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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Nov 21. 2024

우리 둘만 잘 살면 되잖아요

세상이 그렇지가 않아요.

'그럼 삼겹살집에서 볼까요'

'네 감사해요. 이해해 주셔서.'


몇 번의 카톡을 주고받으며 정한 약속 장소다. 술이 들어가야 말이 술술 나온단다. 아는 친척의 회사에서 같이 근무하는, 나이가 세 살이 어린 청년이다.




'지금 나오는 노래 자주 불렀었는데. 여기 숨쉬는 이시간은 나를 어데로 데려갈까.'

'누나 이걸로 게임해봤어? 3! 4! 이 노래가 가사 처음 나오기 전에 전주가 되게 애매하거든 그거 타이밍 먼저 맞추기 게임하자. 핸드폰으로 노래 틀게'

'그래..... 쓰리! 포!'

'땡 누나 틀렸다. 이제 내가 할게.... 쓰리! 포! 아싸 이겼다. 누나 한 잔 마셔.'

'넌 젊어서 게임도 잘하나 보다.'


소개팅 첫 만남에서 술을 바로 마신 것도, 술게임을 하면서 벌주를 마시는 것도 너무 웃겼다. 술을 세 네 잔 마시더니 누나라고 부르겠다며 말도 놓는다.


'엔젤전설 진짜 대박이지'

'응 맞아 키이이익 하면서 달려오잖아 맨날'

'이거 아는 여자들 별로 없던데 누나는 대화가 잘 통한다.'

'나도 오랜만에 재밌네'


만화책, 가요, 영화 이야기까지 또래를 만나니 할 얘기가 쏟아져 나온다. 취향이 맞는게 이런 건가 싶다.


'근데 억양이 약간 특이하다. 누나 경상도 사람인가?'

'응 부산.'

'그럼 보수 쪽이겠네?'

'보수? 그건 왜?'

'20대 여자들 거의 대깨문이어서 좀 별로였었거든'

'대깨문이 뭐야?'

'대가리 깨져도 문재인. 문재인이 헛짓거리 해도 대깨문들은 문재인 좋아하잖아.'


대깨문.

처음 듣는 단어다. 그래서 이 친구는 갑자기 지금 문재인을 싫어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문재인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여자들을 혐오한다고 말한거다.


'우리 소개해준 파트장님이 대깨문이잖아. 전라도 살아서. 그래서 앞에서는 말 못 했지. 파트장님 대깨문이시네요 대깨문~'

'아 그분 전라도가 고향이시지. 근데 나도 문대통령 좋아하는데?'

'누나도 대깨문이었구나.'


아주 자연스럽다. 저 단어를 자꾸만 말하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머릿속에 자꾸 저 단어가 울려 퍼진다. 나쁜 단어는 기억하기도 좋고 부르기도 쉽다. 젠장.


'왜 문대통령이 싫은데?'

'집 값 올려놨잖아. 이명박 박근혜 때는 안 그랬어. 난 집을 살 수가 없어졌어.'


감옥에 간 대통령이라도 집값을 잡으면 좋은 대통령이라고 한다. 그래 청년들에게 집 값 중요하지. 나도 너도 집이 없으니. 젊은 청년, 아파트 값 때문에 분노했구나.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 광화문 자주 나가시거든.'

'무슨 말이야?'

'태극기 부대라고. 문재인 탄핵을 맨날 외치심'


용산에 땅이 많은 할아버지는 태극기부대의 선봉장 역할을 열심히 하고 계시다고 한다. 희한하고 신기한 분이다. 집 값이 올랐으면 할아버지도 더 부자가 됐을 텐데 탄핵을 외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복지는 무슨 복지야. 돈을 자꾸 퍼주니까 사람들이 노력을 안 하는 거야. 나 봐바 스카이 안 나왔어도 열심히 자격증 따고 노력해서 대기업 들어왔잖아. 내 친구들은 노력을 나만큼 안 해서 우리 회사 못 들어온 거고. 실업급여받고 돈이나 펑펑 쓰는 사람들 다 없어져야 해. 세금도 다 줄여야 하고. 자유주의 경쟁 사회가 진짜 좋은 사회야. 드라마에나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 나오지. 내 주변엔 없어. 그렇게 가난해서 대학 못 가고 밥 못 먹는 사람이 어딨어 대한민국에'


아 안돼.. 그 입을 멈춰주라. 여기서 롤스의 정의론을 강의하고 싶진 않다. 중학교 2학년만 되어도 아는 내용인데 도대체 졸업은 어떻게 한 것인가. 너는 살 집 없어서 걱정하면서 자유주의가 최고라고 예찬을 하면 그 논리적 모순은 어떡하니. 내가 뭐라고 대꾸할 때마다 네가 피시충이라고 하면 나는 할 말이 없단다.


'누나 나는 누나가 맘에 들어. 그냥 우리 둘이서만 잘 살면 되잖아. 다른 사람들 사는 꼴을 우리가 왜 걱정해'



머리 위에서 무한도전의 해골마크가 다섯 개가 돌아다닌다. 택시를 타고 집에 오면서 무슨 얘기를 듣고 어떤 말을 하고 온 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내 주변의 사람들과 지내다 보니 몰랐던 거다.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이 이 세상에 절반이 있음을.


술이 확 깬다. 깬다? 아 그 단어가 생각나서 불쾌하다.


정의론을 읽으면서.. 아니 읽기엔 어질어질하니 머리에 베고 자야겠다. 책장을 보니 집에 있는 모든 책이 다 피시하다. 피식 웃었다. 피시충이라니. 그게 내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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