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들려주는 사자성어 이야기 - 외전
유방을 한중 구석으로 처넣은 항우는 다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항우가 생각하기에 초나라는 당근빠따 자기 것이었습니다. 항랑이 부활시킨 나라니까 조카인 자신이 물려받는 것이 이치에도 맞고, 파부침주까지 해가며 장한과 사생결단을 낸 것도 항우 자신입니다. 솔직히 말해 초나라 왕은 어디서 양이나 치던 왕족 떨거지를 허수아비로 세워 놓은 것이지 지가 뭐 한 게 있어요. 근데 이 놈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오기라도 한 건지 자꾸 항우에게 이래라저래라 귀찮게 하고 있었습니다. 항우는 슬슬 짜증이 났습니다.
항우는 다 때려치우고 이참에 자신이 왕이 되기로 했습니다. 우선 지금의 왕을 한 등급 올려서 천자로 만들고, 항우 자신도 한 등급 올려서 왕이 되었습니다. 천자와 왕이 한 자리에 있으면 서로 모냥이 빠지니까 천자는 자투리 변방으로 쫓아냈구요. 그렇게 해서 천자가 있는 쬐끄만 변방 나라는 정통 초나라, 항우가 있는 원래의 초나라는 서쪽 초나라가 되었습니다. 항우는 자연스럽게 서쪽 초나라의 (잘 나가는) 왕. 즉 서초패왕이 되었죠. 이 정도 선에서 정리를 끝냈으면 욕이나 좀 먹고 말았겠지만, 안타깝게도 항우는 '적당히'를 모르는 남자였습니다. 자신의 머리 위에 누가 있는 게 진심 싫었거든요..
팽성에서 쫓겨나 변방으로 가던 천자의 행렬은 '동네' 산적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천자는 살기 어린 창칼을 피해 달아나던 끝에 스스로 강으로 뛰어들었고, 그렇게 봄날의 짧은 꿈 같던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초나라의 오피셜은 ‘재물에 눈이 먼 동네 산적들이 천자도 못 알아보고 벌인 끔찍한 참사’ 였습니다만, 사람들은 오히려 '동네' 산적들의 두목이 항우의 심복인 영포와 참 묘하게도 닮았다는데 주목했습니다. 사실 눈 가리고 냐옹냐옹하는 것처럼 앞뒤가 빤한 일이죠. 그렇지만 제후들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보다는, 혹시라도 그 산적이 나를 찾아오지는 않을까에 더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럼에도 천자를 시해한 사건이 그대로 덮일리는 만무하니 결국엔 다 까발려지고 말았는데, 항우는 나는 모르는 일이며 영포가 괜한 충성심에 일을 벌였나 보다.. 하고 빠져나갔습니다. 한순간에 천자 슬레이어, 그것도 단독 범행이 된 영포는 조용히 칵퉤칵퉤 침을 두 번 뱉더니 조카에게 이십팔색 크레파스나 사주겠다며 집에 가버렸습니다.
어쨌든 천자를 치운 항우는 세상 귀찮은 천덕꾸러기가 사라졌다며 몹시 후련해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자신의 목에 굵고 질긴 철제 올가미를 씌운 것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삼촌 항랑이 굳이 힘들여 초나라 왕족을 찾고, 왜때문에 스스로 신하가 되는 길을 택했는지 항우는 끝까지 그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범증은 항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나중에야 전해듣고 까무러치게 놀랐지만 이미 쏘아 놓은 살. 죽은 이를 되살릴 방법은 없었습니다. 범증은 또 한 번 긴 탄식을 쏟아 냈습니다. 이 힘만 쎈 애새끼가 진짜..
늘 그렇듯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샙니다. 그동안 깨작깨작 투닥거리던 제나라와 초나라는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 버렸습니다. 뚜껑이가 확 열린 항우는 서열 정리를 확실히 하겠다며 직접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제나라 정도야 가뿐하게 발라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어째 항우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싸움은 끝이 나질 않았습니다. 항우와 싸우면 져도 죽고, 항복해도 죽는다는 소문(=이라고 쓰고 팩트라고 읽습니다.)이 쫙 퍼진 뒤라, 제나라도 어금니 꽉 깨물고 버티기 때문이었습니다. 항우는 장병들만 죽이는 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함부로 손을 댔기 때문에 제나라는 나라 전체가 똘똘 뭉쳐서 악착같이 버텼습니다. 그동안 항우가 저질러 온 학살의 업보가 슬슬 항우의 발목을 잡기 시작한 것이죠. 그렇게 항우는 제나라에 발이 묶였습니다.
장한을 친 유방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와 낙양까지 삼켰습니다. 그리고 잠시 한숨을 돌리는 사이, 항우가 초나라의 왕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유방은 닭똥 같은 눙물을 뚝뚝 흘리며 신하라는 놈이 어뜨케 왕을 죽이냐며, 우리 대왕 불쌍해서 어뜨카냐며 삼일동안 데굴데굴 굴러다녔습니다. 상주가 되어 초나라 왕의 상을 정성껏 치른 유방은 ‘항우 저 개썅놈을 벌하는 것은 불쌍한 우리 대왕의 영혼을 위로하고, 나아가 하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며 자기는 평화를 넘모 사랑하지만, 내가 어쩔 수 없이 저 역적 놈을 칠 테니 제후들은 모두 힘을 보태라고 외쳤습니다. 제후들은 초나라 왕이랑 유방이 원래 이르케 친했었나 다소 갸우뚱했지만, 왠지 군사를 보태야만 사람 된 도리를 하는 것 같았고 그렇게 유방의 군대는 56만의 대군이 되었습니다.
기세를 탄 유방은 그대로 동쪽으로 쭈욱 달려서 초나라의 수도인 팽성을 냅따 들이쳤습니다. 항우가 제나라를 친다며 군사를 다 끌고 나간 탓에 팽성은 저항 비슷한 것도 못해보고 바로 떨어졌지요. 항우의 연인 우미인과 가족들만이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제나라와 낑낑 거리고 있던 항우는 팽성에서 날아온 급보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본거지인 팽성이 떨어졌다는 소식과 우미인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소식. 항우는 잠깐 뇌정지가 왔습니다. 이때 항우가 느낀 감정은 뭐랄까.. 간밤에 주식을 샀는데 트럼프가 이란을 쳤다는 속보가 떴을 때를 상상을 해 보시면 대충 비슷할 겁니다. 항우는 제나라 포위는 그대로 유지한 채, 따로 3만의 정예 기병만 추려서 곧바로 팽성을 향해 말을 달렸습니다. 그리고 옳다 그르다 말 한마디 없이 유방의 56만을 향해 돌격했습니다.
영화 차이나타운에는 떼인 돈 받으러 간 깡패 김고은이 박보검에게 ‘그냥’ 반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둘이 만리장성은커녕 손 한번 잡아 본 적도 없는 사이인데.. 갑자기 반하는 전개는 개연성이 쫌 떨어지는거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지요. 그때 어떤 현인이 나타나 '박보검의 얼굴이 곧 개연성이다.'라고 깨우쳐 주자, 수많은 이들이 탄복하며 바로 수긍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밤, 항우의 3만이 유방의 56만을 단숨에 쳐버린 사건도 ‘항우는 원래 그렇다.’로 정리가 끝났습니다.
항우의 기습 한방으로 유방은 탈탈탈탈 털렸습니다. 유방의 대군은 겁에 질려 도망치다 서로 밟혀서 죽거나, 강물로 뛰어들어 죽은 자가 20만을 헤아릴 정도의 참패를 당했습니다. 너무 놀란 유방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수레 무거워진다고 자기 자식들까지 수레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수레를 몰던 가신이 얼른 떨어진 애들을 줏어 왔지요. 하지만 마음이 급했던 유방은 애들을 또 내던졌고 가신은 또 줏어왔습니다. 이게 세 번이 되자 가신도 승질이 나서 엥간히 좀 하라고 유방에게 대들었고, 유방은 너는 닥치고 말이나 달리라며 가신의 머리끄댕이를 잡았습니다. 이 생난리를 치며 형양까지 도망쳐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는데, 이번엔 항우의 대군이 쪼르르 쫓아와 형양을 포위해 버렸습니다. 유방의 아내와 아버지는 항우에게 사로잡혀 버렸구요. 유방은 막막했습니다. 홧김에 나가 싸워 볼까도 싶었지만 그러기엔 역시 항우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는 사이 군량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망했어요.
그냥 한중에 얌전히 있을 껄..
덧 붙이는 이야기
어째.. 이번 편에는 고사성어가 안 나오네요.. 크흠..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