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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 Jul 15. 2023

나의 작고 달콤한 겨울 동화의 나라

포토 에세이


겨울이라는 설레는 단어를 놓고 사진들을 감상한다. 감상하다 라는 동사를 영어에서는 "appreciate"이라 쓰는데, 그 사실을 알고 난 후로 나의 감상은 더욱이 그 작품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끌어안는 식이 되었다. 나에게 그 영단어는 커다란, 나를 비우고 그 대상을 가득히 받아들이는, 미를 찬양하는 모양이기 때문에. 그렇게 때로는 외국어를 통해서 한 단어가 내게 가졌던 뜻과 느낌이 입체적으로 진화하곤 한다. 외국을 여행하며 만난 겨울날들 때문에 내가 알던 겨울이 결코 그전과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집에서 십분정도 걸어 내려가면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난 그곳을 기웃거리며 공항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 시간이 너무 뜨니 다음 정거장까지 걸어가도 충분히 버스를 만날 수 있겠다 싶어 급히 걷기를 시작했다. 그때, 동네에 단 하나뿐이라 몰래 자부심까지 갖고 있던 치킨집 앞에 누군가 서서 나를 나지막이 불렀다.


"저기요..!"


그의 손엔 휴대폰이 들려 있었고 그는 이어 말했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사진을 몇 장 찍어도 괜찮을까요? 너무 아름다우셔서요.."


(아니, 이런 문장을 일기장도 아닌 브런치에다 쓰다니. 거 참 뻔뻔하다 할 수 있겠으나 일어난 일을 왜곡하고 싶지 않은 저자는 마저 뻔뻔히도 써 내려가련다. 장담컨대, 아직 이걸로 뻔뻔하단 판단은 마시길. 그녀가 얼마나 더 뻔뻔할 수 있는지를 보여드릴 테니..) 당시 1일 1편, 아트 영화에 빠져있던 나는 그 아름답다 말하는 대상이 나라는 사실에 취하기보단, 그가 포토그래퍼일까 하는 호기심에 흥분했다. 나의 허락을 구한 그는 사진 몇 장을 더 찍는다.


"사진작가라뇨, 아니요. 혹시 맥 라이언이라는 배우를 아세요? 지금은 많이 늙었지만 제가 정말 좋아했던 외국 배우인데, 친구 가게 안에서 지나가시는 걸 보는데 뭔가 그녀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만 같더라고요. 이것 참, 그래서 저도 모르게 뛰어나와서 이렇게 용기를 무릅쓰고.."


친구를 보러 제주엘 왔는데 일이 많은 친구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친구네 가게에 앉아 따분함을 즐기고 있던 그는 길 건너편 버스 정류장을 맴도는 나를 보았고, 그녀가 가까이 건너와 뛰어가길 시작하자 덩달아 뛰쳐나오게 된 모양이었다. 그는 육지 집에 가면 오늘 찍은 그 사진을 방에 걸어둘 거라고 말했다. 나를 포착한 그 순간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지루했던 그 여행을 통째로 보상받은 기분이라고.


내가 수없이 생각해봐도 우린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지만, 기분 좋게 웃는 맥 라이언을 보면 내 기억의 회로는 자연스레 그날로 흐른다.




런던을 여행하던 중이었다. 문학의 귀함을 아는 이들의 도시는 여행객들 사이에서도 서점들로 유명했다. 사실, 그 사실을 몰랐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을 정도로 그곳엘 가면 눈에 띄는 게 서점이란 걸 느낄 수가 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들은 거리에 서서 우리를 부른다. 마치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덩달아 저 정갈한 책들처럼 반듯함을 줄 것 같은 무드를 풍기면서. 지갑을 열 수밖에 없게 만드는 프레피 룩들처럼. 어느새 기웃거리길 멈추고 난 그 안을 들어가 찾고 있었다. 사치 같은 말쑥한 한 벌 말고, 적어도 니삭스 같은 담백한 여행의 동지를. 서점을 나와 어제 들렀던 이곳의 가장 오래된 크루아상 디저트 집을 다시 찾아 앉았다. 얼른 캔버스 백에서 그녀를 꺼낸다. 그녀는 작고 소중한 분홍색 표지를 입었다. 이 디저트 가게를 목적지로 찾아 헤매다 겨우 도착해 '이런, 어딜 앉아야 하나' 몰래 고민에 빠진 한국인 관광객 동지분들이 나를 지켜보는 것만 같다. 마치 어제의 나처럼. 그럼 난 티를 홀짝이며, 더 힘주어 그녀를 쥐고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간다. 그들은 아마 귀갓길에 서점에 들러 좋은 친구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이곳에 다시 와 서툴렀던 처음을 만회할 짜릿한 시간을 보내게 될지도. 마치 오늘 내가 그랬던 것처럼.





호텔일까? 눈이 너무 예쁘다. 그런 눈송이를 더 돋보이게 하는 건 사진 속 녹색과 금색의 조화인 것 같아. 제임스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초록이다. 그렇담, 금빛이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 그렇게, 우리는 같은 색을 좋아하진 않지만 둘의 색의 조합이 이렇게 예쁘구나 하는,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는다. 우린 겨울 나라에 가도 제법 잘 어울릴 것 같다 하는 생각도 같이.




흐뭇하게 사진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눈싸움. 사진엔 보송한 눈들이 마치 우리를 간질이고 있는 느낌으로 담기지만 실제 눈싸움을, 아니 최소한 눈을 쥐어 본 사람은 알 거다. 그 차갑고 시린 축축한 느낌을. 머릿속이 재빠르게 방수 장화, 방수 장갑, 방수 목도리, 방수 모자를 찾아낸다. 마치 아마존 알고리즘처럼. 나 언제 이렇게 업데이트된 거지..




집안을 가득히 두른 커다란 창들이 날씨 또는 계절에 따라 그 장면이 바꾸니, 제주에서의 하루하루는 그 풍경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마침 새해 첫날, 잠에서 깨어나니 눈앞에 새하얀 천국이 와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폭설이라 불렀고, 난 꼼짝없이 사방이 새하얗고 소복한 천국에 잠겨버렸단 사실에 세상 황홀했던 올해의 첫날. 내년의 첫날에 나는 또 어떤 천국에 닿아있을까.





사진과 닮은 점이 많지 않은데도 괜스레 크리스마스 시즌에 갔던 프라하의 올드 타운 광장이 떠오른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민희 언니도 나란히. 영화 속 외국에 사는 언니네를 찾아가 커피인지 와인인지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걸 들고 소시지를 먹던 민희 언니가. 그 추운 겨울은 여행객들로 부산스러운 광장에서 생애 처음 핫 와인을 맛본 날이었는데, 그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갖추어진 자리는 빌 줄을 몰라 그저 광장 곁에 걸터앉아 그 검붉은 것을 홀짝홀짝 마시는데 추위가 잊혀 갔다. 훌륭한 온도와 당도로, 추워 정신이 하나 없던 나를 달래주던 사랑의 마법 약. 한 예쁜 동생이랑 함께 겨울 여행을 하고 싶다. 자그마치 양갈래로 땋은 머리에 은빛 귀고리를 달고, 마켓 광장에 서서 소시지랑 핫 와인을 먹으며. 그날의 우린 어떤 이야기들을 하고 있을까.




한 여름에도 설산이 펼쳐져 있던 스위스 여행을 마치고, 제네바에서 올라탄 파리행 기차 속. 그 아름다운 곳에 살면서 저마다의 이유를 안고 파리로 향하는 그들 속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그 기분. 구간 사이며 머리 위며 커다란 짐들로 가득 찬 그 속에서 기타보다 약간 더 큰 사이즈의 악기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을 신호로, 나부끼던 설렘이 웅장한 흥분으로 바뀐다. 가장 사랑하는 예술 도시로 향하던 길 만난, 나만의 파리행 랩소디.





성탄절 아침이 밝았다. 늘 바쁜 언니는 그날도 어딘가 부지런히 불려 나가고, 흠이는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이 친구와 통화를 하며 "간다" 말하곤 피시방으로 떠난다. 당시 나의 절친했던 친구는 늘 사이좋은 가족들과 바빴고, 난 굳이 혼자 그런 날 밖을 나가 곱절의 외로움을 느끼긴 싫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난 늘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냈나 보다. 아님 기억하고 싶지 않을 만큼 특별하지 못했거나. 누군가와 함께 '이렇다' 할 추억 같은 게 나의 기억 창고에 없는 걸 보면. 그러자.. 두 손 모은 소중한 그날들이 소곤소곤 말을 걸어온다. 둘도 없는 나와 둘만의 멋진 데이트 시간을 보내던 그 알알이 들어찬 느낌들이 다시. 얼얼한 재즈 캐럴을 틀어두고, 막 배달된 가장 먹고 싶은 것들을 입에 넣으며, 좋아하는 외국 영화들을 보면서 혼자 와인을 따 마시던. 행복감에 절어 또 다른 미래를 짓던. 이런.. 숨 쉬는 것만으로도 벅찬, 공기마저 아름다운 성탄절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와 보내는 가장 특별한 휴일이었잖아.




제주의 겨울을 맛본 사람. 칠흑 같은 밤과, 추위와, 밤하늘의 별과, 그래서 책과 커피. 도시는 그가 가진 고유한 결로 사람들을 빚어낸다. 프랑스에서 전설의 아티스트들이 쏟아진 것만 보아도 그렇다. 제주에서는 아직 문학가들이 한참 덜 나온 게 틀림없다.





겨울의 공기엔 기대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첨이자 마지막으로 바쁜 가족들이 다 같이 영화관에 앉아 보았던 해리포터 마법사의 돌이라든지, 애가 타도록 담담한 척 기다렸던 합격 소식, 타과 수업에서 매시간 반했던 코털남과의 소개팅, 모락모락 거룩한 아우라를 달고 있는 호빵들과, 모든 상처를 치유해 줄 듯 치명적이게 따스한 국물들, 깊은 눈을 하고서 고요히 기다리고 있는 겨울 바다. 마침표와 시작점을 모두 안은 겨울의 끝자락까지. 온통 겨울의 마법들 때문에.


with love,

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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