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도 없이 써 보는 영화 리뷰
옛날 추억도 되새겨 볼 겸, 글래디에이터 2 개봉에 숟가락도 얹어 볼 겸.. 24년 묵은 영화를 꺼내 왔습니다. 2000년에 개봉한 영화인데도 때깔이나 연출이 꼭 올여름 신상같이 세련되고 멋지네요. CG 없이 만들어낸 전투씬은 지금 봐도 장관입니다.
캐릭터와 세계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아래 포스팅 전체가 스포일러입니다.
Marcus Aelius Aurelius Verus Caesar
역사 속에 등장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거의 완전체에 가까운, 뭐랄까.."바람직한 황제의 표상" 같은 인물입니다. 즉위 직후 로마에 큰 역병이 돌자 제국의 인프라를 총 동원해 역병을 잡아내고, 전쟁터를 떠돌면서도 제국 전역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들에 현명하게 대처하며 로마를 이끌었습니다.
군사적 재능이 없었음에도 늘 원정군과 동고동락을 함께하는 황제에게 군단병들은 자진해서 존경과 충성을 바쳤고, 오랜 평화로 순둥이가 되었던 로마군은 다시금 강군으로 거듭났습니다. 마르쿠스 황제는 막대한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는 대신, 황실의 사치품부터 싹 팔아 치웠습니다. 근면한 황제의 솔선수범에 원로원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두터운 지지와 깊은 사랑을 보냈고,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승리하며 로마에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 자식 농사를 완전히 말아먹은 탓에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눈을 감고 난 뒤, 제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Lucius Aurelius Commodus Antoninus
아우렐리우스의 친 아들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황제. 역사상 가장 무능한 황제를 꼽을 때 탑티어를 놓치지 않는 황제로 제국에 짙고 찐덕찐덕한 먹구름을 끼얹은 인물입니다. 사나운 권력욕을 가졌으나, 정작 권력을 가진 뒤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신나게 놀아 재꼈습니다. 잘 훈련된 행정 인력들이 콤모두스의 기분에 따라 좍좍 갈려 나가는 통에, 선왕들이 갈고닦은 제국의 인프라는 삽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키도 크고 인물도 좋고 검투사 실력도 제법 있었으나, 콤모두스는 절대로 권력의 중심에 다가가서는 안 되는 자였습니다. 그가 망가트린 행정 인프라가 너무 많아, 콤모두스가 암살된 뒤에도 로마는 상당히 오랫동안 침체기를 겪으며 신음해야 했습니다.
Annia Aurelia Galeria Lucilla
아버지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공동 황제에 올랐습니다. 유능한 두 황제는 로마를 효과적으로 다스렸고, 루실라는 공동 황제인 루키우스와 결혼해 황후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같았지만, 격무에 시달리던 루키우스 황제가 과로로 쓰러지며, 루실라는 황후의 지위를 잃게 됩니다. 하지만 잠시나마 황후였던 루실라는 권력에 대한 야심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남동생 콤모두스가 황제에 오른 뒤, 루실라는 동생을 암살하고 황제에 오르려다 실패했고, 충격을 받은 콤모두스는 그대로 정신줄을 놓으며 희대의 암군이 됩니다. 물론 루실라는 반역죄로 목숨을 잃었구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자식 농사는 확실히 망했어요.
Maximus Decimus Meridius.
서기 180년. 마르코만니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겨울. 로마 군단장인 막시무스는 멍한 눈으로 고향집을 그리고 있습니다. 2년 넘게 종군하고 있는 막시무스는 전쟁이 끝나면 고향의 아내와 아들을 만날 생각뿐이지만, 항복을 권하러 간 사자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씁쓸한 마음으로 전투를 준비하는 막시무스에게 게르만 족이 항복을 거부했다는 소식이 날아듭니다.
군단병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막시무스는 짤막한 연설을 마친 뒤, 직접 Roma Victor를 외치며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합니다. 군단병들이 앞에서 버티는 동안 기병들로 옆을 치는 전술입니다. 불붙은 기름이 떨어지고 묵직한 도끼가 날아드는 전쟁터 한 복판, 사령관이 진흙탕에 나뒹구는 치열한 전투 끝에 드디어 12년을 끌어오던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번에도 황태자는 전쟁이 끝난 뒤에야 찾아와 막시무스와 묘한 신경전을 벌입니다. 그런 황태자를 보는 황제는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비록 내 아들이지만, 콤모두스는 왕좌에 앉을만한 그릇이 아닙니다. 황제는 막시무스를 조용히 불러 제위를 이어받을 것을 권하지만, 정작 막시무스는 정치에 뜻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제위를 막시무스에게 물려주려 하자, 격노한 콤모두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막시무스 또한 제거할 것을 명령합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막시무스는 가족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말을 달리지만, 고향집은 이미 불타고, 아내와 아들 역시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검을 수습한 막시무스는 무덤 사이에 쓰러져 정신을 잃습니다. 새로 판 무덤 위, 초라한 꽃 한 줌만이 두 넋을 위로합니다.
고열로 쓰러진 막시무스의 상처에는 구더기가 들끓고 있습니다. 썩은 살을 파 먹는 구더기들 아래, 문신으로 새긴 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 /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이 선명합니다. 어쩌면 로마 역시, 썩은 살을 도려내고 새 살이 돋아나게 해야 할 때인지도 모릅니다. 눈을 뜬 막시무스는 마치 종교와도 같았던 네 글자를 지워 버립니다.
Gladiator Spaniard
황제의 최측근으로 게르마니아를 호령하던 장군은 이제 검투사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막시무스는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만, 전쟁으로 다져진 몸은 칼에 반응합니다. 야전에서 평생을 구른 막시무스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검투사들을 제압하고, 스패냐드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최고의 검투사가 되면 황제를 대면해 자유를 얻는다는 노예 상인의 조언에, 막시무스는 최고의 검투사가 되겠다 대답합니다. 콤모두스 황제와 직접 대면하는 날, 막시무스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선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한편, 콤모두스 치세의 로마는 시작부터 삐걱거립니다. 콤모두스는 산적한 현안들에 관심이 없고, 원로원은 어리석은 황제를 어르고 달래는데 소질이 없습니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콤모두스가 대체 어디로 튈지 몰라, 누나인 루실라 조차 숨 한번 크게 쉴 수 없습니다. 지금은 어떻게든 콤모두스와 원로원 사이를 중재하고 있지만, 파국을 피하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막시무스는 스패냐드의 이름으로 로마 시민들의 마음을 휘어잡습니다. 거구의 검투사들을 가볍게 제압하고, 전선을 지휘하던 실력을 십분 발휘해 보병으로 전차를 엎어 버리는 기염을 토합니다. 이 떠오르는 검투사에게 묘한 흥미를 느낀 콤모두스는 친히 투기장으로 내려와 “스패냐드”를 만납니다. 이름을 묻는 콤모두스에게, 스패냐드는 투구를 벗고 답합니다.
콤모두스는 이름 한 번 물어봤다가, 무려 일곱 줄짜리 문장을 때려 맞고 넋이 나갔습니다..
Gladiator Maximus
군단장 막시무스가 살아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로마 전역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최전선에서 구른 군단병들은 막시무스의 말 한마디면 바로 칼자루를 거꾸로 쥘 수 있는 최정예입니다. 게다가 불과 이틀거리인 시라쿠사에 주둔해 있구요. 원로원의 중진인 그라쿠스와 루실라 역시 막시무스를 만나 콤모두스의 실각 이후를 상의합니다. 군단병들과 합류할 수 있다면, 막시무스는 콤모두스의 목을 쳐 복수를 하고 로마는 다시 공화정으로 복귀하라는 선왕의 유언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막시무스를 죽이려고 챔피언과 대전을 붙였더니, 막시무스는 챔피언을 쓰러트리고 자비까지 베풀어 군중들의 환호를 받습니다. 로마 시민들이 막시무스를 연호하는 사이, 콤모두스는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루실라를 압박해 막시무스의 계획을 알아낸 콤모두스의 얼굴에 무서운 광기가 스며듭니다. 로마의 시민들은 첫날부터 개선하는 콤모두스를 비난했고, 아버지는 후계자로 막시무스를 선택했습니다. 애초에 원로원은 기대도 안 했지만, 사랑하는 누나 루실라마저도 자신을 배신할 줄은 몰랐습니다. 콤모두스는 모든 로마 시민이 보는 앞에서 막시무스를 검으로 이겨 보임으로써, 아버지와 누나, 원로원의 선택이 틀렸음을 증명하려 합니다..(응?)
모두의 사랑의 받는 검투사 막시무스. 그를 쓰러트리면 막시무스가 받던 사랑을 자신이 받을 것이라 기대한 콤모두스는 막시무스의 옆구리를 깊게 찌르고, 갑옷을 입혀 상처를 가립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우레와 같은 환호를 받으며 검투장에 오르는 콤모두스를 보며 근위대장 퀸투스의 얼굴은 후회로 흔들립니다. 한때, 막시무스와 나란히 서서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위해 싸우던 퀸투스는 막시무스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시선을 떨굽니다.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막시무스에게 콤모두스는 일방적으로 밀리다 검까지 놓칩니다. 당황한 콤모두스는 근위병들에게 검을 요청하지만 근위대장 퀸투스는 검을 뽑지 말 것을 명령합니다. 콤모두스는 급한 대로 단검이라도 뽑아 달려들지만, 막시무스에게 팔을 꺾인 채 허무하게 목숨을 잃습니다. 5만의 관중이 가득 찬 콜로세움에 정적이 흐릅니다. 복수는 끝났습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막시무스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유언을 전합니다.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낸 막시무스는 이제는 불타서 사라진 고향집의 환상을 다시 보고 있습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죽은 아내와 아들이 막시무스를 따뜻하게 맞아 줍니다.
이제 이승에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딱히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습니다. 알면 도움이 될만한 배경 사건들도 별로 없구요. 그라쿠스 의원 정도가 살짝 걸리는데 ‘로마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인물’이라고 몇 번에 걸쳐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실제 역사 위에 막시무스라는 인물을 절묘하게 얹은 다음, 솜씨 좋게 잘 버무려놔서 24년이 지난 지금 봐도 너무 재밌네요. 속편을 보시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핑계로, 줄거리 요약을 리뷰라고 우기며 숟가락을 얹어 봅니다..
P.S.
루실라와 콤모두스 모두 로마를 떠나 DC로 가셨습니다. 루실라는 남들 시키는 게 답답하셨는지, 아예 말도 타고 활도 쏘고 다 직접 하시네요. 지금은 원더우먼을 낳고 데미스키라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반면 복잡 미묘한 광기의 콤모두스는 직접 싸우는 건 영 아니다 싶으셨는지, 계략과 말빨을 연마하고 계십니다. 다만 그쪽 동네에는 막시무스보다 더한 분들이 수두룩 빽빽이라..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