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빛 Feb 03. 2024

우리는 보고 싶은 것들에서 사인을 찾지

you will see what you want to see




나의 제주 한해살이는 이층짜리 예쁜 주택들이 줄지어 있는 한 작은 빌리지에서 시작됐다. 마침 엄마가 날 위해 육지에서 내려와 함께 부동산 아저씨를 끼고 집을 구하던 날, 정말 못생긴 첫 번째 집 다음으로 그는 우리 모녀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빌리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기억 저 너머 스물한 살 때 잠시 살았던 호주가 되살아나 펼쳐진다. 이 낯선 제주 안에 익숙한 나의 기억 속 한 조각이 겹쳐지니 퍼뜩, 여기면 살아볼 수 있겠다 싶은 거다. 못생긴 일 번 집보다 가격이 두 배인 것도, 남은 집이 정원을 낀 일층이 아닌 이층집이란 사실도 내겐 아무런 흠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주인분의 승낙을 받는 것이라 하여 주인이시라는 마을의 이장님을 만나러 도착한 안채. 제주 사람들은 아무에게나 집을 쉽게 내어 주지 않는다고 익히 들었던지라 내 발걸음은 살짝 긴장을 했다. 그다지 말이 많지 않은 내가 입을 열게 되는 모먼트는 두 가지 경우인데, 좋아하는 사람과 있어 신이 날 때, 그리고 그것이 꼭 필요한 상황이 되겠다. 후자의 센서가 자연스레 켜지며 난 다정한 수다쟁이가 되어 이장님 댁과 내가 가진 공통점을 찾고 있었다. 일평생을 삼성에 바치셨다는 그가 지나온 점들에는 마침 두바이가 있었고, 그것에 내가 가진 두바이의 조각을 얹으니 그분의 얼굴에는 살가운 꽃물이 들기 시작했다. 그 길로 여행자를 졸업하고 아름다운 이층집에서의 나의 제주살이가 시작됐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보고 싶은 것들에서 사인을 찾고 의미를 땋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단지에 웬 허옇고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출몰했다. 그 생명체는 내게 아무 말도, 해코지도 않았지만 그의 커다란 형체에 놀라 난 그녀와 마주치지 않으려 코앞에 둔 입구를 직진하지 못하고 둘러둘러 다닌 것이 몇 번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결국 얌전한 그녀를 식구로 받기로 결정한 듯 그녀에게 목줄을 채워 안채 쪽에 집을 하나 만들어 주셨다. 그녀는 특유의 고요한 호수 같은 눈으로 빌리지 식구들의 차가 들어오면 일어나 반기고, 주인분께서 챙겨주는 고기반찬을 맛있게 먹으면서 이곳에 어울리는 잔잔한 템포를 더하는 존재가 돼갔다.


그런데 어느 날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 대문을 향해 가는데 돌담을 호올짝 넘어 그녀가 다가오는 게 아닌가! 아무 말도 없는 그녀였지만, 난 목줄이 채워지지 않은 채인 그녀가 여전히 두려워서 다음날 주인아주머니께 연락을 드렸다. 그리고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 아이가 며칠 전 새끼를 아홉 마리를 낳았어. 새끼들이 너무 귀여워서 사람들이 자꾸 그 강아지 집 안을 요리조리 훑어보고 하니까 그중에 약했던 세 마리가 죽어버린 거야.."


어미가 된 그녀는 남은 새끼들을 지켜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고요한 이곳, 105동과 106동 사이 담벼락 아래에 땅굴을 파 만들고는 남은 여섯 마리를 하나씩 입으로 물어다 데려 놓은 이유다. 그렇게 끼니때마다 그녀는 자기 집엘 가 밥을 챙겨 먹은 후 돌아와 땅굴에 숨겨둔 새끼들에게 젖을 먹인다. '이래서 낳은 자식 버리고 가는 어미들을 보고 개보다도 못하다 하는 건가 봐.' 주인아주머니께서는 경의에 차서는 몇 번이고 그 말을 내게 하셨다. 그녀의 사랑이 나의 두려움을 꺼트린다. 간간이 여섯 마리가 그녀의 품에서 올망졸망 젖을 먹는 광경을 이층에서 멀찍이 바라볼 때면 나의 제주살이도 점점 더 사랑으로 물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첫 만남은 늘 어색해서 내키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무한한 섬인 제주 안에선 외로움마저 무한대.. 일부러 나서지 않는 한 해프닝이 일어나기에는 너무나도 광활한 곳이 이 섬이었다. 커뮤니티를 통해 같은 리에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연락을 시작하게 된 벨기에에서 온 아티스트 친구. 때때로 업데이트되는 그녀의 일러스트 작업물들을 지켜보며 폭설이 내리는 매서운 겨울이 갔다. 드디어 삼 개월 만에 그녀와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날. 설레야 마땅한데 그동안 오죽 사람을 안 만났으면, 날짜가 다가올수록 왠지 껄끄러움이 더해짐을 느꼈다. 그럴 때면 음, 핑계를 대고 다음으로 미룰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곤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놓친 인연들이 몇인가!) 그래서 불편한 긴장감이 올라올 때면 펼쳐진 바다가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 외치며 허둥지둥 준비를 마치고 우선 걸음을 나섰다. 생각이 많아질 때면 일단 길을 나서는 게 상책이다. 바람이 많이 불어 자전거를 포기하는 대신 난 원피스라는 제주 살이의 사치를 걸치고서 버스에 올랐다. 메신저를 통해 그녀는 걸어오느라 벌써 땀이 다 난다고 했다. 답장이 늦은 걸 보니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열심히 걷고 있구나, 그려질랑 말랑하는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한번 들여다보다 어느새 도착한 바다. 오랜만에 만난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갤 돌리니 막 도착한 그녀가 눈앞에 서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서로 바다 쪽을 향해 고개를 달-랑 기울이며 서로임을 알아보았다. 우습게도 그 순간 하나로 긴장이 가시고 우리는 꽤 괜찮은 친구가 될 거란 생각이 번졌다. 살면서 처음 접해보는, 쿨하면서도 섬세해 보이는 코코넛 향 같은 소녀의 에너지였다. 안으로 가득히 웃고 있는 나 자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던 순간. 같은 사람임에도 다른 문화를 감고 있는 탓에 외국인 친구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그 뻔하지 않음이 내겐 필요했던 산소 같다. 게다가 그녀는 겪은 것들을 기꺼이 퍼서 나누어 줄줄 아는 이야기꾼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친구가 생겨서 기뻐. 정말 얼마 만인지 몰라."


마음이 찡하면서도, 그런 청량감을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었다니 마구 기뻤다. 한국어가 가능한 그녀는 대체로 한국말로 이곳 사람들과 소통한다고 했지만, 깊은 곳까진 닿지 않을 그 가려움을 나는 알았다. 금능 바다를 앞에 둔 늘 누군가와 함께 와보고팠던 카페에서 그녀와의 첫 만남은 성대히 막을 내렸다. 퍼런 하늘 속 하얗게 떠오르기 시작하는 보름달과 그에게 무대를 양보하듯 오렌지빛으로 저물어가는 해를 사이에 두고서 집을 향해 바닷길을 걸었다. 황홀감이었다. 내 안을 가득 맴돌던 그 에너지의 이름은 황홀감이 맞았다.




끝을 모르고 펼쳐지던 집으로 가는 길이 어느새 짧아져 있고, 점 찍어 뒀던 식당의 문은 하필이면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 하나에 서운해지기에는 오늘 보낸 하루가 너무 귀했고, 모퉁이를 돌아 궁금했던 또 다른 식당을 찾아 들어서본다. 짧은 몇 초였지만 앗차스레 공기를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건 내가 어느 속닥한 모임에 침입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고개를 뒤돌아 나를 보는 사장님의 얼굴엔 '시간이 벌써 일곱시 반이라 손님들은 없을 시간이에요, 오랜만에 지인분들을 초대해서 식사하던 중이랍니다' 하고 적혀있었고, 뻘쭘함을 무릅쓰고 난 혹시 식사가 가능한지를 조심스레 여쭸다. 다행히도 들어오라고 나를 반겨주시는 사장님. 그조차도 내겐 얼마나 기쁜 일이었는지를 그는 몰랐던지,


"밥이 뜨거워요"


조심히 뚝배기를 테이블에 올려주시고는 상냥하고 멋진 음악을 틀어주신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그 친절. 육지에서 참 즐겨먹던 순대 국밥을 그날 밤 섬에서 처음으로 먹었다. 한알 한알 절절히. 그들은 대화를 이어갔다. 대체로 프랑스가 묻은 외국 생활 이야기였는데, 귀에 자꾸만 꽂히는 건 한 우아한 목소리였다. 특히나 내게 정성을 주신 그 사장님의 목소리란 걸 알게 되고는 마음을 더 뺏기고 만다. 오랜만의 외식이라 난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로 모두 긁어먹은 후였고, 디저트 타임이라며 그 모임은 내가 있는 홀 쪽으로 다 같이 나와 앉으려 한다는 걸 느꼈다. 이제는 정말 자리를 피해 드려야겠다는 눈치 정도는 있어서 급히 코트를 꿰잠그고 일어서려 하는데, 나보다 더 다급해진 사장님께서 다가와 귀여운 파이가 담긴 접시를 내게 건네신다. 식후 디저트 같은 건 먹지 않는 나지만 오늘은 사양해선 안된다. 그날 밤 그가 건네주는 모든 친절을 난 달게 받아냈다. 마치 제주의 파리지앵 비밀 모임에 멋진 실수로 가담하게 된 비밀 요원이라도 된 기분이라. 그날 집으로 오르는 언덕 길, 보름달을 보면서 몇 번이고 고백했는지.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 또 감사하다고. 할 수 있는 말은 그 하나뿐인 사람처럼.



with love

금빛




작가의 이전글 시린 새벽의 바다처럼 검푸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