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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Feb 26. 2022

9 to 6와 작별하기

 고용계약서에 적힌 사무실 주소가 우리 집이라니... 신기한 마음에 한참 동안 계약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렇게 난 말 그대로 홈오피스에서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법인은 있지만 실질적으로 한국 내에 사무실은 없는 회사다. 첫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증이 커져만 갈 무렵 HR에서 연락이 왔다. '노트북은 PC가 편하니? 아니면 맥북을 썼니?' 마음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맥북으로 기울었지만 당장 일을 하려면 손에 익은 윈도가 낫겠다. 한국보다 14시간 늦은 미국 동부에 있는 HR 담당자와 얘기를 하다 보면 가끔씩 속이 터진다. 난 목요일인데 그녀는 아직 수요일이다. 안 그래도 이메일로만 커뮤니케이션을 하다 보니 한국처럼 실시간 소통은 꿈도 못 꾸는 데다 시차까지 도와주지 않아 메일 한번 보내면 최소 5일은 마음을 비우고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몇 달을 인내심을 키우며 지내다 보니 예전 영국에 있던 때가 떠오른다. 모든 것을 이메일로 해결해야 하는 시스템이 당최 이해가 안 되었던 영국 생활 초기. 인터넷이 한번 고장 나면 이메일을 보내고 그 후 최소 2주가 흘러야 엔지니어의 방문이 이루어졌다. 전화로 해결하려면 엄청 비싼 신자 부담의 통화료를 내야 했다. 그래도 난 성미 급한 한국인! 통화료 엄청 깨졌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어쩌면 이 HR 담당자는 내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언제나 온라인으로 살고 있는 듯 메일을 받자마자 회신하고 그녀가 회신을 약속한 날짜에서 하루가 지나면 바로 리마인더를 보내는 내가 숨 가쁘게 느껴졌을 것 같아 급 반성이 된다.  


 입사 전 내 직속 상사인 런던에 있는 영국인 아저씨와 화상 콜을 진행했었다. 인심 좋아 보이는 영국 아저씨는 '네가 적응하고 이 산업에 익숙해지려면 한 1년 정도는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며 잘해보자고 웃는다. '나에게 1년이나 주겠다고?'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다. 동시에 이전 회사의 반바지(본부장)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입사한 지 2주 된 내게 기대에 못 미친다며 계속 이렇게 가다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협박받았던 그때 나의 모습이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다. 심장은 쿵쾅거리고 머리는 어지럽고 갈 곳 잃은 시선만 이리저리 방황하던 애처로운 그때의 내가 이 사람의 말뒤늦게나마 위로를 받는다.


 딱히 9 to 6로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엄청난 자율이 주어졌고 이를 현명하게 관리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겠으나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로지 성과로만 판단받을 수밖에 없는 디지털 노마드의 삶에 적응하려면 아무래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 견되는 순간이다. 일단 내 생활 패턴에 맞게 하루를 계획해보면 난 아침형 인간이니 일찍 일어나 급한 메일을 처리하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 점심 먹고 집중해서 한두 시간 정도 일을 하고 만약 시차 때문에 밤늦게 회의가 잡힌다면 그 대신 일을 일찍 파해서 저녁시간을 여유 있게 보내면 어떨까? 자유라는 것도 누려본 사람이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텐데 십여 년을 9 to 6에 갇혀있다 보니 무엇부터 바꿔야 할지 지금은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는 중이다. 택근무를 몇 개월 해봤지만 여전히 9 to 6를 엄수해야 하는 그것과는 개념이 좀 다르다. 장점이라면 낮에도 마음 편히 개인 볼일을 볼 수 있고 분기에 한번 정도 있는 오프라인 미팅만 잘 피하면 꼭 서울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단점이라면 글쎄... 일주일에 40시간이라는 규정과는 상관없이 업무시간의 경계가 좀 불분명하지 않을까? 나와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동료들과 일하다 보면 밤이고 낮이고 내가 정한 스케줄대로만 일을 하긴 분명 어려울 것이다.


 그나저나 다음 주 월요일이 업무 시작인데 역시나 HR에서는 금요일인 오늘까지 첫째 날 오리엔테이션 일정을 알려주지 않는다. 어제 COB(업무시간)까지 연락을 주기로 했건만 그들은 여전히 느긋하기 짝이 없다. 처음에는 자신이 약속한 데드라인을 너무 쉽게 어기는 그들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이 회사의 전반적인 문화인 건지 그냥 개인의 게으름인지 아니면 정말 너무 바빠서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너무 답답했다. 한국인을 상대하는 외국인들은 너 나할 것 없이 알아듣는다는 한국인의 '빨리빨리' 패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장착된 나로서는 숨넘어갈 지경인 때가 많다. 그러나 몇 달간의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늦어지더라도 결국 일이 되기는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경험을 믿고 금요일 밤의 나는 금요일 새벽을 살고 있는 그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한다. 그들의 패턴에 맞춰 여유로운 마음으로 입사 전 마지막 주말을 즐기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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