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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미Cumi Aug 02. 2020

나는 왜 못쓰는가? 혹은 왜 안쓰는가?

일곱 해의 마지막, 인간 백기행에게서  온 불꽃

  작가에게 절필은 붓을 꺾음으로써 자신의 어떠한 감각을 잘라내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고통이며,  안 씀으로써 침묵이 된 공백은 일종의 세태에 대한 시위로서 작용한다. 절필은 작가라는 노동자만이 쓸 수 있는 '스트라이크'이며, 그만의 뚜렷한 명분이 표명되거나, 짐작되어야 한다. 

 반대로, 몇몇 많은 작가들은 안 쓰는 것이 아닌, 못 쓰는 사태를 겪는다.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먹고, 사랑하고 기도 하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그 후 글쓰기로 인해 고통과 좌절을 겪었다고 한다. 전작보다 뛰어난 작품을 써야한다는 부담감에 모두 완성한 책 원고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는 일화도 알려졌다. 더 잘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이겨내야 하기에,  글이 써지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 ‘라이터스 블록(writer’s block)이란 용어도 있듯이, 모름지기  ‘오늘 글을 쓴 사람이 작가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작가들은 글을 쓰지 않을 때, 조바심과 조여 오는 정신적 쫓김을 겪는다. 

 

영화 ‘소설보다 낯선(Stranger Than Fiction)’에 나오는 여류 소설가에게는 자신이 탈고를 하지 못할 까봐 일정을 관리해주는 매니저가 있다. 그 매니저의 역할은 여류 소설가를 쪼아서, 좋게 말하면 넛지(nudge) 해서, 기한 내에 글을 쓰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여류 소설가는 매니저의 집요한 잔소리와 명령하는 듯한 지시에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인다. 글이 뭐 그렇게 쉽게 나오는 거냐며 온몸을 찡그리며 반발한다. 그러한 장면에서 여류소설가 역할을 한 엠마 톤슨(Emma Thompson)의 연기가 돋보였다. 그 영화에서 유독 하얀 얼굴이었던 엠마 톤슨은 작가가 겪는 글쓰기의 고통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작가는 못쓸 때에도, 안 쓸 때에도 괴롭기는 마친가지다.   


 만약 한동안 소설을 쓰지 않고, 혹은 못쓰고 있는 어떤 소설가가 작품 활동이 정지될 수 밖에 없었던 과거 유명 문인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게다가 그 과거 유명 문인은 자신이 오래도록 흠모해오던 대상이라서 그의 삶에 대해 헌신적으로 쓰기로 했다면, 과연 어떠한 작품이 탄생될까? 


나의 이러한 가정을 뚫고 나온 작품이 바로, 김연수의 <일곱 해의     마지막> 이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란 소설 이후, 8년만의 신작이다. 8년이란 시간은 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중학생을 마치고, 고교1학년 진학을 앞두는 세월이다. 한동안 진짜 뜸했던, ‘이제 나올 때쯤 되었는데’, 독자들이 혼잣말을 꽤 여러 번 할 때쯤, 김연수는 본명은 백기행이나 백석이라 널리 알려진 시인의 삶을 들고 나왔다. 


본명: 백기행, 필명: 백석 (1912~1996)


 보통 근대 문학가의 스토리는 경성을 배경으로 모던 보이들의 센치멘탈한 삶으로서 보여 지곤 했었는데, 특히 백석 시인은 낭만적인 연예사로도 한편의 영화로 나옴직한데, 김연수는 백석 시인의 화려했던 청춘이 아닌, 북한에서의 중년 시절 7년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당이 요구하는 지침 아래에서 글쓰기를 강요당했던 백석의 이야기다. 즉, 자신의 문학성을 숨기고, 개조된 삶을 보여야하는 백석에게 글쓰기는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자신의 감각이요, 거짓 감정을 부려야만 부지할 수 있는 딜레마의 도구였을 것이다. 


엄종석(중앙당 문화예술부 문학과 지도위원장)

 : 어째서 번역을 더 많이 하겠다는 거요? 동무는 시인이 아니오?

   (~) 시를 쓰지 못하는 것이오, 쓰지 않는 것이오?


백기행 (백석) 

 : 당연히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엄종석 

 : 그럼 좋소. 기회를 줄테니 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노력해보시오. 

 (~) 지난해에도 동무는 부르주아 의식을 청산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지 않았소? 창작이 부진하다면, 그 이유를 추궁받을 것이오.

                                                            (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문학동네 56 ~ 57p 정리) 


 실제로 이와 비슷한 대화가 많이 오갔을 거라고 짐작된다. 백석 시인은 1956년 9월 북한의 문학잡지 <조선문학>에 ‘나의 항의, 나의 제의’라는 글을 발표해, 아동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며, 주목받았던 문인이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보는 인간 감정의 복잡성을 무시하려는 무지한 기도를 아동시는 타기한다. 시는 깊어야 하며특이하여야 하며뜨거워야 하며 진실하여야 한다(105p)’ 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 소련에서는 흐루쇼프의 탈 스탈린화가 진행되면서 정치상황이 급변하였고, 북한은 소련의 흔적을 지우고 오직 민족적, 주체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폐쇄적 사회로 기울어져 갔다. 당이 요구하는 시를 써 내지 않으면 평양을 떠나 춥고 외진 탄광이나 협동조합으로 가게 될 처분이 내려질 위기였다. 그런 일을 피하자면, 백석은 시를 써야만 했다.


  사실 그는 그동안 써둔 진실 된 시들이 많았다. 하지만 당에게 작품이 발각된다면, 큰 변을 당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 러시아 시인 ‘벨라’를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벨라는 김연수가 실존 인물인 러시아 대표 여류시인 벨라 아흐마둘리나(Bella Akhmadulina) (1937~ 2010)를 모델로 만든 가상인물인 것 같다. 소설 속 벨라는 1925년 출생으로 실존인물과 차이가 있으나, 모스코바의 고리키 문학대학 출신으로 벨라 아흐마둘리나의 ‘젓나무’를 낭송하는 장면이 소설 속에서 연출되기 때문이다. 벨라는 북한의 조선작가동맹의 초청을 받아 백석을 만나게 된다. 백석은 그녀의 통역을 맡았고, 빗줄기 속에서 짧지만 깊은 대화를 나눈다. 


벨라 아흐마둘리나(Bella Akhmadulina) (1937~ 2010)


 벨라는 ‘당신 안에서 조선 언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야만 한다고, 죽어가는 단어들을 매일 생각해야만 한다고, 그것이 시인의 일이라고, 하루하루 세수를 하듯이’(p165) 라고 백석에게 충고했다. 

 벨라가 떠날 때, 백석은 몰래 자신의 시 노트를 건넨다. 자신의 시를 간직하고, 지켜주길 바라면서... 이것이 소설의 가장 큰 사건이며, 독자들은 과연 벨라가 백석의 노트를 러시아 문학계로 잘 배달(?)할 것인지를 관건으로 읽게 만든다. 하지만, 소설은 현실처럼 맥없이 무산된다. 벨라는 북한 시인들에게 육필 시를 선물 받곤 했기에 백석의 노트에 대해 무심했다. 

 몇 달 후 어느 날, 그의 노트를 발견하고 호기심이 발동해 해독할 사람을 찾았다. 모스크바에서 시나리오 공부를 하는 조선인 유학생 ‘리진선’이었다. 그는 자신도 시를 쓰는 사람이며, 단 이틀 만에 번역을 하겠다며 백석의 노트를 가져갔다. 하지만, 그 사이 그는 조선인유학생대회에서 당과 수령에 대한 불경스런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북한대사관으로 잡혀간다. (세상에 하나뿐인 공책은 남에게 빌려주는 것이 아닌가보다. 복사라도 해서 주든가 할 것이지! ). 백석의 노트는 이렇게 사라졌다. 벨라가 ‘리진선’에게 노트를 주지 않고, 나중에 모스크바 문단에 백석의 시를 번역하여 발표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운 감정은 커다란 한 숨처럼 소설 속으로 깊게 빠져들게 한다. 


 한편, 벨라에게 준 자신의 노트를 당이 알게 된다면? 또 어떤 고초를 겪게 될지, 백석은 그런 긴장감 속에서 당이 지시한 임무를 복종해, 시멘트처럼 개조된 시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인지... 시를 버리고 삶을 부여잡을 것인지... 이 모든 건 백석의 펜 끝에 달려있다. 


  그는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 

김연수 표현에 따르면, “기행은 시를 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써 내지 않고 있었다” (60p). 


 백석의 절친 허준은 ‘이곳에서 우리 작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시바이(연극, 속임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라고 했다. ‘자기를 속일 수 있다면 글을 쓰면 되는 거지’(31p). 그는 청년시절부터 백석에게 힘과 용기 그리고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었다. ‘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라는 쪽지를 건네기도 했었던! 허준은 알고 있었다. 백석이 다시 시를 쓴다면 불행해질 거라는 것을. 


 그래서 백석은 1959년 6월, 양강도 삼수읍 협동조합 축산반으로 보내진다. 8.15 광복 후 스승 조만식의 비서 겸 러시아어 통역으로 활동을 시작한 곳, 아동시와 번역 일로 문학활동을 유지해왔던 곳, 평양에서 추방된 것이다. 문단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선고나 다름없었다.


이미 젊은 백석은 이렇게 쓰지 않았나? 


“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중에서, 1938년 발표. 백석 나이 27세).


 자신의 이십대가 쓴 시구절이 마흔 후반 중년에 현실로 다가왔다면? 그것도 눈이 푹푹 내리는 북쪽, 영하 40도의 겨울, 하얀 양들을 위한 허드렛일이 쌓여있는 산골이었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기행은 친구 허준에게 편지를 쓴다. 솔직히 쓰고 나서 보니 당의 검열이 두려워져 난로 안으로 던져버렸다. 글자들은 불꽃을 내며 타들어가 완전히 재가 되었다. 기행은 그 과정에서 희열을 느꼈다. 그날 밤에도, 다음날에도 쓰고서 태웠다. 


 어차피 아침이면 재로 돌아갈 문장들이어서 기행은 거리낌 없이 써내려갔다. 원하는 만큼 마음껏 편지를 쓴 뒤, 기행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쓰고 나니 비로소 기행은 살 것 같았다.  

(~) 다행히도 밤은 길었으므로 기행은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그렇게 한편의 시를 쓰고 종이를 찢어 난로에 넣고 그 불꽃을 바라보는 일을 반복하다가 그는 노트에 '관평(館坪)의 양(羊)'*이라 쓰게 되었다. 

(~) 이제 비로소 기행은 불면의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205 ~ 207p                                                                                             

* 관평의 양: 백석이 삼수군에서 쓴 산문 제목


 ‘모닷불’이란 시를 쓴 백석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불은 모든 것을 삼켜 불꽃을 일으키며 태운다는 것을,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그리고 자신이 쓴 문장들도. 하지만, 백석은 이제야 알게 되었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재로 덮인 폐허의 끝에서 또 다른 시작이 동이 튼다는 것을. 


 ‘완전한 패배’ 가 지옥의 탈출구가 될 수 있으며(116p), ’완전한 폐허‘를 응시하는 일이 시인의 일이라는(164p)는 벨라의 말에서 기행은 자신이 소중하게 느껴온 세계, 벗들과 함께 맞는 바닷가의 비릿한 바람과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밤, 공들여 문장을 고치는 시인의 마음이 불타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1963년 여름 밤, 기행은 상상하지 못한 뜻밖의 큰 불을 목격한다. 하늘이 내신다는 천불, 순식간에 숲 전체를 태우며 나무들을 서 있는 숯으로 만드는 큰 불 앞에서, 두메산골 화전민들에게 생계의 텃밭이 생기는 고맙고 뜨거운 순간 속에서, 백석은 불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안다. 


“ 기행은 천불에 휩싸여 선 채로 타오르는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 (239p, 소설의 마지막 문장).


 백석은 1962년 5월 <아동문학>에 ‘나루터’라는 동시를 발표한 것을 마지막으로 북한 문단에 이별을 고했다. 아무 것도 쓰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김연수는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문학을 지키기 위해서 절필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쓰지 않음이 실패가 아님을 우리가 알기에, 쓰지 않음으로 더 기억된 시인 백석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천불’은 강렬한 시작을 의미하지 않는가?  


완전한 폐허로 보이는 양분 품은 땅 속에서 새싹이 솟아오르듯, 끝은 시작을 등 떠민다. 분출시킨다. 기행은 선채로 숯이 된 나무들 틈에서 새로운 시가 밀려옴을 느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새롭게 시작을 펼쳤을 것이다. 다만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밤에 쓴 그의 시들은 아침에 재가 될 것이지만, 기행의 가슴 속에서 불꽃을 일으켰을 것이고, 그 불꽃은 매일매일 꺼지지 않았을 거라, 나는 믿는다. 

그렇게 그는 다시 시작했을 것이다. (김연수도 그래서 천불을 내지 않았을까?) 


 아리스토텔리스가 시학에서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했듯이, 이야기는 그 원리가 ‘시작과 끝’이 라면, 인생은 ‘끝과 시작’이다. ‘끝과 시작’의 영원회적 순환원리가 아닐까? 

멀리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까지 불러온다면,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세상 만물의 원리(아르케, Arche)를 ‘불’이라고 했다. 그는 “불의 죽음이 공기에게는 생겨남이고, 공기의 죽음이 물에게는 생겨남이다”.  “모든 것은 불의 교환물이고, 불은 모든 것의 교환물이다.” 라고 표현했다. 즉, 불은 변화와 생성 매커니즘의 근원인 것이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격언으로 유명한 헤라클레이토스는 한마디로 변화의 철학자이다. 단 한순간도 똑같이 흐르지 않는 강물처럼 만물은 다양하게 변화하며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화는 소멸과 소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멸망은 없다. 절망도 없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에게 있어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은 가장 소중한 특권이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불안, 걱정, 고통, 고뇌, 불행, 절망, 비관, 추락, 억압, 박해, 혐오, 폭력, 전쟁, 학살 등이 가해지는 삶의 악조건 속에서도 사람들이 살아 숨 쉴 수 있었던 것은 다시 시작하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시작하려면, 이를 추동하는 불꽃이 필요하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욕구’이며, 강한 말로 ‘의지’라고, 예쁜 말로 ‘영감’이라고, 실용주의 구조주의적으로는 ‘목표, 목적’이고, 무서운 말로는 안하면 죽을 거 같은 ‘고통’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자신만의 불꽃을 지니고 있다. 간혹 위태롭게 꺼지려 할 때, 우리는 다른 불이 필요하다. 마치 수혈을 받듯... 


(우리는 타인이 필요하다. 나와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 


 시대의 눈보라 앞에서 시는 그저 나약한 촛불에 지나지 않는다.

(~) 시의 할 일은 눈보라 속에서도 그 불꽃을 피워 올리는 데까지다. 

잠시나마 타오르는 불꽃을 통해 시의 언어는 먼 미래의 독자에게 옮겨 붙는다.  (81p).


 위의 글은 백석이나 러시아 문인의 글에서 인용된 것이 아니다. 극중 인물 ‘리진선’이 쓴 글이니, 즉 김연수가 쓴 시일 것이다. 나는 이 페이지에서 깨달았다. 작가란 불꽃을 피우는 사람이고,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불꽃은 독자의 삶 속으로 옮겨 붙을 때, 의미를 더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변화할 수 있는 영감을 얻는다는 것을. 우리 가슴 속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말이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책을 읽고 한동안 먹먹해서 얼어버린 거 같았다. 눈이 쌓여 옴짝달싹 못하듯, 그렇게 책 속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너무 잘 쓴 글에 매료됨과 동시에 그 앞에 주눅 든 듯 감히 조금의 끄적임도 없이 한동안 쓰지 못했다. 이상하게 술만 많이 마셨다. 춥고 배고픈,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백석의 인생이 속상해서 그랬다고 하지만, 내 삶도 그렇게 제 뜻대로 되어가지 않는다는 생각에 답답했다. 

 

취기 속에서 천불을 응시하는 시인의 마음을 느끼고 싶었다. 세상 태어나 한번도 못해본  불구경이라 그 느낌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나, 아마도 숭고했으리라. 뜨겁게 번창했으리라. 벅찬 사태가 목구멍을 죄어 새로운 말들을 채웠을지도 모른다.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막 하고픈 말이 많아졌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계속되는 취기 속에서 천불을 생각했다. 


이야기 속에서 천불은 소설가가 내주지만, 삶 속에서 천불은 누가 내주나? 하늘에서? 

아니다. 나 자신이 내야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스스로 천불을 내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좋은 책들, 작품들에서 옮겨 붙은 불꽃을 다시 세상 속으로 태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내가 읽은 책들과 그 속의 맥락들, 사건들, 인물들, 그 안에서 느낀 정신들, 담담한 소감에서 나만의 오해 섞인 해석과 감격들 까지 다 용해된 하나의 비누 같은 글을 쓰고 싶다. 마음 속 어느 구석이라도 닦아 줄 수 있는 페이지를 쓰고 싶다. 

영감이란 게 뭘까? 타오르는 불꽃처럼 일어나는 거품처럼, 풍요롭게 확산되며 전달되는 에 너 지 


자아라는 아이의 작은 가슴 속 조그만 불꽃은 언제나 여전히 타고 있을 것이다. 


안 쓰는 거든,  못 쓰는 거든, 그 계절의 끝에는 쓰기의 여름이 펼쳐질 것이다. 


‘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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