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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 Oct 17. 2023

시린 새벽의 바다처럼 검푸른




어릴 적, 가끔씩은 아침부터 교실 안 공기가 다른 날이 있었다.



분명히 무언가가 잘못된 날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했던 마음은 친구들 몇을 마주한 후 또렷해진다. 절대로 그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그들은 나와 눈을 맞추지 않았고, 그걸 깨닫고 내 안에 쓸쓸함이 밀려올 때 즈음이 되면 그들은 나를 투명 인간처럼 대하며 떠들거나 내게 전달해야 할 말이 생기면 그중 한 명이 퉁명스레 와 건네곤 돌아섰다. 힘센 남자아이들이 교실 전체 분위기를 지배하고 조종하고 있었다. 그들은 맘에 들지 않는 한 명씩을 지목했고, 힘없는 나머지 학우들은 자동적으로 그 주변을 멀리했다. 그 한 명이 늘 다른 이일 거란 법은 없었고, 그 한 번이란 게 얼마를 갈지를 몰랐다.



어느 날 아침, 그것이 나의 순서임을 느낄 수 있게 싸늘한 공기가 나를 눌러왔다. 난 선생님께 이르지도, 그들의 짓거리에 대꾸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불쌍한 척 그들이 만드는 분위기를 수긍하며 나를 작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철저히 그들을 무시했다. 그들의 수군거림을, 비웃음을, 때론 야비한 장난이나 호기로운 놀림 같은 것들까지. 마치 그들과 내 책상 사이에 벌어진 틈을 만든 것이 나인지 그들인지 헷갈려 할 정도로.



얼마 후 그 철저히도 혼자만인 시간을 즐길 수 있게까지가 되고 나면 그 못된 마법은 풀려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어서는 안되는 감정 중에 하나가 바로 그런 외로움이라 깨닫다가도, 어리지만 그 수련 같은 시간을 버텨낸 성취감에 '어 혼자도 제법 괜찮은데' 싶은 웃픈 결말에 닿곤 했다. 편을 갈라 서로에게 못됐게 구는 짓을 정치적이라고 묘사하는데, 어떻게 아이들은 그 어린 나이부터 정치가 가능했을까. 아니면 어른들이 미처 성숙에 닿지 못해 어린애처럼 구는 것을 정치적이라 부르는 걸까. 정치란 결국 어린 짓일까. 사람들이 사는 이곳은 왜 여기저기 선이 그어져 지배와 조종 아래 있을까. 잊었던 그 어릴 적 감정을 난 왜 서른 넘게 먹고 들어온 회사에서까지 다시 마주해야 하는 걸까.






어느 날 잠에서 깨었는데 왠지 모를 솜털 같은 느낌에 구즈범이 다 돋았다. 이렇게 포근한 느낌으로 잠에서 깨난 게 얼마 만이더라.. 생애 손꼽을만한 날일 거라. 조심조심 기억의 다리를 타고 들어가니 지난밤 꿈에서 친구를 본 게 떠오른다. 친구는 우리에게 구세주와 같았던 그 남자친구와 함께였다. 더없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당연하리라까지 느껴지던 둘의 에너지. 친구는 '그래, 나왔어?' 하는 무언의 눈빛을 줬다. 설탕 같은 다정함도 추위 같은 낯섬도 없는 그 적당한 온도의 눈빛이 좋았다. 그 안엔 뭐랄까, 온천물같이 모든 괴로움이 풀리는 황홀감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결국 네가 여길 찾아 나올 줄 알았어. 그냥 너에겐 이 편안한 곳에 닿을 수 있게 그 징검다리가 필요했을 뿐이야. 힘들었지?, 근데 길지 않았잖아. 이제 괜찮아.” 하고. 모든 아픔을 초월해 있는 그녀가 있는 그곳에 내가 닿았던 밤.






"금빛님 맞으시죠?"



국제 커플인 그녀는 남자친구의 한국 비자를 도와주러 함께 공관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어느새 14일이 흘러 비자를 수령하는 콜렉션 날, 그녀는 그를 대신해 또다시 나의 직장을 방문했고, 확신에 찬 눈으로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일하는 직장에서 블로그 구독자님을 만난 경의로운 날. 그 짧은 순간에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들이 오갔는데, 사실 내가 그녀를 또렷이 기억하는 건 아침부터 스트레스가 펑! 하고 터질법했던 어느 날 그들을 대면했고 난 극도로 친절하지 못했단 걸 스스로 잘 알았기 때문이다. 새까맣게 탄 나를 마주하는 순간. 그녀는 그 모든 걸 이해하고 또 용서한다는 듯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많이 힘드시죠. 쓰시는 글들을 너무 잘 보고 있어요. 팬이에요." 이번에 책을 내셨던데 사인이라도 받게 사서 가지고 왔어야 했다는 말까지 붙이시면서. 어디서 만나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날. 내가 원치 않는 현실에선 가면을 쓴 채 나를 숨기고 있다 생각하지만, 실은 그 가면이 진짜 너일지 누가 알겠느냐고. 그렇게 승무원이시라는 그녀는 손을 내밀어 (두 번이나) 꼬옥 잡아 주시고선 가셨다. 그녀가 주고 간 그날의 따스함에 마음속 찰랑이는 빛들이 반짝반짝 비치며 웃는다. 금빛 공간엔 소리 없이 고운 빛들만 모여 있었던 거구나. 이렇게나 따스한 분이 나의 구독자분이라니 난 그것으로 무한히 행복하다고. 다시 한번, 너무 반가웠고 감사했습니다.





세상엔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 것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알려주지 않는 이야기. 마치 내가 맡고 있는 일에 대한 커다란 비밀이라든지, 누설하지 않겠다고 서명해버린 것들이요. 그리하여 진짜 이야기들은 후추처럼 세상에 시원하게 뿌려질 수 없어요. 캐비아처럼 특정한 이들의 냉장고 속에나 있겠죠.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건 이 캐비아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후추 소금 설탕 같은 것들에 너무 속지 말아요. 사실 그들의 캐비아를 맛보고 난다면 아마 실망만 한가득 남을지 모르죠. 로망 없이는 현실을 살 수 없지만, 그들이 지어논 현실은 나의 로망이 아니니까.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걸 찾고 있었구나, 그걸 깨닫고 나면 이제 오롯이 당신만의 캐비아를 만들 시간입니다. 당신에게는 이 시간이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좋겠지만, 사실 그 엉뚱한 계절들 없이는 어떤 캐비아가 특별할 수 있을까요?





엄마가 엉엉 울었대요.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친구인 유미네 어머니가 유미 아버지께 하시는 말씀이 방문 너머로 들렸습니다. 제법 화려했던 저의 초등학교 생활을 접게 될 졸업을 남겨둔, 육학년 마지막 몇십일. 아빠 회사 때문에 새로운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남은 한두 달 정도를 절친했던 친구네 집에서 보내게 됐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한 달이나 머물 수 있는 친구라는 존재가 내게도 있었다는 사실이 좀 감동스럽기도 합니다. 친구랑 학교를 마치고 다운타운에 갔다가 중학생 일진 언니들에게 당해서 가지고 있던 용돈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던 날이었어요. 금액이 좀 컸죠. 엄마가 떨어져 있을 동안 걱정이 돼 몇 번을 더 얹어서 줬을 자그마치 한 달 치였으니까. 친구 생일 선물을 사주러 갔었는데, 몇 가지를 고민하느라 이동하던 틈에 일어난 일이라, 선물은 고민 말고 처음 잡은 그걸 사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던 날이기도 해요. 다행히 집으로 돌아올 버스비는 남겨준 언니들 덕분에 집에 오면서 우린 같이 찔끔찔끔 울고는 말이 없어졌죠. 풀이 죽은 우릴 보고 유미랑 한참 이야기를 나눈 아주머니께서는 그 사실을 우리 엄마한테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자다 깨서 방문 밖으로 그 소릴 들으면서 어린 소녀가 그날 밤 궁금했던 건, 엄만 내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었어요. 난 그녀의 목소리가 간절했으니까. 그렇담 그 눈물은 다 무슨 의미일까. 엄마가 내가 걱정이 돼서 울리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엄마가 많이 화가 났나 보다 했어요. 다음날 엄마는 전화기 너머로 눈물도 화도 없는 침착한 목소리로 조심해야 한다고만 몇 번을 말했어요. 그렇게 늘 엄마의 사랑은 제게 통역이 불가능 한 것이었답니다.






시린 새벽이라 슬픈 글들만 있을 거란 생각은 내려놓아요. 저에게 새벽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열정입니다. 새빨간 열정보다는 새하얗고 순수한 빛의 그것이요. 시험기간 한 자라도 더 보고 가려고 시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책상에 앉던 날들이 떠올라요. 새벽 기차를 타고 학교로 넘어가려고 열차 승강장으로 부지런히 마을 길을 올라가던 그 고운 숨도 생각나고요. 운전이 미숙해 도로가 꽉 막힌 밤은 건너뛰고 텅 빈 시퍼런 새벽에 시동을 걸고 기숙사를 벗어나 붕붕 집을 향해가던 씩씩한 휴일도요. 장시간 비행 끝에 마치 유령이 된 몸으로 창밖에 보이는 몇 천 개의 호롱 불이 깔린 낯선 나라의 도시를 바라보던 그날들도 생각이 납니다. 어떤 삶을 원했기에 나라는 사람은 그렇게도 새벽녘 도시를 옮겨 다녔을까요?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저 아무것도 몰라 두렵기만 했던 건 아닐지가 걱정인, 새하얀 색의 열정으로 물든 새벽들이 저는 지금 떠오릅니다.





홀로 첫 여행을 하던 날, 목적지는 런던이었습니다. 이실직고 말하자면, 홀로 시간은 이미 호주에서 많이 보내봤어요. 무얼 해야 할지 몰라 바짝 타들어 갈 때 즈음이 되면 겨우 까치발 들고 나와 동네를 몰아 걷고, 한 끼를 몰아서 차려 먹던 그런 시간요. 그 무렵, 두어 번 정도 혼자 골드 코스트에서 기차를 타고 브리즈번 시내를 다녀와본다든지, 그리피스 대학교를 버스 타고 찾아가 캠퍼스 한쪽 구석에서 영문법 책 한소끔 읽어보고 온다든지 하는 시작점이 분명 있었어요. 흐릿하고 서툴지만 그 시작점들 덕분에 비로소 이 날이 주어진 걸지도 모르지요.


어쨌건 다시 돌아와, 홀로 첫 여행을 하던 날 목적지는 런던이었습니다. 에어비앤비 호텔 숙소를 구하는데 마지막 사진 두 개 정도가 웬 사랑스러운 정원이잖아요? 덥석 예약을 하고 도착한 그곳엔 사실 그런 정원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어요. 오직 단 하나의 일 인실 객실만이 칠층에 놓여 있었죠. 중요한 건 그곳엔 계단이란 게 없었답니다. 에어컨이란 것도 없어요. 커다란 캐리어를 낑낑거리며 옮기는데 (도시를 옮기며 사는 저란 사람에게는 이는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무게와 험난함은 너무나도 이색적인 것이었고,) 숨통이 끊어지나 할 찰나 방 앞에 도착해 섰어요. 그 꼭대기 방 창문을 통해서 저는 열흘간 노팅힐 가의 해질녁과 새벽을 보게 됩니다. 이유 모르게 쏟아지던 소나기도요. 뭔가 영화 속에 내가 쏙 하고 들어선 느낌, 창 밖은 기분 좋게 나를 불렀어요. 그럼 난 나에게 미션을 주는 거죠. 비비안 웨스트우드에 들러 나에게 선물 하나 사오기, 빅토리아 뮤지엄에 들러 좋아하는 프리다 칼로의 전시 보고 오기. 하이드 파크가서 노을 보고 오기.


해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지금, 흐리고 서툴렀던 그 점들이 마치 잘 익은 습관처럼 지도가 되어있어요. 서툴게 시작을 해준 그날의 나 덕분에 지금의 내가 되어.





만나게 될 사람은 만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 사람을 만났는데 서로 모른체하고 지날 수도 있겠죠. 아니면, 우리 뭔가 통하는 것 같아 하고 고백할 수도 있는 거고요. 어제의 우리처럼.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는 데에도 용기는 필요한 것 같아요. 안 그럼 그런 사람을 또 만나기까지 삶을 둘러 둘러 가다, 그런 빛의 존재를 까먹고 뭔들 흘려보내 버릴 것만 같아. 마치 기숙사 내내 붙어 다니던 그 언니의 온기가 이젠 생각도 나지 않는 것처럼요.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내요. 한 발짝만 더. 오늘은 물어봐요 당신도 나를 알아보았느냐고. 돌아올 정답은 당신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with love,


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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