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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vs 초록, 소주병 컬러 전쟁의 비밀

소주병은 어쩌다 초록색이 되었나

by 장호기

몇 달 전 '진로 이즈 백'이라는 문구를 단 소주가 새롭게 등장했다. 물론 애주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새로운 제조 공법이나 신선한 재료가 탄생한 것은 아니다. 그저 1970 ~ 80년대를 지배했던 '두꺼비' 이미지를 다시 내세웠고, 당시 스타일 그대로 푸른빛이 감도는 투명한 소주병에 소주를 담았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투명한 소주병에 뜨거운 관심을 보내고 있다. 지난 두 달 사이에만 1000만 병도 넘게 팔렸다고 하니 나름 '대박'인 셈이다. 하지만 이 파격적인 이벤트는 예기치 않은 전쟁(?)을 불러오고 말았다. 바로 롯데주류(처음처럼)와 하이트진로(참이슬) 사이의 '소주병 전쟁'이다.


사실 이 소주병 전쟁은 좀 독특하다. 이유는 소주의 재료를 두고 일어난 싸움도 아니요, 소주의 가격을 두고 벌어진 일도 아닌 '빈 소주병' 때문에 벌어진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 내막은 이렇다. 지난 2009년 국내 소주 제조 업체들은 '소주 공병 공용화 자발적 협약'을 맺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그 내용은 간단하다. 업체들 모두 ‘360ml 용량의 초록색 소주병’을 표준 용기로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협약이다. 소주병은 각 회사의 중요한 마케팅 수단이자 고유한 상징이었을 텐데 왜 이런 '통일'이 필요했던 것일까? 이유는 바로 빈 소주병 재활용 문제 때문이었다.


이 독특한 협약이 있기 전까지 소주 제조업체들은 각자 다른 형태의 소주병에 소주를 담아냈었다. 하지만 여기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빈 소주병을 재활용하기가 너무 번거로웠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각 제조업체별로 분류되지 않은 수백만 병의 소주병들이 다시 수거되는데, 이 병들 중에 어떤 것이 자기 회사의 것인지 또 상태가 양호한 것은 어떤 것인지 일일이 확인하기가 매우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점 한 가지 더. 왜 이토록 소주 회사들이 빈 소주병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소주 원가에서 새 소주병이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30%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빈 소주병을 최대한 재활용할 수 있다면 그만큼 원가를 낮출 수 있는 것이다.


빈병 선별 작업 중인 하이트진로의 공장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소주 공병 공용화 자발적 협약’이었다. 서로 약속만 잘 지킨다면 빈병을 분류하는데 드는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고 또 재사용률을 높여 환경도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좋은 취지였다. 그렇다면 왜 하필 ‘360ml 용량의 초록색 병’을 기준으로 정했을까? 이유는 당시 가장 많이 팔리던 제품이 진로의 360ml 초록색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업체들은 당시 '진로 스타일'을 따르기로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저마다 아쉬운 점들은 있었겠으나, 그것을 만회할 만큼 나쁘지 않은 협약이었던 모양이다.


실제 이 협약이 맺어진 뒤로 각 소주 제조업체들은 빈병 처리에 드는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빈병 재사용율도 70% 까지 높일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제주도의 상징 '한라산 소주'나 무학의 '좋은데이1929'를 비롯한 일부 소주들은 이 협약을 따르지 않고 각자의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다. 법적으로 강제성을 가지고 있는 협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판매된 소주병 31억 5100만 병의 97.3%인 약 30억 6700만 병은 이러한 조약을 준수해 제조됐다고 한다. 그러니 이 협약은 꽤 오랜 기간 다져진 단단한 약속이자 업체들 간의 신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호수에 돌을 던진 자가 나타난 것이다. 바로 '진로이즈백'이었다. 심지어 이 술은 아주 잘 팔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마음이 상한(?) 쪽은 당연히 롯데주류였다. 그동안 초록색 빈병을 모아 편하게 재활용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투명한 병이 끼어들어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것도 무려 수백만 병씩이나 밀려들어오고 있으니 반가울 리 없었다(빼앗긴 매출을 상징하기도 하니까). 어쨌거나 원칙대로라면 롯데주류에서 이 투명한 병들을 분류해 하이트진로 쪽에 돌려줘야 한다. 하지만 소주병 전쟁은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롯데주류 측에서 빈병 반환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 소주병을 돌려주지 않고 있는 롯데주류의 입장도 일리는 있어 보인다. 이들의 주장은 자꾸만 늘어나는 이 투명한 병들을 선별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과 수고가 드는 데다가 '소주 공병 공용화 협약'이 깨질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이트진로에서 강력히 반박하고 나섰다. 진로이즈백은 ‘뉴트로 마케팅'을 활용한 상품이기 때문에 초록색 표준 용기를 사용하면 그 의미가 퇴색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이트진로에서는 롯데주류에서 생산하는 '청하' 빈병(표준 용기와 다른 형)을 선별해 돌려주고 있기 때문에 거꾸로 ‘진로이즈백'도 다시 돌려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듣고 보면 이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이 두 업체는 팽팽히 맞서며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환경부까지 나서고 있지만 이 빈 소주병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롯데주류의 창고에는 투명한 진로이즈백 빈병이 수북하게 쌓이고 있는데 이렇게 쌓인 병들이 어느새 350만 병도 넘는다고 한다.


롯데주류 창고에 가득 쌓여있는 ‘진로이즈백’ 빈 병

그런데 여기서 다시 궁금한 점 한 가지 더. 하이트진로의 주장에 따르면 원래 잘 나갔던, 그러니까 그들이 지금 다시 소환하고 있는 과거(70~80년대)의 영광은 '투명한 병'에 담긴 소주였다는 얘기가 된다. 딱 지금의 '진로이즈백' 같은 소주병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초록색 소주병이 대세가 된 것일까? 그리고 왜 투명한 소주병들은 사라지게 된 것일까?


사실 '공병 공용화 협약' 이전 각 업체들은 제각기 다른 병에 소주를 담아 팔고 있었지만 대세는 투명한 병이었다. 그리고 업계의 선두주자는 단연 '진로'였다. 하지만 1994년. 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자가 나타났으니 그들은 바로 '두산경월'이었다. 두산경월은 1993년에 두산이 강원도 강릉의 '경월소주'를 인수하면서 탄생한 새로운 업체였다. 그런데 이 업체는 투명하고 개성 없는 소주병들이 지배하고 있는 이 바닥을 뒤흔들기 위해 아주 신선한 제품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대성공을 거뒀다. 그 주인공은 바로 1994년 1월에 혜성처럼 등장한 '그린소주'였다.



그린소주는 부드럽고 깨끗한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파격적으로 초록색병을 선택했다. 이름부터 '그린'소주니 제법 확실한 콘셉트였다. 그리고 당시 잘 나가던 독고영재를 캐스팅하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도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무섭게 팔리던 그린소주는 출시 직후 '진로'를 위협하더니 4년 만에 1400만 상자를 팔아치우며 단일 브랜드 판매액 기준 수도권 1위를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그린소주는 전 세계 30개국에 수출되기도 했는데 그 액수만 약 2천만 달러에 달했다. 그야말로 '대박'이자 '그린 신드롬'이었다.


그러자 소주 업계에는 비상이 걸렸다. 초록색병으로 바꾼다 한들 이렇게까지 잘 팔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유리병 공장에서 막 만들어낸 소주병은 원래 초록색이기 때문에 사실 초록색병이 투명한 병 보다 제조 원가가 더 낮았다(소주병을 푸르스름하고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염료를 추가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니 이보다 더 좋은 색이 있을까? 결국 업체들은 모두 비슷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너도 나도 초록색병에 소주를 담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업계 선두 자리를 위협받던 진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국내 소주 업계에는 초록색 소주병이 대세로 떠올랐고, '소주병은 초록색'이라는 이미지가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그 후 1998년 10월 19일. 진로는 지금의 '참이슬'이 된 '참진이슬로(참眞이슬露)' 소주를 초록색 병에 담아 세상에 내놨다. 그리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2009년. 이 소주병이 대한민국 표준 소주 용기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당시 그린소주로 소주 업계의 판도를 뒤흔들었던 '두산경월'이 2009년 롯데에 매각되며 지금의 롯데주류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특이한 소주병'으로 재미를 봤던 업체가 지금은 반대의 입장에 놓여있는 셈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투명한 병만 가득하던 과거에는 초록색 병이 인기를 끌더니, 이제 초록색 병이 넘쳐나자 다시 투명한 병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 이 돌고 도는 소주병 컬러 전쟁은 꽤 흥미로운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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