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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tergrapher Jun 07. 2017

미생, 그리고 밸런스

"애는 쓰는데 자연스럽고, 열정적인데 무리가 없어"


영일 씨가 제린 씨보다 뛰어난 게 하나 있는데, 그건 밸런스가 좋다는 거예요.


 3년 전 어느 늦은 밤, 야근을 하던 중에 팀장님이 담배 한 대 피우러 올라가자며 이렇게 말했다. 밸런스의 사전적인 의미는 '균형'인데,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 걸까. 아무튼 좋은 어감의 단어니까 좋은 뜻이겠지?

 그 날 이후, 나는 며칠간 회사 동기인 영일의 행동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잦은 과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불성실한 근태, 그리고 펑크 내는 일은 없지만 적당한 뺀질거림. 사실 그의 모습은 '밸런스'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와 그리 잘 어울리지는 않았다. 단 하나 특징이 있다면, 확실히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다. 특히 나이와 연차, 성별이 같았음에도 선배들은 나보다 그를 더 편하게 여겼고, 그는 그들에게 적당히 까불고 불평하며 시키는 일을 묵묵히 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의 모습에서 '밸런스'의 진짜 의미는 찾지 못했다.

 그리고 해를 넘겨,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드라마를 놓친 나는 만화로 이 작품을 감상하다가 어느 한 장면에서 무릎을 탁 쳤다.


애는 쓰는데 자연스럽고, 열정적인데 무리가 없어.

 팀장님이 말씀하신 밸런스가 이런 거라는 게 와 닿았다. 오 과장이 장그래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이 대사만큼 연차가 어린 부하직원을 칭찬하는 수식어는 없을 것이다.




 결국, 밸런스라는 말의 뜻은 이런 것이었다. 넘치지 않을 정도의 열정, 즉 너무 자신을 소진해서 번아웃 되지 않을 정도의 충분한 노력, 그래서 항상 여분의 에너지가 있어 주변 사람들이나 윗사람들이 보기에 탄력적으로 협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심리적, 체력적 여유. 사실 이런 태도는 상하좌우로 많은 사람들과 네트워킹하며 일을 해야 하는 회사원의 특성상 연차를 불문하고 이상적인 애티튜드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연차가 어린 친구들 중에서는 본인에게 주어진 업무를 과도하게 해석하여 업무는 업무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자신은 방전되는 케이스들이 있다. 학창 시절, 밤을 새워 코피를 흘려가며 좋은 학점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회사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아직 잘 모르는 경우인데, 이렇게 자신이 모든 걸 껴안으며 일하는 것은 좋은 성과가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 십상이다. "난 이 일에 몰두하고 있어요. 지금 너무 바쁘고 힘드니까 건들지 마세요." 라며 진지한 표정을 짓는 젊은이에게 편하게 일에 대해 상의할 수 있는 상사와 동료는 아무도 없다.

 그만큼 직장 생활에 있어서 융통성 있는 업무 관리와 사소한 것들은 놓아줄 줄 아는 대범함, 그리고 유머러스한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내가 관찰한 영일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밤늦게까지 같이 목표 작업을 하다가도 풀리지 않는 일에 끙끙대며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나와 달리, 그는 대충 중요한 것들만 처리하고 사소하게 꼬여있는 일들은 내일로 미뤄둔 채 술 한잔 한다며 사무실을 나오곤 했다. 물론 그 다음날 나보다 할 일은 더 많았지만, "아, 어제 좀 급한 일이 있어서 마무리를 못했습니다. 오늘 다 하겠습니다." 하며 조금 장난기 섞인 경상도 사투리로 자신 있게 말하는 그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이 전체적인 캐릭터가 그의 '밸런스'였던 셈이었다.




 "애는 쓰는데 자연스럽고, 열정적인데 무리가 없어"

 <미생> 이후로 주변의 많은 동료들을 살펴보았다. 애를 무진장 쓰고 무리한 열정을 보이는 사람들은 그 한 두해 고생했다고 좋은 고과를 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꾸준하게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들은 이런 밸런스가 좋은 사람들이었다. 소위 '밸런스'가 좋은 주변의 사람들은 이런 특징을 갖는 것 같아서 몇 자 적어보며 글을 마칠까 한다.




 첫째, 업무를 맥락 속에서 파악할 줄 안다.
 많은 수의 회사원들이 안타깝게도 자신의 업무에만 파묻혀 멀리 보지 못한다. 흔히 경험이 부족한 신입사원들이 저지르는 실수이기도 한데, 이 업무를 통해 달성하려는 바를 큰 그림에서 이해하지 못해 유관부서와의 협조를 가볍게 생각하고,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유형이다. 밸런스가 좋은 사람은 큰 그림 안에서 자신의 업무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업무 투입이 필요한지 이해하고 있고, 양보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가려내어 Big deal이 아닌 것이 목숨 걸지 않기 때문에 쓸데없는 사소한 일에 힘 빼지 않는다.

 둘째, 항상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는다.
 유머와 여유는 호감의 기본이다. 커피 한 잔 할 여유 없이 바빠 보이는 사람과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어떤 일에든 정색하며 진지하게 얘기하는 사람과는 업무 얘기를 나누기조차 부담스럽다. 더구나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박박 우겼는데, 만약 그게 틀린 것으로 드러났을 때, 그 민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사람이 유머와 여유를 가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밸런스가 좋은 사람은 자신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으므로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부드러운 자세가 몸에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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