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축구의 시작점, 맨유의 OT를 마주하다.
어느 주말 늦은 새벽 시간 잠에서 일어나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가니 아버지께선 박지성이 뛰고 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를 보다가 주무시고 계셨다. 코를 골며 주무시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난 물을 마시고 들어가려는 찰나에 깬 김에 축구나 보자 싶었다.
그 이후로 난 해외축구를 진하게 접근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독일 월드컵 이전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축구의 세계는 포켓몬만 주구장창하던 나에게 새로운 국면을 열게 해 줬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 맨유에서 뛰었던 박지성을 보기 위해 나와 아버지는 주말마다 함께 축구를 봤다. (물론 QPR 시절도 봤지만 전과 같은 열정은 아니었다.)
함께 유럽을 간 맨유팬 친구의 설득으로 맨유의 경기를 보게 되었다. 처음 여행 일정을 계획할 때 날짜가 공교롭게도 주말리그 사이에 유로파리그와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있었다. 다른 리그 경기들을 전부 예매한 후 일정이 확정되었던 유로파리그는 예매 가능 여부가 의문이었다. 일정이 정해진다고 해도 맨유가 홈에서 경기를 치르지 않으면 그냥 맨체스터만 관광하려 했지만, 천운이 따랐다. 영국 현지 시간으로 9월 19일 목요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스타나 FC의 1차전을 볼 수 있었고, 도시에 머무르는 일정 또한 정말 잘 맞아떨어졌다.
맨체스터는 트램이라는 대중교통을 쓰는 도시로 신기하게도 기차역 바로 옆 플랫폼이 조금 떨어진 곳에 트램 역이 있었다. 숙소에서 나올 때부터 우리는 맨유의 유니폼을 입고 나왔었는데, 지나가시던 어떤 할머니께서 ‘나이스 맨유!’라며 인사말을 건네셨다. 얼떨떨하게 함께 ‘나이스 맨유!’라고 답한 뒤 우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 올드 트래포드로 향했다. 내 친구는 맨유의 AIG 스폰서 시절 유니폼을 입고 나는 박지성의 마지막 시즌인 11-12의 유니폼을 입고 있어서 그런 듯하다. 외국인이 전북 유니폼을 입고 전주를 돌아다니는 느낌일 테니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올드 트래포드는 토트넘과는 달리 준공한 지 100년이 넘는 세월에 걸맞게 장엄했다. 우리는 남쪽 스탠드 ‘보비 찰튼 경 스탠드’에서 경기를 관람했다. 평일 저녁이라는 시간이지만 약 5만 명의 관중들이 올드 트래포드를 찾았다. 난 옆에 있던 현지인의 이야기를 의도치 않게 엿듣게 되었다. 상대가 카자흐스탄 팀인 아스타나여서 당연히 이길 수 있고, 최근 성적이 좋지 않아 그런지 경기장에 예전보다 사람들이 덜 왔다고 말했다.
꿈의 극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올드 트래포드는 붉은색으로 가득했다. 경기장을 돌아보기 위해 일찍 도착한 우리는 경기장을 돌아보던 도중 구단 직원이 이번에도 가방이 크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당연히 런던에서 가방이 걸렸던 기억이 있어 들고 오지 않았다. 맨유의 가방 규격 규정은 토트넘과 달랐는데, 맨유가 훨씬 더 작은 가방만 휴대한 상태로 입장이 가능했다. 하필 맨유 팬인 친구가 그 규정에 걸려 가방을 맡기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이 토트넘보다 싼 5파운드(한화 약 7,500원)였다. 경기 보기 정말 힘들다며 기분 좋은 짜증을 내며 가방을 맡기고 경기장을 마저 돌아봤다.
경기는 현지 팬의 예상대로 맨유가 압도했다. 아스타나는 한 두 차례 기회가 있었지만 살리지 못했었다. 맨유는 무수히 많은 기회를 집중해 성공시켰다면 4-0 이상의 점수차가 날 수 있었지만 번번이 놓치며 1-0으로 승리했다. 이 날 맨유는 득점을 올린 신성 메이슨 그린우드의 골로 이겼는데 이 골마저 안 들어갔다면 카자흐스탄 원정팀과 비기는 굴욕을 보였을 것이다. (11월 29일에 열린 아스타나의 원정에서 맨유는 패하며 진짜 굴욕을 맛봤다는...)
과거 맨체스터의 영광은 현시점에서는 희미해져 가는 듯해 아쉬웠지만, 경기장과 외관만큼은 아름다웠다. 맨유라는 팀으로 해외축구를 보기 시작한 만큼 감회가 남달랐다. 특히 같이 경기를 봤던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었다. 아버지의 퇴근 후 늦은 밤 꾸벅꾸벅 졸면서 함께 봤던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지 나중에 다시 올 수 있다면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오고 싶은 경기장이었다. 나는 이달에 있었던 아버지 생신에 함께하지 못해서인지 더욱 아버지가 그리웠다.
영국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벌써 두 경기를 현장에서 봤다. 남은 일정은 4경기, 이 기행기를 쓰는 지금도 그 두근두근 거림이 아른거린다. 기분 좋은 기억의 간지러움은 지금도 입가를 올리게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