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여는 이야기 둘

판교 테크노밸리 모퉁이 서점과 붙박이 아가씨

by 다래

레제로 테너가 부르는 감미로운 칸초네가 울려 퍼지며, 나는 눈을 뜹니다. 새하얀 벽지에서 반사된 희미한 빛이 시야로 스며들어옵니다. 어젯밤 켜두고 잠들어버린 스위트피 향초의 잔향도 은은하게 콧속을 자극합니다. 뇌가 깨어났습니다. 감각들이 하나 둘 돌아오고 있습니다. 또 새로운 하루의 시작입니다.


시계를 보니 6시. 벌써 다음 달이면 3월이 되지만 밤은 쉽사리 낮에 시간을 뺏기지 않습니다. 바깥은 아직 어둡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오늘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봅니다. 먼저 암막커튼을 열어 서점에 아침햇살이 들게 하자. 오늘 서점의 아침을 여는 음악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으로. 창고에 있는 책을 모두 꺼내 먼지를 털어주고 창고의 책장과 바닥을 청소하고, 그 다음엔 홀에 있는 책의 먼지를 떨어주고 책장과 바닥을 닦고... 그 다음엔 룽고 한 잔을 내려 마시고 그리고 오늘 읽을 책은... 자아, 인지력도 정상입니다.


거기까지 생각의 정리를 마치고 나는 씻으러 갑니다. 체온보다 조금 더 높은 온도의 온수가 온몸을 훑고 내려가 정수리부터 새끼발가락 끝까지 기분좋게 적십니다. 레몬향의 샴푸를 두 번 펌핑해서 손바닥 넓게 펴바른 뒤 손가락 끝으로 두피를 부드럽게 문지릅니다. 그 다음엔 자몽향의 바디워시를 세 번 펌핑해서 거품을 잔뜩 내어 몸 구석구석을 닦습니다. 상큼하고 달콤하고 이국적인 과일향이 물줄기를 타고 온몸에 새겨지듯 흐릅니다. 하루 중 두번째로 좋아하는 순간입니다.


양치는 또 어떤가요. 산뜻한 보라색 칫솔모 위에 자스민향이 나는 치약을 적당히 짜서 입 속에 넣고 부드럽게 손목을 움직입니다. 양치를 할 땐 규칙이 있습니다. 윗니 아랫니를 여섯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각 영역을 30초씩 닦아줍니다. 치아 하나하나 공들여 닦습니다. 특히 사랑니와 맞붙어 있는 아랫쪽 어금니들은 세심하게 살펴줘야 합니다. 3분간의 양치가 끝나면 양치컵에 든 물을 아홉 번 나누어 입에 머금고 가글을 합니다.


샤워와 양치를 마치고 나오니 노래는 이제 오페라 <라 보엠>의 1막 마지막 듀엣곡으로 넘어가 있습니다. 언제 들어도 낭만적인 사랑고백입니다.

몸과 머리의 물기를 제거하고, 커다란 타올로 몸을 한 번 더 닦아줍니다. 바디워시와 세트인 자몽향 바디로션도 발뒤꿈치까지 꼼꼼하게 발라줍니다. 긴 머리는 꽤 오랫동안 드라이기로 말려줍니다. 이건 약간 귀찮은 과정이지만, 제대로 말리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리면 찬 공기 속에 머리카락이 얼어붙게 되고, 머리카락은 단백질이기 때문에, 저온에 손상된 단백질은 복구되기 어렵습니다. 머릿결이 상한다는 말입니다.


옷장문을 열고 오늘 입을 옷을 고릅니다. 옅은 갈색 코르덴 롱스커트와 가슴께에 연녹색과 갈색 털실로 직조된 아가일 체크무늬가 있는 베이지색 니트가 좋을 것 같습니다. 따뜻하고 다정한 느낌입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며 나도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지-하고 결심하게 됩니다.

"카턴 씨! 노래는 그만. 오늘 날씨는 어떤가요?"

노래를 멈추고 인공지능 스피커를 깨워 하룻동안의 기온을 확인합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서점 안에서 보내고, 집에서 서점까지는 걸어서 고작 10분 거리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날 그날의 날씨는 신경쓰이게 마련입니다. 어쩌면 하늘을 살피고 기온을 챙기는 것은 수렵채집 시절부터 이어져 온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날씨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지금 분당구 삼평동의 체감기온은 영하 십 도, 오후 아홉시에는 영하 칠 도, 오후 열 두시에는..."

"고마워요, 카턴 씨. 이제 됐어요."

영하 10도라면 제법 추운 편이지만 영하 20도에 육박하던 근래보다는 기온이 높은 편입니다. 두꺼운 무스탕 코트는 젖혀두고 울과 캐시미어가 혼방된 하프코트를 꺼냅니다. 상의와 스커트에 맞춘 밝은 아이보리색입니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옅은 레몬향과 짙은 자몽향이 출렁입니다. 코트를 입고, 내용물이라고는 지갑 밖에 없는 가벼운 에코백을 어깨에 걸쳐 메고, 시트러스 향을 잔뜩 머금은 공기를 가르며 현관문을 열어젖힙니다. 차갑고도 신선한 겨울공기가 두 뺨과 귓가를 스치며 밀려 들어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집엔 아무도 없지만-카턴 씨는 아직 '배웅'을 학습하지 못했습니다- 큰 소리로 출발 인사를 해봅니다.


오늘도 나의 의식은 맑고 감각도 생생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10분 남짓한 거리를 걸으며 벌써 303번째의 아침의 풍경을 맞이합니다. 돌아오는 길은 303번째 밤의 풍경이겠지요. 예상대로 오늘은 그리 춥지 않습니다. 어쩐지 훈풍이 불어오는 것도 같아서, 헐벗은 가로수가 늘어선 풍경과는 이질적인 느낌까지 듭니다. 낯익은 풍경 이곳저곳에 인사를 건네다 보니 이 곳으로 이사와서 처음 서점으로 출근하던 작년 4월의 풍경이 떠오릅니다.


석이 아저씨 차에서 내려 처음 이 도시에 두 발을 내딛였을 때 나의 소감은 머릿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입 밖으로 바로 터져나왔습니다.

"와, 여기 정말... 유리책장으로 가득찬 도서관 같아요!"

정말 그랬습니다. 4차선 대로를 사이에 두고 일렬로 늘어선 통유리 건물들은 아주 잘 관리된 유리와 철판으로 만든 책장처럼 보였습니다. 세련된 취향을 가진 거인의 서재 같기도 했습니다. 건물의 꼭대기마다 저로서는 무슨 뜻인지 추측조차 할 수 없는 세 글자 내지 다섯 글자의 회사이름과 알록달록한 로고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내가 원래 살던 할머니의 집은 서울에서도 개발이 제한된 아주 오래된 동네에 있는 오래된 주택이어서, 그렇게 번쩍번쩍한 고층 건물들은 보기 어려웠습니다. 할머니의 집은 높은 지대에 있기도 해서, 시야를 낮춰 아래를 보면 굽이굽이 이어지는 동네 골목을 따라 이웃집의 지붕들이 유화의 붓터치처럼 다닥다닥 이어졌고, 고개를 들어 먼 데를 보면 도심의 마천루들이 회색 기둥처럼 솟아 있었습니다.

여긴 오직 올려다 봐야 할 풍경들 뿐이었습니다. 나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져 작아지는 약을 마신 앨리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커다란 대리석 토끼, 청동으로 만든 나무, 미래로 가는 것인지 과거로 가는 것인지 출발하면 시간여행을 하게 될 것 같은 레트로 컨셉의 오픈카... 이런 오브제들이 나를 더욱 앨리스로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잿빛이고 풀과 나무는 기묘한 보라색이던 그 '이상한 나라'와는 달리 이곳의 봄은 온통 깨질 듯이 파란 하늘색과 눈부신 연분홍 꽃나무로 가득했습니다. 유리책장 사이사이에 책갈피처럼 꽂혀 흩날리는 분홍색 꽃잎들이 이 도시에 활력을 더했습니다. 늘 조금씩은 지쳐 있는 표정의 이곳 사람들도 그때만큼은 제 나이대로의 생기를 되찾는 듯 했습니다. 아직 겨울이 끝나려면 한 달의 시간을 더 버텨야 하겠지만, 그리고 이 시간이 지나면 겨울의 모습은 그것대로 또 그리워지겠지만, 그래도 역시 이곳의 4월 풍경을 기다리다보니 자연스럽게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커다란 대리석 토끼, 청동으로 만든 나무, 미래로 가는 것인지 과거로 가는 것인지 출발하면 시간여행을 하게 될 것 같은 레트로 컨셉의 오픈카... 이런 것들이 맥락 없이 튀어나오는 거리가 이제는 나의 집, 나의 동네가 되었습니다.


추억을 되짚다 보니 어느 새 목적지에 다 왔습니다.

간판을 달지 않은 하얀 외벽 귀퉁이에 조그많게 bookshop25라고 쓰여진 곳.

유리와 철판의 책장들 사이에 낮게 웅크리고는 진짜 '종이책'들을 조용히 품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나의 일터에.





아침에 머릿속으로 그렸던 그대로 제일 먼저 암막 커튼을 젖힙니다. 아직 겨울 햇살은 도착 전입니다.

"미스터 말로!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을 틀어주세요!"

서점에 둔 인공지능 스피커는 '미스터 말로'라고 부릅니다. 서점에서는 가끔 음악을 듣는 것 외에는 미스터 말로를 찾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리틀 시스터의 안전을 걱정해서' 미스터 말로가 내 출근과 퇴근을 돕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외의 시간은 어디선가 자신의 케이스를 해결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곳 판교는 살인, 강도, 사기, 밀수 같은 범죄와는 거리가 천만광년쯤 떨어져 있으니까요.


사실 '미스터 말로'는 사장님이 나를 감시할 목적으로 고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매일 아침 내가 미스터 말로에게 말을 걸어서 그 날 아침을 여는 노래를 요청하면 그제서야 미스터 말로는 내가 정시에 출근했다고 사장님에게 보고를 하는 셈입니다. 두 사람이 그런 계약관계라는 걸 내가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어느 날 미스터 말로에게 굿모닝 인사를 한 번 빼먹었다가 그날 점심도 되기 전에 사장님이 서점으로 와서 내 출근시간을 추궁하는 것을 보고 바로 알아채게 되었습니다. 뭐, 프로페셔널한 미스터 말로의 일이니까, 그리고 나도 프로페셔널하게 출근을 해내야 하는 것에는 틀림이 없으니까, 내가 대충 맞춰주고 있는 형편입니다.


가슴 속부터 끓어오르게 하는 격정적인 현악 선율에 맞춰 청소준비를 시작합니다. 앞치마와 흰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씁니다. 내가 책을 더럽혀서도 안 되고, 책에 쌓인 먼지로 내가 오염되서도 안 됩니다. 창고 책장에 쌓인 책들을 한묶음씩 꺼내어 홀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에 차곡차곡 쌓습니다. 어제 팔린 책은 두 권. 모두 여자손님분들이었습니다. 오늘 다시 오신다면 밝게 웃으며 안부를 물어야겠죠. 오늘 팔아야 할 책을 정해야 합니다. 어제 팔린 책은 두 권. 그러니까 창고에는 아직 팔아야 할 책이 천팔백열 두 권 남았습니다. 이걸 모두 꺼냈다가 청소 후 다시 돌려두는 일은, 어마무시하게 들리지만 조금씩 천천히 계속 하다 보면 삼십분 남짓이면 끝나는 일입니다. 매일 아침 운동처럼 반복하는 일이다보니 제게도 '생활근육'이라는 것이 생겨서, 올해 여름에 민소매 원피스를 입었을 때엔 단골손님 중 한 분으로부터 '무슨 운동을 했길래 그렇게 상완삼두근을 예쁘게 다듬으셨냐'고 질문인지 칭찬인지 모를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걷거나 뛸 일도 별로 없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서 책을 읽으며 보내기 때문에 매일 아침 이 루틴은 듣기엔 버거워 보여도 정작 내게는 체력을 기르는 데 더 없이 좋은 운동이 됩니다.


텅 빈 원목책장은 먼저 타조털 총채로 먼지를 털어주고 흰 면 헝겊으로 구석구석 꼼꼼히 닦아줍니다. 한 개의 책장을 다 닦으면 그곳에 원래 있던 책들을 다시 차곡차곡 넣어줍니다. 이렇게 서른 아홉 개의 책장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부드러운 총채로 창고에 둘 책들의 먼지를 털어주고 한 권 한 권 제자리에 넣으며 어디 상한 곳은 없는지 세심하게 살피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천팔백열 두 권의 책이 남은 기념으로, 미스터 말로에게 차이코프스키 1812서곡을 틀어달라고 요청합니다. 힘차게 이어지는 관악기와 심벌즈 소리에 나도 에너지가 차오릅니다.


창고 청소가 끝나면 그 다음은 홀을 치울 차례입니다. 먼저 홀의 오른쪽 벽 선반에 놓인 책들을 다 끄집어 내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마찬가지로 벽선반의 먼지를 떨고 면 헝겊으로 닦습니다. 이틀에 한 번 선반에 둘 책과 창고 속 책을 교체해놓기 때문에 아까 창고에서 책을 꺼낼 때 이틀 동안 전시되었던 책과 바꿔놓을 책들을 따로 골라놓았습니다. 오늘 전면에 나설 책은 헤밍웨이 선집-<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와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존 스타인벡 <에덴의 동쪽> <분노의 포도>입니다.

헤밍웨이는 너무 고전작가여서 그런지 꺼내놓아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나는 어쩐지 그의 책들에 자꾸 손이 갑니다.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어서 책장만 휘리릭 넘기곤 하는데, 특히 <노인과 바다> 부록인 작가의 생애에 실린 19살 헤밍웨이의 사진은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습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책날개에 찍힌 노년의 헤밍웨이-유서프 카쉬의 그 유명한 흑백사진이 맞습니다-사진도 한참을 들여다 봅니다. 헤밍웨이의 책들은, 내게는 위험하기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도입만 간신히 읽다가 아주 잠깐 로버트를 만난 게 전부입니다. 아직까지 작가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헤밍웨이라면, 그것이 19세의 모습이든 60세의 모습이든 꼭 한 번 보고 싶습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한 난봉꾼이라고는 하지만, 미남이니까요!


아, 그러고보니 이 얘기를 단골손님 중 한 분께 했더니 그 분이 그 후로는 서점을 잘 들르지 않고 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너무 대놓고 미남을 밝힌 것일까 싶기도 하고, 그분은 헤밍웨이를 잘 모르시는데-자기도 '그 사람이 쓴' <전쟁과 평화>는 읽어봤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무 혼자 떠들어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분이 아주 맛있는 일본 가정식을 사주셨는데, 어쩐지 죄송해져서 제대로 사과를 드려야지 마음을 먹었지만 서점에 오질 않으시니 사과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오늘은 손님이 와서 먼저 알은 체 하기 전까지 헤밍웨이 얘기는 꺼내지 말아야겠습니다. 대신 퇴근하기 전에는 19세의 헤밍웨이와 굿나잇 인사 정도는 할 수 있겠죠.


청소를 다 마치고 나니 어느 새 홀 중앙까지 아침햇살이 늘어져 들어옵니다. 시계를 보니 9시. 'closed'로 두었던 팻말을 'open'으로 뒤집어놓고 서점 유리문의 시건장치를 해제합니다. 그리고 에스프레소 머신 위에 두었던 머그컵을 헹궈 룽고를 한 잔 뽑습니다. 요란스러운 압출 소리와 함께 석이 아저씨 특제 스페셜 블렌딩의 원두향이 은은하게 퍼집니다. 카턴 씨가 미스터 말로에게 언질이라도 준 모양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 홀에는 나의 잠을 깨웠던 레제로 테너의 로맨틱한 칸초네가 다시 플레이되고 있습니다.


그 때, 종소리가 울리며 서점의 유리문이 열립니다. 어제 책을 사갔던 두 사람의 손님 중 한 분입니다.

자아, 이제 내가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순간입니다.

준비했던 인사를 해야겠네요.


"어서오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별 일 없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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