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는 이야기 하나

낙원에서 추방당한, 객관식에 익숙한 청년

by 다래

딱히 짐이랄 것도 없었다. 이사라고 하기에도 뭣했다.

한 평짜리 고시원을 다 쓸어 담고도 이불 한 채, 옷가지 가방 하나, 책 한 박스, 기타 잡다한 것들이 든 백팩 하나가 전부였다. 진정한 미니멀리스트의 삶이네. 용달차를 부를 필요도 없어 모두 택배로 접수하고 고시원을 나섰다.

“지우, 가냐?”

1층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던 3층 형들이 알은체를 했다.

“한 대 필래?”

총무 형이 담배를 하나 건넸다. 나는 대꾸 없이 머리만 꾸벅하고 시내를 향해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두세 걸음 걷다 문득 돌아서 바라본 6층짜리 고시원 건물은 검은 이끼와 바싹 마른 담쟁이넝쿨에 뒤덮인 썩은 고목 같아 보였다. 지상은 6층뿐이지만 지하는 30층으로 이어진 던전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고 회색 연기를 내뿜으며 그 앞을 서성이는 장수생들은 저주에 걸려 죽을 때까지 그 던전 속 미로를 헤매야 하는 골렘들인 셈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내 미래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진짜 내 미래의 모습일지도. 고개를 들어 내가 지내던 5층을 올려다본다. 내 방은 창문이 없는 안쪽 방이어서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돌아서서, 시내를 향해 난 길을 내려다본다. 이 길을 지나 저 골목을 벗어나면 거기엔 또 다른 내 미래가 있는 걸까? 알 수 없다. 다만, 저 몰락한 던전에 파묻혀 용사의 검에 한 칼에 박살날 골렘이 되든지, 아니면 새로운 세계에 내던져져 어리바리하게 굴다가 무언가에 뜯어 먹히든지 할 것 같은 암담한 생각뿐이다.


12월 말인데 공기의 온도가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부는데도 봄바람 같이 훈훈했다. 그러고 보니 날씨가 이래서 저 양반들이 얇은 깔깔이나 솔기 닳은 르브론 제임스 저지 차림이구나 싶었다.


아니면 진짜 화석이 되었거나.




면접을 보러 가려면 고속버스 터미널 환승 정류장에서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했다. 초록색 버스가 끊임없이 와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내려놓고 가면 이어서 파란색 버스가 또 그만큼의 사람들을 토해놓았다. 내리는 사람마다 크고 작은 여행가방을 들고 있었고, 혼자든 여럿이든 하나 같이 들뜬 표정이었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12월의 마지막 주 금요일이다. 올해의 마지막 주말의 시작이자, 낯선 곳 또는 익숙한 곳에서 새해를 맞이하기 좋은 때였다. 어떤 사람들은 연휴를 맞아 새해를 가족들과 함께 보내기 위해 설레는 발걸음을 하고 있을 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새 날 새로 뜨는 해를 보기 위해 동쪽으로 여행을 떠난 것일 테다.

나 역시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몇 시간씩 고속버스를 타고 산길을 달려야 하는 건 아니고 고작 빨간색 광역버스를 타고 한 시간 남짓한 거리를 가는 길이지만, 그래도 고향으로 가는 길은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일주일 전, 아버지가 내가 사는 고시원으로 찾아왔다. 나는 그때 고시원에 없었고, 아버지는 본인의 카드 결제 내역을 바탕으로 내가 다니는 독서실과 학원까지 나를 찾으러 왔었다. 물론, 거기에도 나는 없었다.

그 시간 나는 고시원 근처 PC방에서 같은 층 형들과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서바이벌 전쟁 중이었다. 그리고 긴 매복 끝에 적진에 돌격하는 나를, 현실의 아버지가 찾아냈다. 적진을 헤집고 다니면서 총질에 미친 내가 아버지의 급습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아버지는 내게 헤드락을 걸어 그대로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혼미해지는 시야 너머로 나는 모니터 속 내 캐릭터가 헤드샷을 당해 죽는 것을 지켜보며 아버지에게 끌려나갔다. 형들조차 게임에서 손을 놓고 그런 나를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길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말로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PC방의 2층 계단에서 나를 발로 걷어 차 굴려 떨어뜨리고 아버지는 딱 한 마디를 던진 채 사라졌다.


“이제부턴 니가 알아서 해. 망할 놈.”




그런 연유로 올해 시험은 치르겠지만,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이 되었고, 나는 더 이상 노량진의 풍요로운 혜택 속에서 공부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풍요로운 혜택 속에서 '공부'를 했던 날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나를 경찰로 만들고 싶은 것은 경찰 아버지의 욕심’이라는 반항도 해보았다. 3단봉에 맞으면 살가죽이 찢기는 것처럼 고통스럽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나중에 경찰이 되면 저걸로 사람을 패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모와 고모부가 아버지에게 사정을 해서 집에서 지낼 수는 있게 되었다. 설득의 근거가 ‘저런 놈은 곁에 두고 감시해야 된다'인 것이 좀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덕분에 길바닥에서 먹고 자는 일은 면했다.

대신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한 달에 40만 원을 아버지에게 줘야 했고, 밥과 김치 외 부엌에 있는 식재료에는 일절 손을 댈 수 없었다. 월세와 교재비, 이런저런 자격증 수험비, 학원에는 갈 수 없으니 인강비라도 벌기 위해 나는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패스트푸드점이나 식당은 최저시급 수준을 겨우 웃도는 수준이었고, 그나마도 나는 나이가 많은 편이라 면접을 보러 오라는 문자도 없었다. 개중 편의점이 만만하고 내 시간 쓰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집 근처에서는 사람을 구하는 곳이 없었다. 일주일 안에 일자리가 정해지지 않으면 그 길로 쫓아내겠다는 아버지의 윽박에 막노동이라도 해야 하나, 아직 계단에서 구른 근육통이 다 안 나았는데... 고민하던 찰나, 톡이 하나 왔다.


- 야 모지리, 잘 지내냐?

발신자는 ‘털형'. 설명하자면 복잡한 사이인데 그냥 술친구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무슨 일이지 이 형이? 백 년만에?

- 깡죠한테 들었는데 아버지한테 머리채 잡혀갔다며?

깡죠는 고시원 같은 층에서 나랑 같이 놀던 형이다. 스물여덟 살 먹은 장수생인데, 아버지한테 머리채를 잡힌 건 아니고 헤드락을 당한 거지만 아무튼, 그 날에도 나랑 같이 PC방에 있었다. 이미 초장에 죽어서 옆에서 입만 털고 있었다. 깡죠 형이랑 털형이 아는 사이어서 셋이서 자주 술을 마셨다. 우리 중 유일하게 고정수입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술 마실 때마다 항상 털형을 불렀다. 그리고 털형은 항상 왔다. 아무튼, 털형 말은 깡죠 형이 ‘존나 재밌는 일이 있었다'며 내 얘기를 했다고 했다.

- 네네, 그렇게 됐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많은 ‘ㅋㅋㅋ'가 이어졌다.

- 형, 웃을 거면 저 일자리 좀 소개해주고 웃으시죠.

‘개정색' 이모티콘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통화 화면이 떴다. 털형이었다. 하아, 또 얼마나 적나라하게 수치를 줄 것인가. 나는 체념했다.

“어, 일단, 고생이 많았고. 다른 게 아니라 너 알바 자리 찾는다고 해서 하나 추천해주려고. 우리 회사에서 백과사전 서비스하는 거 알지?”

“아, 그런 게 있었어요? 저는 지식사전 밖에 모르는데요.”

“어, 끊자.”

“아닙니다, 백과사전 하면 형네 회사 백과사전이 짱이죠. 요즘 누가 지식사전 쓰나요. 충성충성충성.”

“아무튼, 일은 쉽고. 페이는 괜찮고. 한국사 자격증이랑 한국어 능력시험, 한자급수 자격증 있으면 우대인데 너 세 개 다 있지? 내가 잘 얘기해놨으니까 내일 와서 면접만 보면 돼.”

나는 형이 있는 곳을 향해 세 번 절을 하겠다고 말했다. 털형은 꺼지라고 했다. 자격증은… 한국사도 3급, 한국어도 3급, 한자도 3급이지만 일단 있으면 된다고 했으니 자격증 사본을 찾아 서류철에 정리해 넣었다. 운전면허는 대형 1종을 자랑하지만, IT회사에서 이건 별로 쓸모가 없겠지. 이력서도 필요하려나 싶어 대학교 4학년 때 써놓은 ‘이력서_최종_최종_final’ 파일을 찾아 업데이트를 시도했는데, 2년 사이 내 경력이라고는 고시원과 경찰학원을 오간 것뿐이었다.


기운이 빠져서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 드러누웠다. 아버지에게 목덜미를 잡혀 끌려가던 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계단에서 구르다 모서리에 찧은 어깨와 무릎이 욱신거렸다. 언젠가 이 설욕을 되갚을 테다! 아니, 되갚을 날이 있겠지? 과연… 되갚을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만큼 마음은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눈을 감고 ‘내일'을 떠올려보았다.


깜깜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일어나면 나는 아버지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되어 있기를 바랐다.


꿈도 꾸지 못 하고 깊은 잠을 잤다. 일어나 보니, 한 평짜리 고시원 구석에는 사과 박스 하나와 이불 한 채, 백팩이 놓여 있고, 침대 위에는 이불도 없이 잠들었다 깨어난 모지리 하나가 있었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난 광역버스는 대도시의 입구로 들어섰다. 사람이 살 곳과 일할 곳, 먹고 마시고 즐길 곳과 녹지가 푸르른 쉴 곳이 네모 반듯한 공간마다 구분되어 만들어진 계획도시. 나의 고향. 정확히는 충청도가 고향인 아버지가 상경해서 터를 잡은 아버지의 제2의 고향인 셈이지만. 지금은 천당 아래 동네라고 30평대 아파트의 매매가가 두 자릿수 억대를 찍는 부촌의 이미지가 생겼지만, 일단 우리 집은 해당 사항이 없거니와, 여전히 내게는 깨끗하고 조용하고 안전한 '우리 동네'일 뿐이다.


그렇지만 판교의 풍경은 조금 낯설다. 아니, 정확히는 익숙하지만 생소하다. 산이 있던 자리, 들판이 있었던 자리, 길게 뻗어가는 탄천은 언제 봐도 눈에 익은 배경이다. 하지만,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철골 콘크리트 구조에 유리창으로 뒤덮인 10층대의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쭉쭉 뻗은 4차선을 따라 좌우로 빼곡하게 들어선 풍경은 생경하다. '테크노밸리'라는 이름값을 할 요량으로 커다란 서버들을 보관하고 있는 거대한 서버관리실 같은 느낌이었다. 신촌과 노량진의 구석진 뒷골목과 낡고 낮은 건물들에 익숙한 나로서는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높고 화려한 건물들의 퍼레이드가 비현실적이었다. 어디 외국 건축가의 포트폴리오에서나 볼 법한 곡선과 능선이 어우러진 신축 유리건물 앞에 우뚝 선 금속 재질의 나무 조형물들이 비현실성을 더했다.


그래, 비현실.

마음 한 켠에서 이 풍경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다른 이유는, 탄천을 가로지르며 테크노밸리를 향해 뻗은 다리를 따라 꾸역꾸역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왠만한 MMORPG에서 새 사냥터가 열리면 볼 수 있는 풍경인데, 마침 그 다리 끝에는 또 예의 그 유리로 뒤덮인 탑들이 우뚝 솟아 있었기에, 정말 레이드를 가는 여러 무리의 파티원들처럼 보였다. '삶'이라는 갑옷을 두르고, 저마다의 무기를 들고서. 오늘 저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집에서 부활해 HP와 MP를 회복 후 다음 날 다시 도전하러 와야 하는, 깨기 전에는 절대 끝낼 수 없는 퀘스트를 수행하는. 이렇게 자조해봤자 그게 이제 곧 내 처지인걸. 퀘스트를 깨면 '오늘은 치킨이닭'을 외치는 것마저 게임 같을 것 같아서 더 씁쓸해졌다.


이런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차분한 ‘솔'톤의 여자 목소리가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이라고 알려줬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회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횡단보도에는 이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행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10시쯤 되었는데 이제야 출근을 하는 사람들인 듯했다. 몇몇은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직장인'의 모습으로, 잘 다려진 양복과 코트를 입고 정장구두를 신고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내 옆에 선 남자의 날렵한 슈트핏과 캐시미어가 섞인 듯한 모직코트, 코트 색에 맞춘 목도리와 세련된 갈색 구두, 세미투블럭 컷으로 다듬어진 헤어스타일에서 ‘남자의 멋'이라는 것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코트자락에 감추어져 있지만 분명 지금 복장에 잘 어울릴 듯한 명품시계를 차고 있을 것 같았다. 팽팽하게 당겨 낀 검은색 가죽장갑조차 고급스러워 보였다. 저런 모습의 직장인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바지에 롱 패딩을 입은, 흡사 대학생과도 같은 차림이었다. 털형도 저 부류일 것 같기는 한데, 털형은 최신 유행하는 롱 패딩 대신 라벨에 개성공단에서 만들어졌다고 쓰여 있는, 도대체 연식을 알 수 없는 중저가 브랜드의 패딩점퍼만 주야장천 입고 다녔다.

어쨌든 소수의 정장파와 다수의 캐주얼파로 대동소이한 무리 속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일단 등짝 한가운데까지 굽슬굽슬하게 늘어뜨려진 머리카락이 온통 바다색이었다. 탈색과 염색을 몇 번 반복해야 저런 색을 낼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로 게임 캐릭터와 같은 머리 색깔이었는데, 3D 렌더링 된 것과는 다르게 머릿결이 심하게 상해 있어서 푸른색 나일론 실 같아 보이기도 했다. 살집이 있는 체구는 발목까지 오는 검은색 무스탕 코트로 감싸져 있어서 더 뚱뚱해 보였고, 신발은 검은 가죽워커였는데 겉면을 둘러 빽빽하게 징이 박혀 있어서 벗어 들면 그대로 충분히 훌륭한 무기가 될 것 같았다. 철 지난 고스족 같기도 하고, 길을 잘못 든 코스프레족 같기도 했다. 너무 물끄러미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여자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쏘아보았다. 역시나 눈두덩은 시커멓고 입술색은 보랏빛이었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한국의 어느 오피스타운인지 일본 시부야 한복판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저 여자 좀 튀지? 그래도 사람을 그렇게 빤히 보면 무례한 거야.”

속삭이는 말에 뒤를 돌아보니 예의 그 개성공단 점퍼를 입은 털형이었다. 털형도 출근길이었나 보다.

“번거롭게 전화하고 자시고 할 거 없이 여기서 만났으니 데리고 바로 올라가면 되겠네.”

보행신호가 켜지고 사람들이 우르르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댄디남도, 고스녀도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형, 지각 아니에요?”

시계를 보니 10시 10분이었다. 이 회사의 출근시간은 10시까지이고 면접시간은 10시 30분이다.

“연말 마지막 영업일에 출근하는 것만 해도 충분히 훌륭한 인재다. 그리고 우리 회사엔 지각 같은 거 없어. 일당으로 치는 너 같은 어시스턴트 말고는.”

무슨 이런 근본 없는 소리를 하나 싶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채용이 낙점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너 면접 보는 사람은 나랑 친한 기획자인데 별로 까탈스러운 성격은 아니니까 묻는 말에 대답 잘 하면 별 탈 없이 1월 2일부터 출근하라고 할 거야. 거기도 당장 사람이 급하니까.”

면접실이 있는 접객층에 내려서 사원증을 태깅해 문을 열어주며 털형이 말했다. 나는 다시 한번 고맙다고, 잘 되면 첫 월급으로 곱창을 쏘겠다고 했다. 털형은 곱창 받고 양꼬치 추가!라고 외치고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형이 가고, 접객층을 둘러보니 새삼 이 회사의 규모가 느껴졌다. 듣자 하니 이 건물의 절반 이상을 이 회사가 쓴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꾸며진 대표 캐릭터의 대형 피규어가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다음엔 탁 트인 광정 아래 삼삼오오 모여서 자유로운 분위기로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떠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털형이 말했던 ‘지각은 없다'는 말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감탄은 그만두고, 나는 인포데스크에 가서 오늘 면접 보러 온 사람이라고, 백과팀 이정은 과장님을 찾는다고 말했다. 3분쯤 지나자 광정이 있는 쪽 내부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모지우 씨?”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면접시간을 잡으며 '그 날은 오후 근무를 하지 않아 인사팀에 빠르게 접수시키려면 아침 일찍 면접을 봐야 하니 양해해달라'라고 말했던 또랑또랑한 목소리나, 그 목소리를 듣고 떠올렸던 프로페셔널한 커리어우먼의 모습은 내가 상상한 그대로였는데 한 가지 의외였던 것은, 실제로 본 이정은 과장은 임산부였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지 않게 조심하며 내려오는 모습이 조금 위태로워 보여서 나도 모르게 뛰어 올라가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셈이 되어버렸다.

“이럴 필요는 없는데, 친절하시네요.”

“안녕하세요, 이정은 과장님.”

내가 인사하자 이정은 과장이 자기 사원증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여기서는 영어 이름을 써요. 저는 샬럿이에요.”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앳된 얼굴의 이정은 과장 얼굴 위로 charlotte.lee라고 적혀 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샤.. 샬럿?”

온라인게임에서 캐릭터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 같기도 하고, 인터넷 동호회 정모에 처음 나와 인사하는 것 같기도 해서 민망해하는 나와는 달리 샬럿은 아주 크게,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신기하게도 두 눈이 반달처럼 180도의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음료 뭐 마실래요? 여기는 딸기라떼가 아주 맛있어요.”




털형의 말대로 면접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인상 깊게 읽은 책이라던가 한국사나 표준어, 맞춤법에 대한 이해, 학교에선 뭘 공부했는지, 집은 너무 멀지 않은지 등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설명도 약간 들었다. 무슨 얘기인지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샬럿은 ‘어차피 월요일부터 오제이티 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라고 말해줬다. 그런데 오제이티는 또 뭐지?

“사람이 급했는데 티거가 이렇게 딱 맞는 인재를 추천해줘서 다행이에요. 1월 2일부터 출근할 수 있죠?”

“티거가 누구인가요? 털 혀... 아니, 범형태 형이 여기서 티거예요?”

“네. 여기서는 티거라고 불러요.”

보통 별명이라는 것은 대단히 1차원적이고 직관적인 경우가 많아서 털형은, 별명에서 유추할 수 있듯 머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털이 많다. 벌써부터 M자 탈모 기미가 보이는 깡죠 형은 틈만 나면 털형의 털 유전자를 자기 유전자로 ‘이식'하겠다는 소리를 해댔다. 그런 주제에 ‘티거'라는 귀여운 이름을 쓰고 있다니. 양심도 없어라.

내가 딴생각을 하는 사이 샬럿은 노트북을 닫으며, 마지막 질문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사뭇 긴장했다. 아마도 보통 아르바이트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 ‘얼마나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리라. 특히, 내 출신이 그러하니 더욱.

“지금 지우 씨에게 맡기려는 업무는 세 달 정도 걸리는 일이기는 한데, 그 이후로도 일은 계속 있어서… 아르바이트 같은 거 해도 괜찮은 거예요? 일에 시간을 뺏기는 거 아니에요? 우리 입장에서는 1년 정도는 계속 같이 일해줬음 싶지만, 그게 우리 욕심이라면 언제든 말해줘요.”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답을 이미 정해두었다.

“잠깐 설명을 들은 것이지만 일도 많이 어렵거나 양이 많을 것 같지는 않아서 특별히 일상이 방해받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조건도 괜찮고요. 공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길이 제 길이 맞는지 고민하는 중이라서요. 일단은 돈을 벌어야 하는 사정이 있어서, 일을 하면서 제 미래를 조금 더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아버지에게도 못한 말을, 그 누구에게도 못 한 말을 여기서 털어놓으니 조금 후련하기도 했다. 상대가 딱히 거절할 구실도 없었다.

“그렇구나… 그럼 진짜 마지막 질문 하나 해도 돼요? 이건 면접과 관련은 없어요.”

샬럿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네, 물어보십시오.”

“지우 씨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건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다. 대학 입학 면접도 아니고, 소개팅도 아니고 대뜸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니.

“어… 그게… 예전에 경찰이 되고 싶긴 했는데…

“아니 아니, 경찰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지 ‘어떤’ 사람은 아니잖아요. 경찰 중에서도 정의롭지만 고지식한 경찰, 융통성 있지만 조금 비겁한 경찰,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찰, 시민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경찰 등등 다양한 경찰들이 있을 텐데… 제가 말하는 ‘어떤'은 이런 거예요.”

이 질문에는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목구멍이 바싹 타서 앞에 놓인 딸기 라떼를 크게 한 모금 빨아 당겼지만, 라떼는 이미 바닥을 보여 스트로에선 크르릉 소리만 날 뿐이었다.

나는 멋지게 슈트를 차려입은 회사원이 되는 것도 괜찮은 것 같고, 아버지처럼 경찰공무원으로 평생을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고, 고모부나 털형처럼 기술을 가진 엔지니어가 되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그런데 이건 모두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것뿐. 내가 정말 되고 싶은 삶의 모습일까?

어젯밤 나는 잠들기 전 생각했다. 이대로 잠들었다 깨어나면 아버지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되어 있기를 바란다고. 바꾸어 말하면 내가 되고 싶은 건...


‘지금 이 상태가 아니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는 나'


즉, 지금은 ‘최악' ‘최저점'의 상태라는 거잖아?

이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대답인가.

아무리 단기 아르바이트의 자리라고 해도, 이런 상태라면 나를 뽑을 이유 따위 없을 것이다.

“미안해요. 제가 초면에 너무 과한 질문을 했죠? 제가 좀 그래요, 좀 훅 들어가요. 불편하게 했다면 사과할게요. 말씀드렸 듯이 채용이랑은 관계없어요.”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말이 없자 샬럿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 당장은 ‘다정하고 현명한 엄마'가 되고 싶어요.”

나는 샬럿의 불룩 나온 아랫배를 보았다. 보드라워 보이는 하얀 손가락이 초록색 니트 위에 가지런히 얹혔다.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는 동그란 진주가 얹힌 금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엄마가 된다는 건 이렇게 다른 사람들한테도 쓸데없이 넘치게 엄마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샬럿이 쑥스럽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지우 씨도 열심히, 치열하게 고민해서 꼭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답을 찾길 바라요.”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 즈음에 저런 말을 해줬을 것만 같다. 아버지처럼 '징그러운 아들 새끼 뭐하고 사는지 관심없'는 게 아니라. 그렇다면 나는 수능점수에 맞춰서 학교와 전공을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름 있는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아등바등하다가 결국 아버지를 위한답시고 경찰공무원이 되겠다는 소리를 쉽게 내뱉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그런 걸 못 찾은… 혹은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요.”

중심각 180도 호를 그리는 눈웃음. 하지만 아까와 달리 조금 슬퍼 보였다.

“자, 그럼, 여기까지! 아침부터 면접 보느라 고생 많았어요! 그럼, 다음 주에 만나요!”

샬럿이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나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아버지 집에서 더부살이하기 위해 약간의 돈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걸 위해 면접을 봐야 했기 때문에 여기에 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깃털만큼의 가벼움으로 한 발 내딛었던 내게, 바윗덩어리 같은 숙제가 주어졌다.


인생, 알 수 없다.

하지만 답을 찾아야겠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선 채로 돌기둥이 될지, 산 채로 뜯어 먹힐지- 내 인생에 선택지가 그것 두 개뿐일 리 없다.


삶이 객관식이라면 적어도 사지선다는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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