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혈단신 영국에서 살아남기(5)

Do you have any job vacancy?

by 지오바니

2003년 겨울의 어느 날


한가로운 주말 아침이다. 이곳에서는 인터넷을 사용하려면 도서관에 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 도서관 예약 대장에 수기로 이름을 적어 넣고 순서가 되면 30분씩 사용할 수 있다. 엄마에게 이메일을 쓰고 싶어 찾아왔는데 이를 어쩌나... 컴퓨터에 한글 패치가 없다. 영어로 쓰자니 엄마가 다 이해하실 수 있을까 염려되어 결국 영어를 한글 소리 나는 대로 적어 보냈다. Umma, Annyeong으로 시작하는 메일을 받으면 우리 엄마는 어떤 표정이실까. 그래도 이렇게나마 잘 지내고 있음을 알려드리는 것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효도임을 알기에 게을리할 수 없다.


여기서 만난 한국인 언니와 함께 쓰는 내 방은 아주 단출하다. 아무 무늬도 없는 책상과 침대, 옷장이 각각 2개씩 있을 뿐이다. 안 그래도 칙칙한 방인데 이곳은 한국과 달리 형광등은 병원이나 학교, 도서관과 같은 공공기관 건물에서만 사용한다. 그 외 가정집들은 전부 노란색 백열등을 사용해서 그 불빛 아래서 공부를 하려니 눈이 너무 침침하다. 결국 스탠드를 하나 사기로 마음먹고 동네 번화가로 나갔다. 런던에는 한국에는 없는 특이한 전자제품 취급점이 있다. Argos라는 상점인데 홈쇼핑처럼 판매하는 모든 제품의 카탈로그를 매달 집집마다 배송한다. 막상 상점에 가면 물건은 진열되어 있지 않고 주문지에 구매하고자 하는 제품의 번호와 수량을 적어 내면 창고에서 그 제품을 찾아내어 주는 형태다. 홈쇼핑의 오프라인 버전이랄까. 매장에 도착하니 널찍한 카운터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카운터 뒤에는 제품 이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컨베이어 벨트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문구류, 전자제품부터 액세서리까지 이곳은 전자제품점이라 하기엔 거의 잡화점에 가까워 유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제일 저렴한 중국산 스탠드를 사가지고 나오는데 앞에 Job Vacancy라고 쓰인 종이 한 장이 눈에 뜨인다. 구인공고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는 이 시점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귀한 정보다. 하지만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라 도저히 문의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곳엔 동네마다 Job Centre 가 있다. 이곳에 가서 근래 올라온 구인공고를 확인해서 직접 공고를 올린 회사에 전화를 걸 수도 있고 구직 신청서를 작성해서 구직자란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어제는 본격적으로 일을 찾겠다며 비장한 마음으로 각종 구인광고를 몇 시간 동안 검색했었다.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몸을 움직이는 일뿐이다. 식당이나 펍이라 불리는 영국식 주류바 서빙 등 외국인 노동자 비율이 높은 업종들 위주로 몇 시간을 찾아 헤맸다. 그중 마침내 찾아낸 집과 가까운 펍 하나에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며 신호음을 듣고 있을 때였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좋지 않은 통화품질 때문에 말은 자꾸 끊겼고 그에 더해 너무 빠른 말의 속도와 심한 런던 악센트는 헬로 말고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멘붕에 빠진 나에게 그는 무언가 질문을 했고 난 계속 "Pardon?"을 반복했다.

그렇게 세 번쯤 반복되었을 때였던가. 수화기 너머로 '딸깍'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어떤 의미인지 인지하는 데 걸린 단 몇 초의 시간은 마치 억겁의 세월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서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20년 어치의 수치심이 머리부터 한꺼번에 쏟아져내렸다. 자존감과 자존심이 한 방에 저 지하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기분은 그때까지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던 털끝만한 용기마저 탈탈 털어가버렸다.


한국이었다면 분명 이쯤에서 포기했을 거다. 그러나 먹고사는 문제가 달려있을 땐 자존심은 그저 사치였다. 없는 용기라도 있는 척 어떻게든 만들어내야 했다. 수중에 얼마 남지 않은 돈을 생각하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에 가슴이 죄여 왔다. 그러나 일을 못 구해 정착하지 못한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어떻게 여길 왔는데, 어떤 마음으로 온 건데...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이번 일로 전화공포증이 생긴 나는 고민 끝에 직접 발품을 팔기로 했다.


영국은 10월부터 크리스마스 준비에 들어간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런던 시내는 반짝거리는 트리들과 불빛들로 빛나고 있다. 거리엔 멋지게 차려입은 런더너들이 한 손엔 선물처럼 보이는 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있고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표정으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만끽하느라 바쁘다. 이 알록달록 컬러티브이 속 같은 장면에 어울리지 않는 회색빛의 내가 저만치 걸어간다. 가족도 친구도 하나 없이 혼자 걷는 나는 따뜻한 풍경 속에서 혼자 헐벗은 양 너무 춥다.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이미 냉골인 마음까지 덥힐 수는 없기 때문이리라. 축제 분위기로 가득한 이 곳에서 홀로 완벽히 궁지에 몰린 느낌이다. 오로지 일을 구해야 한다는 다짐에 다짐을 하며 눈에 보이는 모든 상점과 식당의 문을 두드렸다.

나 같이 소심한 사람이, 한국에 있었다면 할 필요도 없고 차마 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을 거짓말처럼 해내고 있는 현실이 스스로도 너무 놀라웠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셨으니 후회없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자 라는 마음이었다.


"Do you have any job vacancy?"

그날 저녁, 일할 자리가 있는지 묻는 저 문장을 50번은 더 외쳤던 것 같다. 옷가게, 식당, 패스트푸드점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들어가 저 말을 반복했다. '그래, 될 때까지 해보는 거야.

될 때까지!'

아직 포기는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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