 한바탕 대단한 소란이 일어날 거야. 무명에 불과했던 우리들이 바야흐로 유명인사가 되는 거지. 모두들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고 다닐 거야. 우리들에 대한 진실뿐만 아니라 거짓까지 비싼 값에 소비될 거야.


무명 우리들의 이야기.


호레이스 박사 그래, 우리들의 이야기. 바로 우리가 주인공이지. 자네와 나. 최초의 무통증 마취 수술의와 최초의 무통증 마취 수술 환자. 우리는 대단한 한 쌍이 되는 거야.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말이야.


무명 어,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은 결말이 좋지 않았는데요.


호레이스 박사 무슨 소리. 완벽한 결말이잖아. 그것보다 더 좋은 결말은 없어. 영원한 사랑의 정석이 됐잖아. 불멸의 명성을 얻었지. 뭘 더 바라겠나?


무명 그렇군요.


호레이스 박사 자아, 이제 본격적으로 실험을 해보자고. 자네가 진짜 고통을 느끼지 않는지 확인해봐야겠어.


무명 좋습니다.


호레이스 박사는 무명이 앉아있는 의자를 돌려 뒤로 젖힌다. 무명의 얼굴이 관객을 향해 거꾸로 젖혀진다. 박사는 커다란 수술용 칸막이를 무명의 목에 가로질러 놓아 무명의 몸을 가린다. 관객에게는 칸막이 앞에 무명의 거꾸로 젖혀진 얼굴만이 보이게 된다. 호레이스 박사는 고문도구처럼 생긴 각종 수술도구들이 가득 담긴 손수레를 밀고 칸막이 뒤로 들어간다. 칸막이를 통해 박사의 그림자가 보인다. 칸막이 뒤에서 박사는 무명의 옷을 모두 벗겨내어 칸막이 밖으로 여기저기 집어 던지고는 무명의 몸에 수술도구들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무명의 얼굴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평온하다.


호레이스 박사 (수술 도구를 휘두르며) 어때? 아파?


무명 아니요.


호레이스 박사 (수술 도구를 휘두르며) 지금은 어때?


무명 아무 느낌도 없어요.


호레이스 박사 (헐떡이며) (수술 도구를 휘두르며) 그래? 이래도? 이렇게 해도? 이런 데도?


무명 네.


호레이스 박사 (헐떡이며) (수술 도구를 휘두르며) 좋아, 좋아. 아주 좋아. 그럼 내가 이것저것 해보는 동안 자네는 좀 기다리고 있으라고.


무명 (사이) 지루한데요.


호레이스 박사 (헐떡이며) (수술 도구를 휘두르며) 그래, 그럼, 노래라도, 불러, 보던가.


무명 글쎄요. 아는 노래가 없어요.


호레이스 박사 (헐떡이며) (수술 도구를 휘두르며) 쳇, 그러면, 뭔가 재밌는, 얘기라도, 해 봐.


무명 재밌는 얘기요? (사이) 아, 한 가지 떠오르는 얘기가 있어요.

[식당 문 앞에 매달려 있던 놋쇠 테를 두른 식당 메뉴판이 바람에 날려 광장을 가로질러 극장 입구에 떨어졌다. 극장에 ‘서양 고추냉이 수프와 양배추 건더기’라는 우스꽝스런 프로그램이 걸리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항상 손님이 없던 극장이 그날 밤에는 손님들로 꽉 찼다.]


호레이스 박사 (헐떡이며) (수술 도구를 휘두르며) 그게 뭐야?


무명 재밌는 얘기 좀 해보라면서요.


호레이스 박사 (헐떡이며) (수술 도구를 휘두르며) 누가 한 얘기인데?


무명 안데르센이요.


호레이스 박사 (헐떡이며) (수술 도구를 휘두르며) 아하, 안데르센, 재주 있는 친구지, 길거리를,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 하나에서도, 이야기를 뽑아내는, 재주가 있어.


무명 길거리를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호레이스 박사 (헐떡이며) (수술 도구를 휘두르며)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우리는, 그, 이야기에, 일일이 귀를, 기울일 수가, 없지.


무명 어째서죠?


호레이스 박사 (헐떡이며) (수술 도구를 휘두르며) 세상에는 더, 흥미롭고 더, 아름답고 더, 중요한 이야기들이, 넘쳐나니까.


무명 더 흥미롭고, 더 아름답고, 더 중요한 이야기.


호레이스 박사 (헐떡이며) (수술 도구를 휘두르며) 여전히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


무명 네, 아무 것도.


호레이스 박사가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칸막이 뒤에서 나온다.


호레이스 박사 좋아. 대단해. 이건 완벽한 마취제야. 최초의 마취제.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자네는 아직 실감이 나지 않겠지. 하지만 내 귀에는 벌써 세상을 가득 뒤덮은 환호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벌벌 떨만큼 커다란 소리가. 와아ㅡ 와ㅡ. 자아, 가자고. 그렇게 태평하게 누워 있을 시간이 없어. 이제부터는 무척이나 바빠질 테니까.


무명 뭘 하려구요?


호레이스 박사 쇼를 준비해야지. 이 놀라운 발견에 걸맞는 대단한 쇼. 모든 일에는 극적인 장치가 필요한 법이니까.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가 되도록 말이지. 그러자면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거든. 참, 자네에게 썩은 이빨이 있나?


무명 네, 오른쪽 어금니 하나가 썩었는데요.


호레이스 박사 완벽해. 정말이지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구만. 세상이 온통 내 편인 것만 같아. 자아, 나와 함께 가자고.


호레이스 박사가 큰 소리로 웃으며 칸막이 천으로 무명의 몸을 감싼다. 그리고 무명이 앉아있는 의자를 밀며 춤을 추듯 무대 위를 빙글빙글 맴돌다가 퇴장한다. 암전.


시장의 집무실. 시장의 집무실은 수없이 많은 문이 나있는 넓은 복도 같은 곳이다. 한 가운데는 길고 커다란 탁자가 사선으로 놓여있고 그 뒤쪽 끝에 서류뭉치를 높이 쌓아놓고 한 장 한 장 사인을 하고 있는 시장이 앉아있다. 호레이스 박사와 무명이 입장 한다.



호레이스 박사 안녕하십니까, 시장님.


시장 예에, 누구시더라?


호레이스 박사 호레이스 박사입니다.


시장 누구시라구요? 요즘에는 박사가 하도 많아서.


호레이스 박사 저번에 자선 파티에서 뵈었죠. 그, 웃음가스 말입니다.


시장 아, 생각납니다. 맞아요. 호레이스 박사님이시군요. 기억 하고 말구요. 그런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호레이스 박사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시장 그래요? 좋습니다. 뭐든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시민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게 시장의 임무니까요. (호레이스 박사의 말을 가로막으며) 아아, 그나저나 저번 자선 파티 때는 참 즐거웠습니다. 뭐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요. 그 웃음 가스라는 게 아주 신통한 물건이더군요. 다음 주에 저희 집에서 부부동반 동창회 모임이 있는데 그 때도 박사님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때는 웃음 가스를 더 넉넉히 준비해 주십시오. 제 친구들이 좀 화끈한 성격들이라서요. 아, 이런이런, 내 정신 하고는. 제 얘기만 잔뜩 늘어놓았군요. 무슨 일 때문에 오셨다구요?


호레이스 박사 그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시장님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한 중대한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앞으로 시장님의 정치 행보에도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시장님은 그저 한 도시의 시장으로만 끝내기에는 아까운 분이니까요.


시장 그런가요?


호레이스 박사 모두들 그렇게 말하고 있지요.


시장 다시 말씀 드리지만, 저는 시민들의 얘기에 언제나 귀를 활짝 열어놓고 있지요.


호레이스 박사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이 모든 게 다 시민들을 위한 일이에요.


시장 그렇다면 더 자세히 들어봐야겠군요.


호레이스 박사 (주위를 둘러보며) 잠깐 저쪽으로 가실까요?


시장과 호레이스 박사는 탁자 뒤쪽 끝에 가서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린다. 무명은 앞쪽 탁자 끝에 홀로 서 있다.


시장 오.... 그래요?....... 오호....... 그래서요?...... 그런...... 수술을......... 고통 없이...... 확실한가요?...........


호레이스 박사 그럼요........ 마취가....... 대단할 겁니다......... 아뇨..... 확실한........ 최초의......... 그렇죠...... 그래요..... 그렇게 될 겁니다.


시장 대단하군요. 정말 대단해요. 박사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이지 대단한 일입니다. 모두가 박사님을 우러러 볼 겁니다. 현재의 의사들과 환자들뿐만 아니라 미래의 의사들과 환자들까지요. 아니, 그 뿐입니까. 박사님을 위한 동상이 세워지고, 박사님의 이름을 딴 병원과 거리가 생길 겁니다. 박사님의 위인전도 앞 다투어 출간될 거예요. 박사님은 영웅이 될 겁니다. 의학의 아버지가 히포크라테스라면 박사님은 뭐, 의학의 어머니쯤은 될 거예요.


호레이스 박사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에게는 그저 환자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입니다.


시장 물론이죠. 그렇다마다요. 저도 같은 마음 입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일수록 널리 알려야 하는 법이죠.


호레이스 박사 그건 옳으신 말씀입니다. 태초에 홍보가 있었죠. 창조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런데 일개 치과 의사에 불과한 저 혼자 힘으로는 힘든 일이라서요. 시장님같이 명망 있는 분이 도와주신다면 모를까요.


시장 그럼요. 도와드려야죠. 이런 일이라면 백 번 천 번이라도 도와드리고 말구요.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저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우리 도시의 영광이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영광이에요.


호레이스 박사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시장 과찬이라니, 천만해요. 박사님같은 선구자에게는 어떤 칭송도 부족하지요. 그래요.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아예 판을 더 크게 벌리는 겁니다. 대중 앞에서 직접 마취제 효과를 보여주는 거예요.


호레이스 박사 대중 앞에서요?


시장 그렇습니다. 공개적으로 무통증 수술 시연회를 하는 거예요. 격식 있는 장소도 빌리고, 지붕 위로 높이 플랫카드도 걸고, 저명인사들도 초대하고, 와인과 치즈도 차려놓고, 악단과 기자들도 부르구요.


호레이스 박사 그거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기적 같은 의학 발전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있겠군요. 그럼 그들이 호외보다 더 빨리 세상 구석구석으로 이 소식을 전해주겠지요. 그런데, 일을 크게 벌이려면 자금이 많이 들 텐데요.


시장 모든 일에는 돈이 들기 마련이죠.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투자자들이 돈다발을 싸들고 너도나도 앞 다투어 몰려들 테니까요. 우린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아, 마침 곧 사업가 한 분이 온다고 하셨으니 그 분과 함께 말씀을 나눠봅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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