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빡한 인간관계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 오스카 와일드
취학 전 기억은 확실하지 않지만, 이 날만은 또렷하다. 엄마가 전화에 대고 얼통당토하지 않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오늘 못 나가겠어. 막내가 너무 아파. 어제까지 괜찮았는데, 아침에 열이 펄펄 나네.”
공범자가 되듯 가만히 잠자코 있다가, 전화를 끊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 안 아파”
엄마는 나를 사정없이 간지럼 태우면서 알어 알어 알어를 연발하며 웃어재낀다. 이 무슨 통쾌한 감정인가? 그녀는 나를 핑계 삼아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껄끄럽고 꺼림직하고 내키지 않는 일들을 조절하였나 보다. 이런 식의 거짓말이 몇 백 개였을지, 누가 알겠는가? 사실 막둥이는 엄마의 마지막 작은 혹 같아서 어디든 다 함께 갈 수 있는데, 굳이 외출을 마다한 것은 가기 싫어서였을 거다. 내 기억에 그날 엄마는 종일 먹물과 사투를 벌이며, 붓글씨를 썼다. 당시 그녀는 서예가로 활동 중이셨으니까, 애가 아프다는 핑계로 창조적 시간을 번 셈이다.
그리고 이십 오년쯤 후, 아이는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작품을 읽으며 허벅지를 친다. 아! 그날 엄마에겐 내가 ‘번버리’ 였군!
아마, 지금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 진지해지는 것의 중요성 ’을 읽는 사람은 이를 알아차리고 웃고 있으리라. 읽었는데도 번버리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희곡에서 ‘번버리’란 인물은 나오지 않으니까 말이다.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정영목 옮김, 민음사) 중 가장 마지막에 담긴 작품, ‘진지해지는 것의 중요성’의 원제는 ‘The importance of being Earnest’이다. Earnest를 형용사로 읽는 방법과 ‘사람이름’으로 보는 방법, 두 가지 의미로 해석 가능한데, 역자 정영목은 형용사로 해석하기를 선택했다. 나는 이름으로 해석해 ‘어니스트가 되는 것의 중요함’이라 붙여도 좋을 것 같다. 이 희곡은 ‘진지해지는 것의 중요성’보다는 ‘어니스트’라는 이름이 주는 환상을 환기하고 풍자하고 있다. 노자가 ‘도라고 불리는 것은 도가 아니다’라고 한 것처럼 ‘어니스트’라는 불리는 사람 중에 ‘어니스트’한 사람은 없다. 오히려 진지해지는 것, 진지한 것들에 대한 경도되는 상투성을 절묘하게 ‘조롱’하고 있다. ‘심각한 사람들 위한 경박한 희극’ 이란 부제가 이를 말해준다.
오스카 와일드는 참 경쾌하게 쉽게 다가온다. 말장난 개그처럼 가볍게, 재밌게 이야기를 살찌우고, 그 살 속에다 뼈가 있는 빈정댐을 숨겨놓은 것이다. 은근한 꼬집기를 주 특기로 극을 전개한다. 어니스트라 불리는 남자들이 벌이는 어니스트답지 않은 장면들로...
1895년 초연되어 빅 히트를 친 이 연극은 1899년 희곡으로 출간되었고, 그 후 오스카와일드의 대표작이 되었다. 내용은 아주 간단 완결하다. 두 쌍의 남녀가 커플이 되는 이야기. 시골남자는 도시여자와, 도시남자는 시골여자와 맺어진다. 시골에 사는 ‘잭’은 런던에 오면 ‘어니스트’ 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며 ‘앨저런’이란 런던 남자와 친구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앨저런의 사촌 여동생 ‘그웬덜린’과 사랑에 빠져 청혼하기로 결심한 상태이다. 하지만, 그 날 앨저런에게 자신의 이중생활이 탄로 나게 되고, 시골남자는 이렇게 실토한다.
그 내막은 잭은 답답한 시골생활에서 탈출해 도시의 물을 먹고 싶어 안달이 났고, 이를 위해 친동생 ’어니스트‘가 런던에 산다고, 있지도 않은 동생이 있는 척 시골사람들에게 꾸며대었다. 내친김에 런던에 와서는 진지하고 세련된 이름 ’어니스트‘로 행세를 한 것이다. 이중생활의 비밀을 알게 된 앨저런은 화를 내는 대신, 이렇게 화통하게 이야기한다.
런던에 사는 앨저넌은 ‘번버리’라는 친구가 있다. 번버리는 어느 시골에 살고 있으며 큰 병에 걸려 아플 때마다 앨저넌을 갈급하게 찾는다. 앨저넌에게 집안의 귀찮은 일이 있을 때마다 번버리는 아프다. 수다쟁이 이모가 밥을 먹자고 할 때마다, 번버리는 병환이 도진다. 이쯤이면 눈치 챘을 것이다. 번버리는 앨저넌이 만든 유령친구이다. 귀찮은 인간관계를 회피하고 싶을 때, 빡빡한 인간관계에서 숨통이 좀 트였으면 할 때 나타나 구해주는 여유로움이다. 거짓말이 탄로 날 리 없는 믿음직한 가상 친구다.
딱딱한 관계 틀에서 벗어나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갑자기 꺼내든 따뜻한 히든 카드. 그것을 ‘번버리하기’로 개념화한 것이다. 영한엣센스 사전에 의하면, 번버리(Bunbury)는 ‘외출·책임회피를 위한 얼토당토 않은 구실’ 로 번역되고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앨저넌은 번버리 활동이 엄격히 ‘거짓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당당한 입장을 취한다. 반면, 잭은 가짜 어니스트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어니스트’라는 동생을 죽일 계획이며, 자신이 세례를 ‘어니스트’란 이름으로 받음으로써, 사랑하는 그녀 ‘그웬덜린’과 결혼을 정당화하고자 한다. 능구렁이 앨저넌은 잭의 이런 계획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고향으로 달려가 자신이 잭의 동생 ‘어니스트’ 인양 행세를 하고, 그 와중에 잭이 후견인을 맡고 있는 소녀 ‘세실리’에게 첫눈에 반한다. 연극은 이렇게 두 명의 가짜 어니스트를 속출하게 만들고, 두 명의 여주인공들은 가짜 ‘어니스트’에게 단지 그 진지한 이름 때문에 홀딱 빠지는 장면을 연출한다. 최대한 경박하고 얄팍하게. 한 줄의 진지함도 없게.
이 연극의 클라이막스는 ‘어니스트’로 불리는 잭과 앨저넌이 두 명의 여주인공들과 마주치게 되어, 모든 비밀이 탄로 나는 장면이다. 이때 앨저런은 번버리 활동가의 사뭇 진지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 대목은 엘저넌 캐릭터에 몰입한 독자에게 이 역반하장의 말대꾸가 밉상이 아니라, 진짜 뭔가 번버리 활동에 깊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여지를 남겨준다. 나는 이 페이지 끝을 진지하게 접고, 앨저런이 번버리 활동을 하며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자신에게도 용인되고, 남들에게도 용인될 수 있는 거짓말. 지극히 개인적인 의도에서, 개인이 만든 가상세계에서 나온 이야기들. 보통의 거짓말은 내가 하면 용서되고, 남이 하면 괘씸한 것으로 받아들기 쉽지만, 앨저런은 상대방의 번버리 활동 또한 존중하며, 설사 자신을 속였다 하더라도 화를 내는 대신, 상대의 번버리 활동성을 인정해주는 쪽을 택한다. 속속들이 따지거나, 왜 얄팍하게 거짓말을 했는지 묻지 않는다. 개인적인 영역은 순전히 개인소관의 것이므로 훼손하지 않는다. 그는 타인에게 침해받기 싫은, 내보이고 싶지 않는 개인적 영역을 지키고 싶은 사람 같다. 이러한 영역을 우리는 ‘존엄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기 자신으로서 온전히 있을 자유, 권리 말이다. 앨저넌은 사회가 요구하는 몰개성적이고 친전통적인 행동에서 간혹 벗어나 잠시 숨 쉴 공간이 필요할 때, 번버리 활동을 해오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모름지기 남자는, 여자는, 그 나이 대는 이래야 옳지 라는 사회의 압력에서 자신의 정체성, 존엄성을 보존하고 싶을 때, 번버리라는 가상친구를 소환한 것이다. 단순히 뻔뻔한 거짓말이 아닌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권리로서 번버리하기는 언제나 당당할 수 있다. 진지하게 자신의 시간을 운영하고자 말이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나온 보라색 코끼리, ‘빙봉(Bing Bong)’을 기억하는가. 우리 어릴 적에는 누구나 가상친구를 가지고 있었고, 가장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절친이었다고 하는데, 앨저넌에게는 번버리가 바로 그런 존재일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솔직히 번버리하기가 좋아지는 것은 왤까? 인간특유의 일탈 욕구 때문인지,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고 거짓말을 해대도 된다는 해방감 때문인지, 가상친구와의 상호작용이 정신건강에 좋을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인지 등등. 이유야 대기 나름일 것이다.
아마도 수많은 엄마들, 아빠들은 자식들로 번버리 활동을 하였을 것이고, 숱한 장례식의 밤들 또한 누군가들의 주된 레파토리였을 것이다. ‘아는 동생들’, ‘아는 언니들’, ‘동창 중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얼마 전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 등등 이름을 얻지 못한 번버리 들도 종종 출연했을 것이다.
나의 결론은 오스카 와일드가 살았던 19세기나 지금이나 번버리 활동은 누구나 한번쯤 꾸며내 봄직한 온통 사적인 거짓말이지 싶다. 더욱이 내가 이 희곡을 읽고 변화한 것은 번버리 활동가가 되면 좀 어때?! 라고 태도를 바꾼 것이다. 몰론, 공동체에 피해가 갈 만큼 심한 번리리 활동은 지양해야하며, 그 선을 지키는 진지한 자기 조율이 요구된다. 또한 남들의 번버리 활동에 대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듯 관대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앨저런처럼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후 나는 꽤나 가끔 번버리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이에 따른 가책도 별로 느끼지 않으려 한다. 앨저런 만큼은 아니겠지만, 대체적으로 만족하고 있으며, 혹여 나의 번버리식 거짓말이 뽀록?!이 나더라도, 나는 이 책을 방패삼아 이렇게 총총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그러는데, 우리 모두 번버리 활동을 꿈꾸고 있대요. 매순간 진지해지는 게 중요하진 않지만, 가끔은 아주 진짜 진지한 핑계꺼리가 필요한 법이거든요.
저 좀 이해해줄래요? ”
PS1. 연극은 해피엔딩이다.
본래 ‘어니스트’라는 인물은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두 커플 모두 맺어지면서 끝이 난다. 잭은 마지막 대사로 이렇게 고백한다. “저는 평생 처음으로 진지해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어요“(320p).
PS2. 이 희곡은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전성기 중 최고 클라이막스에 발표된 것으로 의미가 있다.
이 후 오스카 와일드의 인생은 곤두박질친다. ‘남성들과의 외설행위’를 죄목으로 법정 최고형인 2년간 강제 노역형 선고 받고, 심신이 망가진 그는 석방 후에도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프랑스에서 ‘서배스천 멜모스’란 가명으로 조용히 지냈다. 이미 다 소진해버렸을 지도 모를 삶의 의지와 창의력을 되찾으려 그는 파리의 허름한 여관 ‘알자스’를 장기 임대하였으나, 단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영원히 잠들었다.
그의 나이 28세, 미국 전역과 캐나다에서 유미주의 문학에 대한 순회강연을 떠났을 시기, 그는 미국 세관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신고할 것이라고는 내 천재성밖에 없다”. 고. 그렇게 오만하기만치 천재성이 빛났던 작가라도 사회적 비난, 무시, 경멸을 받으며 감당하기 어려운 노역을 겪게 되면, 모든 것이 주저앉게 되는 거 같다. 즉 사회적 죽음은 예술적 죽음을 이끄는 것이다.
‘진지해지는 것의 중요성’은 오스카 와일드가 인생의 추락을 몰랐던, 가장 높고 생기 넘쳤던 인생의 절정기에 쓰고 상영된 작품이다. 작가의 유언이 삶에 대한 마지막 말이라면, 작품 절정기 작가의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오스카 와일드처럼 말년의 삶이 눈물로 얼룩진 경우는 더더욱 절정기의 말이 아련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죄인으로서 지내야했던 어두운 방 안, 그가 가장 그리워했던 날들은 ‘번버리 활동’을 펼쳤던 그 자유롭던 시절이 아니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