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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Mar 06. 2017

골프를 치지 않기로 했다.

Carpe diem


 20년 전쯤, 중학교 다닐 때 어머니의 권유에 이끌려 플루트를 배운 적이 있었다. 뭐 나를 아는 지인들은 내가 다른 악기도 아니고 플루트를 부는 모습을 생각하며 피식 웃을 수는 있겠다(참고로 난 186cm의 키에 몸무게 106kg이다). 아무튼 그 당시 어머니는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악기를 사주시고 레슨비를 대셨다. 당시 학교 음악 실기 시험은 사교육이 없이는 불가능하기도 했고(음악 시간은 일주일에 많아야 두 시간이고, 음악 교사 한 명이 가르치는 학생은 수 백 명이었다),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교양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게 당시 어머니의 지론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국민학교 동창 둘과 함께 조를 짜서 플루트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나는 채 6개월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첫째는 기본기를 배우는데 들어가는 인고의 노력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클래식 자체가 흥미를 끄는 요인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아무 의미 없는 공기 소리를 삑삑 내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 돈으로 악기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렸다. 인간이 되길 바라며 마늘과 쑥을 먹던 호랑이가 참지 못하고 동굴을 뛰쳐나온 것처럼.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악기 하나 정도는 마스터해서 연주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때는 하기 싫은걸 더 이상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 나에게 더 중요했다. 그때 억지로 견디면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 도달했다면 지금쯤 내 삶은 조금 달라졌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고2 때, 클래시컬한 악기를 좀 다루는 게 좀 멋져 보이지 않을까 해서 다시 한번 음악 학원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열정이 아닌 '음악에 조예가 있어 보이는 로맨틱한 남자가 되고 싶다.'는 잘못된 시작점 때문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흥미를 얻지 못하고, 입시 준비를 핑계로 금세 다시 그만두었다.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내가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골프를 배워볼 것을 권하셨다. 젊어서 당구를 배우지 못한 게 평생 한이셨던 아버지는 남들이 다하는 건 적어도 중간은 하는 게 좋다며 어머니와 또 다른 지론을 펼치셨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언젠가 도움이 될 것이라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배우는 게 좋다고, 그렇게 '골프 필수 과목론'을 주창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몇 번 골프 연습장에도 따라가 보았다. 아버지의 힘찬 스윙과 함께 쉭 소리를 내며 산 골짜기로 빨려 들어가는 골프공을 보며 나도 잘 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폼도 잡히지 않았고,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공을 날려 보내는 것도 어려웠다. “레슨을 받으며 꾸준히 연습해야 해.”라며 그날 아버지는 언젠가 아들과 같이 필드에 나가고 싶다는 소망을 비치셨다.


 서른이 되면서 운 좋게 인도네시아로 파견 근무를 나가게 되었다. 만날 친구도, 경조사도, 특별히 야근할 일도 없는 그곳은 새로운 취미를 가져보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물가가 저렴했기 때문에 배우는 것도, 즐기는 것도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 많은 주재원들과 현지 사업가들이 대부분 골프로 인맥을 쌓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어느 정도 목적성을 갖고 퇴근 후나 휴일에 시간을 내어 레슨을 받아 보았다.


 확실히 골프는 돈과 시간을 투자한 만큼 느는 운동이었다. 공이 잘 맞고 멀리 날아갈 때는 나름 쾌감도 있었고 속도 뚫리는 기분이었다. 골프 인구에 비해 적은 골프장 수와 높은 그린 피 때문에 한국에서는 가기 쉽지 않은 필드도 몇 번 나가보았다. 하지만 남들이 말하는 만큼의 재미를 느끼진 못했는데, 꽤 많은 거리를 걸으며 목표된 지점에 공을 집어넣는 게 어떤 카타르시스를 주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고,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 종일 이 게임에 매달리며 공과 스틱에 집중력을 쏟는 것도 그다지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느 무더운 주말 아침, 그날도 일찍 일어나 연습장에 들러 공을 때리는데 갑자기 회의감이 몰려왔다.

 

 "나 지금 뭐하는 거지?"


 불현듯, 중학생 시절 흥미도 없으면서 감미로운 남자가 되어 보겠다고 플루트를 불며 스트레스를 받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이랑 어울려보자고 담배 냄새 찌든 당구장에 들락거리며 게임비를 물던 때나, 별로 좋아하지도 않던 스타크래프트를 잘해보려고 용쓰던 모습도 생각이 났다. 결국 나는 ‘남들에게 맞추기 위해’ 내가 즐겁지도 않은 것들을 힘겹게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30대 중반에 이른 지금, 많은 또래들이 골프에 입문하고 벌써부터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투자는 것을 본다. 물론 진심으로 즐기는 스포츠라면 골프는 나무랄 데 없이 좋은 운동이다. 잔디를 밟으며 오랜 시간 걸을 수 있고,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데다 플레이어 간의 친밀도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덤으로 40대나 50대가 되어 사업적으로 플러스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젠지 모를 미래의 효용을 위해 흥미도 없는 스포츠에 시간을 들여 레슨을 받고 돈을 들여 클럽을 바꾸고 회원권을 구입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친구들이 골프에 입문하지만 아직 골프가 너무 재밌다고 진심 즐기는 사람은 생각 외로 많이 보지 못했다.


 "요 과장은 그 나이에 골프도 안 배우고 뭐했나?"


 언젠가 직장 상사에게 이런 핀잔은 들을 수 있겠다. 하지만 지금의 내 판단이 틀리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플루트, 당구, 스타크래프트 등 도전했던 것 모두 나는 실패했지만 그것들을 잘 하지 못했다고 해서 결코 내 인생이 불행하거나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 말씀대로 ‘언젠가 도움이 되는’ 이 스포츠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해서 특정 그룹과의 깊은 공감대는 쌓지 못할지언정, 그것 하나만을 위해 지금의 스트레스와 노력, 시간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 골프를 포기함으로써 얻지 못하는 인맥이나 기회가 있다면, 다른 방법으로 만회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현명한 방법이라 믿는다. 만약 정말 그런 핀잔을 듣는다면,

 

 "네, 사실 배워보려 했는데 재미도, 재능도 없어서 안 치기로 했습니다."


 라고 차라리 당당히 얘기하련다. 내겐 토요일 새벽 4시에 졸린 눈을 비비며 필드로 떠날 일도, 비싼 그린 피를 지불할 일도, 불편한 사람들과 걸으며 영혼 없는 “나이샷~!”을 외칠 일도, 그리고 18홀을 돌고 저녁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 귀한 주말 하루를 고스란히 쏟아부을 일도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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