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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Mar 22. 2017

20년 간의 '애국 페이'

건강한 남성만이 모든 걸 떠안는 지금의 시스템은 합당한가.


 해마다 민방위 훈련을 받는 날이면 꼭 화가 치민다. 오늘도 국가의 부름으로 구민회관 강당에 앉아 재난 구조법, 응급처치법, 테러와 전쟁에 대한 안보 강의를 듣는데, 왜 이런 건 병역의무가 있는 남자만 들어야 하는 걸까. 길가다가 사람이 쓰러지면 여자라도 도울 수 있는 것이고, 쓰나미나 지진이 일어나면 모두가 대피해야 하는 것 아닌가. 회사에 제출할 참석 확인증에 도장을 받고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데, 갑자기 깊은 빡침이 몰려왔다. 단지 날씨 좋은 날 민방위 교육에 온 것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 14년 동안 병역을 이행했지만 아직도 6년이나 더 남았다는 사실이 나를 또 분노케 했다. 이 분노는 엉뚱한 방향으로 새어 나왔다.


 “점심값이랑 교통비는 왜 안 주는데!”

 

 애국심과 분단 상황 등은 차치하고,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자에게만 지워지는 국방의 의무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사실 행복한 일은 아니다. 2년 간 감옥 같은 병영에 갇혀, 흡사 ‘관노(官奴)’와 같은 지위로 군 복무를 하고 나면, 8년 동안 예비군에 편입되어 정기적으로 훈련을 받고, 예비군이 종료되면 만 40세가 되는 해까지 평균 10년 동안 민방위를 수행해야 한다. 물론 예비군이나 민방위는 길어야 1년에 사나흘이기 때문에 현역으로 복무하던 시절에 비할 바 아니지만 어쨌거나 대한민국에서 사지 멀쩡한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스무 살부터 마흔 살까지 꼬박 20년 동안 병역의 의무를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100세 인생에서 군 복무 2년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겠다. 하지만 이 것은 인생의 황금기라 불리는 20대의 1/5에 해당하는 시간이며, 전역 당시 인생의 9%, 그리고 나의 경우 - 전역한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 이는 여전히 내 인생의 6%를 차지하고 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양의 시간이다.


 물론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남성들은 일상생활에서 이런 계산 따위를 해보지 않고 큰 불만 없이 살아간다. 주변에 '면제' 판정을 받은 친구들이 드물게 몇몇 있다 해도 우리 아버지, 나의 형과 동생, 그리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다 군대를 다녀왔고, 가끔 뉴스에서 접하는 고위층에서 병역 비리는 화는 나지만 ‘그들만의 리그’로 치부하며 인지 부조화를 극복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인의 희생을 전적으로 요구하는 군 복무지만 사회적으로는 ‘건강한 남자라면 당연히’ 다녀오는 것으로 그렇게 다들 치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치 우리 세대에서 포경수술은 '당연히' 다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처럼.

 

 이러한 군 복무로 인한 상실은 일상생활에서 ‘자위행위’로 나타나며 승화된다. 나도 그렇지만 남자 친구들끼리 모여 술 한잔 들어가면 으레 누구네 부대가 더 빡 셌는지 침을 튀기며 경쟁하기 마련인데, 다들 상대의 군생활이 ‘땡보’였다며 깎아내리는데 여념이 없다. 이렇게 지금은 먼 옛날의 추억이 되었지만, 사실 군대 가는 시점으로 시계를 돌려보면 그것은 도살장에 가는 것만큼이나 하기 싫은 일이었다. 마치 갓 전역한 복학생이 남자 신입생에게, ‘내가 너라면 자살한다.’라고 하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만큼 우리 대부분은, 하기 싫었던 국방의 의무를 어쩔 수 없이 행했던 것이다. 이는 나 자신을 강한 남자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 했던 것도 아니고, 애국심 따위의 소명감 같은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감사하게도 부모님께서 건강하게 낳아주셨을 뿐이고, 스무 살에 이를 때까지 무탈하게 살아왔으며, 안타깝게도 '국방의 의무'의 대열에서 이탈할만한 재력과 힘, 요령이 없었다는 편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이처럼 대다수의 서민들이 평등하게 착취당하는 이 시스템에서 적절한 보상과 처우가 없다는 것은 둘째 치고, 군 복무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인 불이익을 받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보통 대학생 시절 군대에 다녀오게 되면 나이보다 두세 살 연하의 여성들과 같이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 물론 군대를 가지 않으면 더 일찍 사회 진출이 가능하다.

 

 ‘신입사원 입사 연령’에 대해 암묵적인 상한선을 두고 있는 일선 기업들 중에 ‘군 면제 남성’에 대한 입사연령 기준을 별도로 두고 있는 곳은 거의 없다. 그들 역시 군 복무를 마친 남성들과 같은 기준을 적용받게 되고, 그 결과, 면제 판정을 받은 이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반수를 선택해 더 좋은 학교로 가거나, 여행, 해외 연수나 유학 등의 기회를 이용하여 남들보다 일찍 자신들의 가치를 올리는데 그 시간을 활용한다. 같은 또래의 대다수 남자들은 그들보다 조금 더 군 생활에 적합한 신체를 가졌다는 이유로 땅을 파고 훈련을 받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들이 국방부 시계 아래 흘린 피땀눈물은 (특히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 복무 했을 경우) 안타깝게도 사회에서 거의 인정받지 못한다.


 여성의 경우(이른 사회 진출을 선택한 군 면제 남성 포함), 동년배 군필 남성보다 2~3년 일찍 사회에 진출한다. 대학은 같은 학번으로 들어왔어도, 남자들이 복학할 즈음이면 여성들은 사회에 진출하게 되는데, 남자 동기들이 직장을 잡을 때쯤 회사에서 3~4년 차를 맞이하게 된다. 기업에서의 연봉은 매년 복리로 증가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직전 2~3년 간 직장에서 쌓은 커리어와 연봉 + 그리고 그간의 연봉 인상분을 가지고 동년배 남성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있다. 물론 향후 출산과 육아, 유리천장 등으로 인해 회사에 오래 남는 비율은 남성 쪽이 더 높긴 하지만, ‘군 복무’라는 100% 선택이 불가능한 의무와 어느 정도 가족의 조력과 시기 조절, 출산 등으로 인해 선택과 통제가 가능한 출산/육아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물론,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를 위해 출산, 육아에 대한 사회인식과 정부 정책은 군 복무 시스템과 더불어 개선해 나가야 할 것이다. (두 분야가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지 않고, 양립하여 개선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우리도 이렇게 고생하니 너희도 희생해야 해.’라는 논리는 사회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헌법 39조 1항. ‘모든 국민은 법률에 정하는 대로 국방의 의무를 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국민’이라는 점이다. 아직까지 우리의 법률이 건강한 남성에게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외의 다른 국민들까지 이 효력이 미치지 않을 뿐이며, 법률 개정이 이루어진다면 다른 방식으로 이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아래와 같이 제안한다.


 첫째, 현역이나 상근예비역,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 불가 판정을 받은 남성과 전체 여성 중,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국민은, 자신의 소득 수준에 맞추어 국방세를 납부한다.


 국방의 의무를 ‘몸과 시간으로 때우는 형태’로 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그 의무를 다할 수 있으며, 가장 간편하고 효율적인 방법은 세금을 내는 것이다. 군 면제를 받더라도 경제활동을 하는데 지장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는 군필 남성과의 형평성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부분이다. 단, 장님과 농아 등 장애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경제활동을 하더라도 세금을 면제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모아진 국방세는 장병들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하고, 국방 현대화, 전역 군인들의 재사회화에 쓰여야 할 것이다.

 

 둘째, 세금을 내기 싫으면, 젊은 시절에 대체 복무하는 대안도 열어 둔다.


 반드시 총을 들고 훈련을 받는 형태로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필요는 없다. 국방세를 내기 싫다면, 군 복무처럼 일시불로 해결할 방법은 열어주어야 공정하다. 일손이 달리는 장애 복지 시설이나 저소득층 아이들을 돌보는 일들처럼 양극화가 심해진 시대에 젊은 일손이 절실한 분야가 많다. 이 경우 국방의 의무가 ‘나라를 지키는’ 일에 한정되는 것이 아닌 ‘사회 전체에 기여하는’ 다양한 형태로 개념이 바뀔 수 있다. 논점에서는 벗어나지만 조금 더 확장하여 ‘양심적 병역 거부’로 전과자가 되는 젊은이들도 더 이상 양산하지 않을 수 있다. 정상 군 복무 기간보다 월등히 긴 5년 정도의 사회봉사를 부과함으로써 사회와 개인 모두에게 플러스가 되는 방향으로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단, 현역 판정을 받고 양심적 병역거부에 해당하지 않는 남성은 위 선택지 없이 여전히 군대에 가야 할 것이다.)




 문득, 정치를 가르치던 고2때 담임선생님이 수업 중에 하셨던 말이 기억난다.


 “공교육을 바로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교사 월급을 두 배로 올려주면 돼. 그러면 교사들의 직업적 자부심이 높아지고, 우수한 사람들이 교단에 몰려서 공교육의 질이 높아지지.”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들은 그만큼 무거운 책임을 갖고 사회적으로 더 큰 일을 하기 때문에 이에 합당한 높은 보수와 처우가 주어진다. 고위 공무원들이 그렇고, 의사, 변호사 등의 직업들이 그러하다. 기업의 고위 임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병사들에게는 어떤 자부심이 있는가. 나라를 지키는 의무만 있고 합당한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 우리의 징병제는 너무 철저하게 개인의 희생에 의존하고 있다. 최저시급에 한참 미달하는 월급을 주고, 2년 가까운 시간을 흡사 노예처럼 부려먹는다. 그리고 전역할 때 손에 쥐어지는 건 전투복 한 벌과 전역증,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8년간의 예비군과 10년의 민방위 의무뿐이다. 이런 상황이니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군인들을 우리는 '군바리'라 낮춰 부르고, 솔직히 능력만 되면 내 자식만이라도 '이 신성한 의무'에서 빼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하게 한다. ‘군 복무는 의무이자 특권’이라는 실체 없는 캐치프레이즈만 국민들에게 주입하지 말고 실질적으로 주어지는 혜택이 뒷받침 되어야 비로소 군 복무도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애국 페이'에 의존하지 말고 형평성에 맞게 제도 정비 좀 하자. 국방은 몇 십 년 잠깐 동안 달성하는 과업이 아닌 영속성을 가진 국가 사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 세대의 희생이 아닌, 평등의 원칙에 걸맞는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지금이라도 건강한 남성들이 모든 걸 떠안았던 이 시스템을 개선하고, 누구도 여기에 무임승차하는 일이 없도록, 그리하여 군 복무에서 소외된 몇몇 남성들과 여성들도 “나도 너 군 생활할 때 먹이고 입히는데 돈 깨나 보탰다”며 당당하게 밝힐 수 있기를 바라 본다. 술자리에서 군대 얘기한다고 투덜거리는 모습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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