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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Jun 21. 2017

미생, 그리고 임원이란

구름 위를 기어오르는 자가 아닌 별을 볼 수 있는 거인


 회사생활을 몇 년 하다 보니, 내가 직접 겪지 않아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사람들을 관찰하며 나름 회사원으로 성공할만한 자질을 가진 사람들의 유형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다들 청운의 꿈을 안고 회사 생활을 시작하지만, 어린 연차에는 현실의 벽을 깨닫고 좌절하기도 하고, 조금 직급이 올라가게 되면 조직의 논리와 정치에 좌절하며 그렇게 순응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회사원’이 되어간다.


 여러 부류의 동료와 상사, 후배 직원들을 경험하면서, 이제 ‘아, 저 사람은 성공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고, 또 한 편으로는 그들의 모습에 비추어 나를 반성해보기도 한다. 특히 요 몇 년 동안 임원들의 의사 결정을 서포트하는 부서에 근무하면서, 다른 어느 때보다 높은 자리에 오른 회사원들을 관찰할 기회가 부쩍 늘었는데, 물론 모두가 탄탄한 실무 경험과 검증된 퍼포먼스로 그 자리까지 온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업을 대하는 태도 차이가 그들의 평판을 갈라놓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첫 직장에서 계속 회사생활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는 내가 몸 담은 조직의 특수한 경우일 수 있음을 일러둔다.)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오너 CEO가 경영하는 중견기업이다. 물론 전문경영인이 있는 회사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내가 다니는 회사는 오너의 결정과 디렉션이 어느 곳보다 큰 영향을 끼친다. 그 때문에 CEO의 눈 밖에 나는 일이 여러 번 반복되면, 연말 인사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떤 사람이 좋은 임원으로 평가받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 차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회사 생활에 임했느냐에 따라 갈린다고 생각한다. ‘나 개인’에게 큰 비중을 두고 자신의 영역을 끊임없이 확인하며 회사생활을 했는지, 아니면 ‘나’와 ‘회사’가 동반 성장을 하는 관점에서 회사생활을 해왔는지에 따라 임원들의 성향은 많이 갈리는 듯하다. 물론 이 둘 이외에 중간 스펙트럼이 얼마든 존재하지만, 극단적인 이 두 케이스만 살펴보려 한다.


Yes man, 실패가 두려운 순응자


 전자의 경우, ‘내가 이 분야에서 가장 전문가’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올랐다는 자부심 또한 큰데, 그리하여 CEO를 실망시키지 않아야 않고 반드시 인정받아 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또한 갖고 있다. 그래서 CEO의 말이라면 무조건 동의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실패와 모험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의 임원들은 방어적인 자세로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CEO의 스타일에 무조건 순응하며 ‘Yes man’의 길을 걷기 쉽다.


 쉽게, 그림을 그리는 일을 상상해 보자. 앞에 이젤을 놓고 스케치를 하는 선생님의 손동작을 그냥 무작정 따라 하는 것과 머릿속에 선생님이 무엇을 그릴 줄 알고 따라 하는 것의 결과는 분명 다르다. 전자는 테크니컬 한 손 눌림의 모방이기 때문에 얼추 비슷한 형태를 그려낼 수 있지만 선생님이 계획한 작품 의도가 그대로 표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후자의 경우 머리 속에 그려놓은 이미지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선생님의 그림과 다른 형상으로 확장될 가능성은 있을지언정, 작품이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히 살아있다.


 회사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CEO나 회사가 지향하는 큰 그림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임원들은 지엽적인 관점에서 지시를 해석하여 그릇된 방향으로 일을 실행할 여지가 있다. 예컨대, ‘특정 사업부 인력을 100명으로 유지하라.’라는 지시 뒤에는, '최근 변화된 사업 환경으로 디지털화가 가속화되고 있으니 신규 인력 영입 대신 내부 조직 개편을 통해 효율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라.’와 같은 기대치가 숨겨져 있음에도, 일단 CEO가 원하는 최종 결과물, 즉 조직 인원을 100명으로 유지하는 것에만 집착하여 과정과 의도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Yes맨의 잘못된 업무 지시로 직원들의 불만이 쌓이는 것은 물론이고 미봉책으로 끝난 결과물을 바라보는 CEO의 심기도 편할 리 없다.


 문제는 이러한 CEO의 부정적인 평가가 반복될 때이다. 자리보전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 임원은 더욱 CEO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집착하지만, 점점 실행과 결정에 확신이 없어 책임을 회피하고, 결정도 아랫사람에게 미루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우리 상무님은 CEO 말이라면 무조건 내리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해.”


 이런 불만이 직원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면, 한 번쯤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싸바싸바’를 하는 상사를 비꼬는 말이 아니라, 해당 임원이 CEO의 가이드라인을 큰 그림 내에서 해석하지 않고 모호하게 일을 내린다는 불만 신호다. 이러한 임원의 기질 때문에 소위 ‘삽질’을 반복하는 일이 현업에서 빈번히 발생하고, 결과적으로 조직의 평가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다.


'정반합'에 능숙한 신념 있는 자


 반면, 회사의 성장에 가치를 두며 성장해 온 임원들의 경우, ‘내 자리를 보전하는 것’만큼 회사의 발전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CEO의 의중을 해석하는 관점도 훨씬 넓고 유연하다. 내 조직의 KPI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전사 관점의 이익이 크다면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는 넓은 안목을 지니고 있으며, 최선에 대한 확고한 생각으로 CEO의 기대치를 조율하여 더 나은 해결책을 도출하는 ‘정반합(正反合)’ 과정에 능숙하다. 따라서 일을 시행하기 전에 예측되는 결과를 머릿속에 분명히 그려, 다소 리스크가 있더라도 자기가 책임을 지고 부하직원들이 편하게 일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CEO가 ‘사업부의 인력을 100명으로 유지하라.’라는 오더를 내린다면, 이 임원은 왜 100명으로 유지하라고 하는지 먼저 생각하고, 본인의 생각을 정리해본다. 그리고 새로운 업무 환경 기술 발달을 도입하라는 CEO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절대 인력과 시간 투입이 절실한 프로젝트가 몇 개 걸려 있어,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점진적으로 얼마 후에는 가능하다'는 식의 의견을 정리하여 CEO와 협의한다.




"봉록과 지위를 다 떨어진 신발처럼 여겨라"


 상관이 엄한 말로 나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 봉록과 지위를 보전하고자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리(奸吏)가 비방을 조작하여 나를 겁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 봉록과 지위를 보전하고자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재상이 부탁하여 나를 더럽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 봉록과 지위를 보전하고자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릇 봉록과 지위를 다 떨어진 신발처럼 여기지 않는 자는 하루도 수령의 지위에 앉아 있으면 안 된다. 흉년에 백성들의 조세를 면제해 줄 것을 요구하다가 상관이 들어주지 않으면 벼슬을 버리고 떠나가며, 상사(上司)가 요구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거절했으나 알아듣지 못하면 벼슬을 버리고 떠나가며, 나의 예모(禮貌)에 손상이 생기면 벼슬을 버리고 떠나간다. 상관이 언제나 나를 휙 날아가버릴 새처럼 생각한다면 내가 요구하는 것을 감히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나에게 무례함을 저지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정치하기가 물 흐르듯 쉬울 것이다. 하지만 만약 구슬을 품은 자가 힘센 사람을 만난 것처럼 조마조마하고 부들부들 떨며 오로지 구슬을 빼앗길까 두려워한다면, 역시 그 지위를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中


 이는 19세기 초에 다산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용이 관직에 나아간 제자에게 쓴 편지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물론 직장생활이 그가 언급한 것처럼 대쪽 같을 필요는 없다. 상사가 내 의견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사표를 던지고 떠나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아마 정약용이 제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 역시 부러질 듯이 꼿꼿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진실된 충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관료의 정도(正道)를 지키라는 뜻으로 사료된다.


 봉록과 지위 보전에만 신경 쓰면 결국 백성의 원성을 듣고 임금에게도 버림받으며, 반대로 애민(愛民)에 대한 올곧은 신념이 있으면 백성과 임금 모두에게 신임을 얻으리라는 메시지는 오늘날 회사생활에도 유효할 것이다.


 회사에서 중역이라는 자리는 다음과 같은 자질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좁게는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고, 넓게는 회사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여 큰 그림을 그리며, 아래로는 수 백명의 직원들의 능력을 극대화하여 그들의 조력을 얻고, 위로는 최고경영층의 니즈를 도모하되 건설적인 방향으로 견인하는 것. 이런 자리에, 부질없는 철옹성을 쌓으며 불안해하고, 스스로를 보전하고자 전전긍긍하는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다. 회사 발전에 대한 명확한 자기 철학과 꿈이 있고, 그 과정에서 빛을낼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미래가 두렵지 않은 그런 리더가 우리와 회사 모두에게 필요하다.


윤태호, <미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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