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개 가라사대 (1)

by 곡도




등장인물


1인2역 : 늑대 – 개

1인3역 : 늑대2 – 개2 - 경찰2

1인3역 : 늑대3 – 개3 - 경찰3

시체



* 모든 등장인물들의 성별은 임의적이다.





1부


무대는 어둡다. 화면으로 사용되는 무대 뒷벽에는 (이하 화면) 높이 뜬 달과 숲의 검은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무대 바닥에는 텔레비전, 책상, 의자, 컴퓨터, 시계, 냉장고 (냉장고는 되도록 관객석 가까이에 놓도록 한다.), 화분, 카펫, 쿠션 등등 가정용 집기들이 쓰레기처럼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배우들은 이 집기들을 최대한 연기에 이용하도록 한다.)

맨발에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다급하게 무대 위로 뛰어 들어온다. 동시에 화면은 사라지고 캄캄한 허공이 된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것처럼 자꾸만 주변을 살핀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관객들을 둘러보다가 무대를 빙 돌아 한 가운데로 뛰어가 바닥에서 작동하고 있는 무빙머신 위에서 관객들을 향해 제자리에서 뛰기 시작한다. (무빙머신은 바닥과 평평하게 붙어있어서 관객석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잠시 뒤 맨발에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무대 양쪽에서 한 명씩 등장한다. 그들은 무빙머신 위에서 달리고 있는 사람과 매우 흡사해 보인다. 그들은 달리고 있는 사람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서 너 발자국 떨어진 뒤쪽에 서서 별안간 사납게 짖기 시작한다. (이 두 사람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수시로 서로 자리를 바꾼다.) 달리던 사람은 놀라서 허둥거리다가 무빙머신에서 바닥으로 떨어진다.



늑대2/늑대3 (사납게 짖는다.)


늑대2 (사납게 짖는다.)


늑대3 (사납게 짖는다.)


늑대 (바닥에서 일어나며) 어, 아니, 이거, 왜, 왜들 그래?


늑대2 (사납게 짖는다.)


늑대3 (사납게 짖는다.)


늑대 아냐. 난, 난 그냥 산책을 나온 거야. 이거 참, 달도 높이 뜨고, 어, 날씨도 좋고 해서 말이야.


늑대2 (사납게 짖는다.)


늑대3 (사납게 짖는다.)


늑대 아니, 늑대라고 해서 산책하지 말라는 법 있나? 그러니까, 그래, 좀 출출해서 두더지라도 잡아먹으려고 나온 거야. (관객들을 가리키며) 저기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작은 눈들이 보이지?


늑대2 (사납게 짖는다.)


늑대3 (사납게 짖는다.)


늑대 정말이야. 두더지, 두더지들, 어둠 속에서 눈만 내밀고 있는 두더지들.


늑대2 (사납게 짖는다.)


늑대3 (사납게 짖는다.)


늑대가 별안간 무대 앞을 돌아 무대 뒤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늑대2와 늑대3이 그 뒤를 쫓는다. 늑대는 무대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무빙머신 위를 있는 힘껏 달려간다. 그러나 곧 늑대2와 늑대3에게 붙잡혀 바닥에 내동댕이쳐진다. 늑대2와 늑대3이 늑대를 위협한다.


늑대2/늑대3 (사납게 짖는다.)


늑대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늑대 난 가야돼.


늑대2 (사납게 짖는다.)


늑대3 (사납게 짖는다.)


늑대 부탁이야. 날 보내줘.


늑대2 (사납게 짖는다.)


늑대3 (사납게 짖는다.)


늑대 저기 저 불빛이 보이는 산 밑에…….


늑대2 (사납게 짖는다.)


늑대3 (사납게 짖는다.)


늑대 그래, 난 인간들에게 갈 거야.


늑대2 (길게 짖는다.)


늑대3 (길게 짖는다.)


늑대 난 개가 될 거야.


늑대2/늑대3 (버럭 소리치며) 안 돼.


늑대2 (사납게 짖는다.)


늑대3 늑대의 수치야. (길게 짖는다.)


늑대2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돌아가자.


늑대 싫어. 난 인간의 마을로 가겠어. 가서 그들의 개가 되겠어.


늑대2/늑대3 (짖는다.)


늑대2 이해할 수가 없어. 개가 되겠다니.


늑대3 도대체 왜, 왜 개 따위가 되려는 거지?


늑대 설명해도 너희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늑대2 이해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건 바로 너야.


늑대3 자, 우리를 봐. 너 자신을 봐.


늑대2와 늑대3이 늑대 주위를 돈다.


늑대2 바위처럼 우뚝 솟은 어깨.


늑대3 새파랗게 타오르는 두 눈.


늑대2 검고 뻣뻣한 털가죽.


늑대3 강철 칼날처럼 날카로운 이빨.


늑대2 우리가 가지 못하는 곳은 없어.


늑대3 우리가 죽이지 못하는 동물도 없지.


늑대2 우리는 독립적이야.


늑대3 우리는 자유로워.


늑대2 우리는 비굴하지 않아.


늑대3 우리는 최고의 포식자야.


늑대2 최고의 살육자.


늑대3 모든 동물들이 우리를 두려워해.


늑대2 심지어 인간들도.


늑대3 그런데 그런 늑대가 인간의 발바닥이나 핥으면서 그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를 받아먹는 개가 되겠다고?


늑대2와 늑대3이 사납게 짖으면서 늑대를 위협한다.


늑대 그래. 맞아.


늑대2/늑대3 (으르렁 거린다.)


늑대 개. 개. 개. 나는 개가 되겠어.


늑대2/늑대3 (으르렁 거린다.)


늑대 인간의 발바닥을 핥으며 머리를 조아리겠어. 그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를 기쁘게 받아먹을 거야. 그들 앞에서 귀엽게 재롱도 부리고, 공을 던지면 잽싸게 물어오고, 그들의 양을 밤새도록 지킬 거야. 그들에게 위험이 닥치면 목숨을 걸고 그들을 보호하겠어. 아주 기꺼이.


늑대2 (구슬프게 짖는다.)


늑대3 (날카롭게 짖는다.)


늑대2 대체 왜지? 왜?


늑대3 먹을 것 때문이야?


늑대 역시 너희는 그런 것부터 생각하는 구나.


늑대2 편하게 앉아서 배를 채우고 싶은 거야?


늑대3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뼈다귀를 얻겠다는 거야?


늑대 (비웃으며) 왜? 그러면 안 돼?


늑대3 (으르렁 거린다.)


늑대2 배부르게 먹을 수만 있다면 긍지 따위는 내던지겠다는 거구나.


늑대 만약 우리에게 내던질 긍지가 있다면.


늑대2 (으르렁 거린다.)


늑대3 정말이지 부끄러운 일이야. 그렇게 먹는 게 좋다면 개가 아니라 차라리 돼지가 되어야지. 꿀꿀꿀꿀꿀거리며 인간의 오물 속에서 나뒹구는 돼지 말이야.


늑대 못할 것도 없지. 꿀꿀꿀꿀꿀. 맞아. 난 굶주리는 게 싫어. 징글징글해. 굶주리는 게 무슨 자랑인가? 굶주림에 쫓겨 하루 종일 먹을 것만 찾아 헤매는 삶이야말로 돼지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지. 그거야말로 부끄러운 일이란 말이야.


늑대2 무슨 소리야. 굶주림은 신성한 거야. 굶주림이 우리를 하루하루 버티게 해.


늑대 하하. 신성? 집어 치워. 단지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사는 것뿐이면서. 그건 신성이 아니라 미개함이야.


늑대2 (소리 높여 짖는다.)


늑대3 너는 타락하려고 하는 구나. 네 본질을 부정하려고 해.


늑대 하루 종일 먹는 것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게 내 본질이라면, 배부르게 먹고 다른 꿈을 꾸는 게 타락이라면, 그래 좋아. 난 내 본질을 부정하겠어. 타락하겠어. 그리고 너희들이 주린 배를 붙잡고 (관객들을 가리키며) 저 두더지들 뒤나 쫓아다닐 때 난 그것보다 더 나은 일을 할 거야.


늑대2 나은 일?


늑대3 늑대로 사는 것보다 더 나은 일?


늑대2 살아남는 일보다 더 나은 일?


늑대3 대체 그게 뭔데?


늑대 그건, 그건 나도 몰라.


늑대2/늑대3 모른다고?


늑대 난 그걸 인간들에게서 배울 거야.


늑대2 (사납게 짖는다.)


늑대3 (사납게 짖는다.)


늑대 무언가 새로운 걸 이루려면 무언가 오래된 걸 버려야하는 법이야. 나는 늑대를 버리고 개가 되기 위해, 더 나은 무언가가 되기 위해, 겸손해질 거야.


늑대2/늑대3 겸손?


늑대3 그건 늑대에게는 없는 품성이야.


늑대2 지극히 인간적인 특성이지.


늑대3 그건 그저 여러 방향으로 뒤틀린 인성에 불과해. 약육강식과 계급과 질투심과 교만의 잡종.


늑대2 고상한 척 하는 천박함.


늑대3 자존심을 세우려는 비굴함.


늑대2 소위 인간적이란 게 다 그런 거야.


늑대 하지만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어.


늑대3 헛소리. 인간은 나약하고 비열해.


늑대2 나약하기 때문에 비열하고 비열하기 때문에 나약해. (으르렁 거린다.)


늑대3 그들은 모든 질서를 거스르고 있어.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다고.


늑대2 단지 자신들의 알량한 잔머리를 믿고 시건방을 떠는 거지.


늑대 하지만, 그 알량한 잔머리로 그들이 무슨 일까지 해내는지 우리는 지켜봐야 할 거야. 두고 봐. 그들은 우리 모두의 자랑거리가 될 테니까. 결국 우리 모두를 끝장낼지라도. 어쩌면 인간들 자신마저도 말이지.


늑대3 (길게 짖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