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통치가 않으신데요.
"아들. 지금 살고 있는 집 주소 좀 불러 줄래? “
"시러요."
"야. 좀 불러봐. 엄마 지금 바빠."
"아. 시르다고..."
"저 놈 자식 저거.."
20년 넘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지만, 매해 2분기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벤트가 있습니다. 바로 초파일에 연등 달기입니다. 이 연등에는 복을 빌어주는 기능이 있는데, 복 받을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꼭 적어야 효험이 잘 나온다고 합니다.(응?) 부처님쯤 되시면 얼굴만 봐도 이름, 사주, 큰 업보, 작은 업보가 척척 나오셔야 될 것 같지만, 요즘엔 신통력 유동성에 문제가 좀 있으신가 봐요. (다 큰 뜻이 있으시겠지요.) 다만, 저처럼 불경한 중생 눈에는 이름에 주소까지 다 적어야 배달되는 시스템이면, 그냥 쿠팡에 올리시는 편이 서로 편하겠다 싶기도 합니다.
뭐, 극락정토에서도 2분기는 대목 시즌이니까. 천사들도 힘들겠죠. 일 손 덜어주는 의미에서, 이름과 주소까지는 그렇다 칩니다.
아무리 봐도 철사에 색종이 붙인 건데, 대체 왜 연등 하나에 치느님 열 댓마리 가격이 나오는 걸까요. 이 정도면 다이소에서 4천원 밑으로 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퐁퐁을 사도 2개를 사면 하나를 더 붙여 주는 마당에,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는 연등 개수대로 따박따박 정가를 때려 받으십니다.
연금 쬐끔에다가 자식들이 보태는 생활비로 생활하는 노인네들한테, 자식들 복 빌어 준다는 핑계로 한몫 단단히 후려치시는 느낌이라, 저처럼 속된 중생은 부처님의 크나큰 뜻을 좇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매년 2/4분기만 되면 쌍문동 어머니 댁에서는 연등을 붙이네, 나는 연등 시르네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4/4분기에 벌어지는 실랑이는 “귀인세”라는 분기 세금입니다. 연등만큼이나 싫어하는 세금이지요. 차라리 김여사가 귀인세 내지 말고 그 돈으로 택시를 타시거나, 친구분들과 외식을 가신다면 훨씬 기쁠것 같습니다.
"올해는 배필을 만난다고 했는데, 만나는 사람 없니?"
"읎어요."
"남쪽에서 온 귀인 없어?"
"아.김여사.쫌. 세상에 어떤 미친년이 애 아빠를 만나."
"사람일은 모르는 법이다. 다 인연이 있어."
"어. 그랴. 어디 있겄지. 아, 저번에 그 부칸 녀자는 어뗘?"
"누구?"
"왜 그 제주도에 카페 사장님이 소개해 준다고 했었잖아. 기관총도 잘 쏘고, 수류탄도 잘 까고 다 한데. 비행기로 후진도 할껄 아마?”
김여사 급 정색.
"...그래도 부칸 녀자는 안된다. 부칸으로 돈 빼돌린데."
'어? 이 반응이 아닌데?"
'아. 내가 어쩌자고 김여사께 부칸 농담을 던졌을까..'
과일 한 접시를 다 먹고, 감도 두엇 까먹을 때까지 실랑이를 하지만, 매번 결론은 비슷하게 나옵니다. '아무래도 이번 점쟁이는 소문처럼 용하지 않은 것 같으니, 내년에는 용하다는 다른 점쟁이에게 물어봐야겠다.' 저는 이 점집에 내는 복채가 재산세나 주민세 같은 정기 납부 세금처럼 느껴집니다. "돌싱세"라고 부르기는 좀 없어 보여서 "귀인세"라고 부르지요.
부처님의 큰 뜻과 연등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교회 다니시는 분이 대체 절은 왜 가시냐. 테크 트리는 하나로 쭈욱 타셔야지 나중에 이쪽에는 적선이 모자라고, 저쪽에는 은총이 부족할 수 있다. 참, 점집 아들도 이혼했다며, 그럼 그 집은 뭐냐.
매 년 같은 주제로 티격태격해 보지만, 되바라진 아들놈의 발찍한 저항은 늘 아들의 실신 KO패로 끝납니다. 김여사께는 가드도 안되고 위빙도 안 되는 필살의 한 방이 있으시거든요.
“이 놈 자식아, 그럼 장가를 가든가! 내가 너 잘 되라고 그러지. 나 잘되려고 그러냐!"
K.O. (12전 12패 12 K.O.)
아들이 돌싱인 사건 A와, 김여사가 점을 본다는 사건 B는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소위 ‘서로 다른 두 사건'인데, 이 한방을 맞으면 말문이 턱 막히면서 그대로 실신 K.O.
저항 불능에 반박 불가능.
다행히 마나님이 불쌍한 중생을 거두어 주시면서, 귀인세는 완납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라도 완납해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만.
“아들. 니꺼는 달고, 걔 꺼는 안 달면 도리가 아니다. 주소 불러 봐..”
아.. 뭔가 말이 안 되는데, 논리에 빈틈이 읎어..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