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개 가라사대 (2)

by 곡도




늑대2 넌 벌써 인간들처럼 말하는구나.


늑대 난 언제나 인간들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해 왔으니까.


늑대3 그렇다면 너도 결국 나약해질 거야. 비열해질 거야.


늑대2 그리고 비참해질 거야. 인간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늑대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정말이지, 인간들에게는 기발한 데가 있거든.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걸 생각해내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걸 해내고야마는 힘이 있어.


늑대3 아니, 그건 힘이 아니야. 탐욕이지. 오직 원하는 것을 두 손에 움켜쥐기 위해 정신 없이 달려가느라 발밑에 있는 모든 것들을 성큼성큼 짓밟아 버리는 무모함.


늑대 인간들은 그걸 야망이라고 부르던데.


늑대2 천만해. 오히려 그건 열등감이야. 그들은 열등하기 때문에 더 큰 꿈을 꾸지.


늑대 인간이 열등하다고?


늑대3 몰라서 묻는 거야? 난 딱히 외모로 상대를 비하하고 싶진 않지만, 자, (관객들 쪽을 가리키며) 인간들의 우스운 모양을 한 번 떠올려 봐. 털이 홀랑 빠진 병든 원숭이 꼴이 아니냔 말이야.


늑대2 사실이야. 납작하게 눌려버린 찌그러진 얼굴에, 작고 미숙한 손발 하며, 곧추세운 가느다란 허리는 걸을 때 마다 위태롭게 휘청거리지, 거기다 엉덩이를 흔들며 뛰어다니는 모습은 정말이지 가관이라니까. 두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앞뒤로 넘어지기 일쑤잖아.


늑대3 일종의 기형이야. 변종이고.


늑대2 아름다움이나 기품 따위는 없지.


늑대3 균형도 맞지 않고, 실용적이지도 않아.


늑대2 솔직히 말하면 모든 포유류의 수치야.


늑대3 특히 인간 수컷들의 가랑이 사이를 좀 보라지. 달랑거리는 그 쬐그마한 것을 떠올려 봐. 아직 엄마 젖을 못 뗀 늑대 새끼의 것도 그것보다는 굵고 튼튼할 거야. 겁에 질려 쭈글쭈글 쪼그라들어 있는 꼴이라니, 정말이지 안타까울 지경이지.


늑대2 인간 암컷들의 것은 또 어떻고. 발정기도 따로 없으면서 저렇게 가랑이 사이에 꽁꽁 숨겨놓고 있잖아. 대체 뭘 감추려는 거야? 뭘 아끼려는 거냐고? 새끼도 고작 하나씩밖에 낳지 못하는 주제에, 걸핏하면 그 날이라서 안 된다고 튕겨댄다니까.


늑대3 분명히 인간들도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천조각으로 온몸을 가리고 다니지.


늑대2 (소리 높여 짖는다.)


늑대3 (소리 높여 짖는다.)


늑대 그건 그들이 부끄러움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야.


늑대2 아니, 그건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지.


늑대3 그들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어.


늑대2 만족이란 걸 몰라.


늑대3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평가절하 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기대치는 불가능할 정도로 높거든.


늑대2 그래서 유치하게도 ‘역사’라는 것에 매달리는 거야.


늑대3 이야기를 지어내는 거지. 이야기는 인간들을 실제보다 더 거창해 보이게 하니까.


늑대3이 바닥에 있던, 공기가 가득 차서 빵빵해진 검은 쓰레기봉투를 늑대2에게 던진다.


늑대2 하, 부풀려진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서 우쭐대는 꼴이라니.


검은 쓰레기봉투를 늑대3에게 던진다.


늑대3 마치 털을 곤두세운 새끼 고양이 같아. 막상 잡아보면 풍성한 털 안에는 고작 한 줌의 뼈밖에 없잖아.


검은 쓰레기봉투를 늑대2에게 던진다.


늑대2 텅 비었어.


검은 쓰레기봉투를 곧바로 늑대3에게 쳐낸다.


늑대3 한숨과 공포뿐이야.


검은 쓰레기봉투를 곧바로 늑대2에게 쳐낸다.


늑대2 그래서 가벼운 거야.


검은 쓰레기봉투를 곧바로 늑대3에게 쳐낸다.


늑대3 그래서 요란한 거야.


늑대3이 쓰레기봉투를 높이 들고 터트려버린다. 쓰레기가 허공에서 폭죽처럼 흩어진다.


늑대3 그래서 인간들이 오래전에 이 숲에서 추방된 거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수치스럽게 만드니까.


늑대2 사실 그들은 스스로 도망친 거야.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숨길 수 있는 곳으로 말이야. 오직 인간들끼리만 사는 세상으로.


늑대3 그런데 너는 그 털 빠진 원숭이들을 따라가겠다고? 가서 그들의 애완동물이 되겠다고? 세상에. 생각해봐. 그들은 자신들처럼 네 털도 싹 밀어버릴걸.


늑대 털 따위야 또 자랄 텐데 뭘.


늑대2 바보 같은 소리. 털이 자란다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야.


늑대3 그들이 깎아버린 건 털이 아니라 바로 네 긍지니까.


늑대2 털이 깎이느니 차라리 산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게 더 낫지.


늑대 이봐, 그렇게까지 비장하게 굴 거 없어. 털은 그냥 털일 뿐이야. 인간들은 털을 짧게 깎기도 하고 길게 길러서 묶기도 해. 염색도 하고 파마를 하기도 해. 단지 멋을 부리기 위해서 말이야.


늑대3 그래? 그럼 네 털을 길게 길러서 양 갈래로 땋아 내리면 참 볼만하겠구나.


늑대2 꼬불꼬불한 파마도 잘 어울리겠는데?


늑대3 털을 염색하는 건 어때? 빨간색 혹은 파란색, 아니면 보라색으로 말이야.


늑대 보고만 있어도 우울해지는 이 누렇고 거무죽죽한 털가죽보다는 그게 훨씬 낫지. 솔직히 말해 봐. 빨간색 혹은 파란색, 아니면 보라색 늑대가 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정말 한 번도 없었어?

늑대2와 늑대3은 잠시 머리 위 허공을 바라본다.


늑대2 (정신을 차리며) 아니, 그럼 혹시, 혹시 인간들이 네게 옷이라도 입히면 어쩔래? 설마 그것도 괜찮다고는 못하겠지?


늑대3 뭐어? 설마, 말도 안 돼. 변태야 뭐야? 그런 퇴폐적인 짓까지 강요할 순 없어.


늑대2 인간들은 뭐든지 의인화 시키는 고약한 버릇이 있으니까 말이야. 아, 어쩌면 네게 신발을 신길지도 몰라.


늑대3 에잇, 그만 해. 그건 지나친 생각이야. 아무리 인간이라도 그런 극악무도한 짓까지 할 리가 없어.


늑대 아니, 난, 나는, 신발을 신어도 상관없어.


늑대2/늑대3 (놀라며) 뭐라고?


늑대 옷이건 신발이건 못 입을 것 없지. 그까짓 거 털을 길게 길러서 웨이브 파마도 하고, 꼬리를 무지개 색으로 염색도 하고,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도 입고, 네 개의 발에 구두도 신지, 뭐. 아니, 아예 얼굴에 화장도 좀 할까? 양 볼에 빨갛게 점을 찍고 눈썹도 그리고 말이야.


늑대2/늑대3 (으르렁 거린다.)


늑대 그럼 나도 인간들처럼 부끄러움이라는 걸 알게 되겠지.


늑대2 설마 네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싶은 거야?


늑대 노력하면 될 거야.


늑대2 (짖는다.) 그래,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이제 곧 부끄러운 일 투성이일 테니까.


늑대3 (짖는다.) 하지만 난 부끄러울 게 없어. 난 늑대인 게 자랑스러워.


늑대 (한숨) 늑대로 태어난 늑대가 늑대인 게 자랑스러울 건 없어.


늑대2 넌 늑대로 태어난 늑대가 늑대로 사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구나.


늑대는 발밑에 있던 곰 인형을 들고 조종하듯이 흔든다.


늑대 쉽던 어렵던 그게 무슨 상관이야? 결국 늑대는 늑대일 뿐인데. 늑대로 태어나서 늑대로 죽겠지. 그렇게 십 만년을 살아왔잖아. 십만 년 후에도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 걸. 지금처럼 늑대인 게 자랑스럽다고 뻐기면서. 아, 정말 역사와 전통이 빛나는군 그래. 쳇,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 토할 것 같아.


늑대가 곰 인형을 관객석 쪽으로 던져버린다. 관객석에서 소리가 난다.


늑대 (혼잣말로) 저런, 두더지 머리에 맞았나?


늑대2/늑대3 (으르렁 거린다.)


늑대2 그럼 넌 늑대에게는 아무런 존재 가치도 없다는 거야?


늑대3 늑대로 살아가는 게 쓸데없는 짓이라는 말이야?


늑대 난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 그건, 그건, 각자가 판단할 일이야.


늑대2 인간이 판단할 일이라는 뜻이겠지. 넌 모든 걸 인간의 눈으로 보려고 하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언젠가 인간이 모든 생명의 가치에 점수를 매기는 날이 올지도 몰라.


늑대3 (짖는다.) 아니, 안 돼. 인간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어.


늑대 천만해. 인간들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어. 태초에 가치를 만든 게 바로 그들이니까.


늑대2 가치를 만들었다고?


늑대3 무슨 말이야?


늑대 모든 게 무차별적이고 무작위적인 동등한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은 편애하고 어떤 것은 혐오함으로써 말이야. 어떤 것은 높이고 어떤 것은 낮추고, 인간들은 납작한 평면이었던 이 세상을 비틀고 주물러서 입체적으로 만들었지. 그래서 그것은 바라볼 만한 풍경이 되고, 뛰어들 만한 호수가 되고, 헤매고 다닐 골짜기가 되고, 은밀한 동굴이 되었어. 모르겠어? 인간들이 이 세계를 창조한 거야. 그리고 가치란 바로 이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지도 같은 거란 말이야. 우리를 인간이라는 목적지로 안내해주는 지도.


늑대2 세상에. 넌 인간을 신격화하려고 하는 구나.


늑대3 그들은 숭배하려고 해.


늑대 그래, 난 그들에게 기도할 거야. 나를 구원해달라고 말이야.


늑대2 닥쳐. 인간들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어.


늑대3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으니까.


늑대 결함? 그게 뭔데?


늑대2 (으르렁 거린다.) 변덕이야. 그들은 변덕이 너무 심해. 변덕이야말로 그들의 본성이지.


늑대3 그들은 사랑해주고는 버리고 먹을 걸 주고는 때리고 병을 치료해주고는 죽여. 그런 자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어떻게 숭배할 수 있어? 그런 자들이 대체 누구를 구원할 수 있겠어?


늑대2 가치가 이 세계의 지도라고? 하지만 그들이 너에게 준 지도는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인간들의 변덕이 이미 세상의 모든 지형을 바꿔버렸을 테니까.


늑대3 그들은 지도를 만들고 지형을 바꾸고 다시 지도를 만들고는 또 지형을 바꾸지.


늑대2 모두 커다란 지도를 한 장씩 들고서 각자 다른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어.


늑대3 인간들 자신도 길을 잃고 헤매는 세상으로 인간들을 찾아 떠나겠다니, 너 정말 한심하구나.


늑대 그래, 어떤 신도 완벽하진 않아. 인간이라는 신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나는 그들의 완벽함을 원하는 게 아니야. 난 그저, 그저 그들의 사랑을 원해.


늑대2/늑대3 사랑? (높이 짖는다.)


늑대2 정말 엉뚱한 소리네.


늑대3 정말 순진한 소리야.


늑대2 인간들이 사랑하는 건 오직 자기 자신뿐이야.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비하면 그 외의 모든 것들을 혐오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늑대3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순식간에 증오로 바뀌는지 알면 놀라고 말걸. 단지 자신의 자존심을 조금 건드렸다는 이유로 말이야.


늑대2 인간들은 정말 이상한 족속이야. 누구보다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그런 부끄러운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해.


늑대3 어떻게 자기 자신을 남들보다 더 사랑할 수 있을까?


늑대2 어떻게 남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혐오할 수 있어?


늑대2/늑대3 우리는 이렇게 서로 똑같은데.


늑대2와 늑대3이 거울을 보듯이 서로 같은 동작을 하며 한 목소리로 소리 높여 짖는다.


늑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며) 쳇, 난 싫어. 같은 대사를 읊고 번갈아 대사를 나누는 짓 따위.


늑대2 아하, 넌 대사를 독차지 하려고 하는 구나.


늑대3 넌 사랑을 독차지 하려고 해.


늑대 그래, 자신을 사랑하는 게 뭐가 나빠?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 게 뭐가 나빠? 난 나를 사랑하고 싶어. 내가 특별하다고 믿고 싶어. 그럼 누군가가 먼저 나를 사랑해줘야만 해.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믿어줘야만 해. 서로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져야만 해. 그러려면 내 목을 잡아매야 하는 거야. 내 목을 힘껏 졸라야 하는 거야. 내 목을 높이 매달아야 하는 거야. 그거, 그걸로 말이야.


늑대2 그거? 그거라니?


늑대3 뭘 말하는 거야?


늑대 (망설이다가) 이름말이야.


늑대2/늑대3 이름?


늑대2 우리에게는 이미 이름이 있잖아. 늑대라는 이름이.


늑대3 맞아. 무슨 이름이 더 필요하지?


늑대 그건 내 이름이 아니잖아. 내 이름.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나의 이름. 축복도 저주도 혼자 독차지 할 수 있는 나의 이름. ‘하나’가 아닌 ‘그것’으로 기억될 수 있는 나의 이름. 난 그게 필요해.


늑대2 나의


늑대3 이름.


늑대 오직 인간만이 이름을 지어줄 수 있어. 이름이야 말로 인간들의 권능이니까.


늑대2 이름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되는데?


늑대3 대체 뭐가 달라지는데?


늑대 모든 게 달라지지.


늑대2/늑대3 모든 게?


늑대 내 이름이 온 세상에 새겨지는 거지.


늑대2/늑대3 온 세상에?


늑대 그건 마치 하늘에서 빛나는 별 같은 거야. 설사 아무도 쳐다보지 않더라도 별은 거기서 빛나고 있지.


늑대2/늑대3 빛나고 있다고?





(계속)



이전 01화[희곡] 개 가라사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