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들을 위한 지옥 안내서, <신과 함께>vs<신곡>
* 영화 <신과 함께>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파'라는 비판도 쏟아지고 있긴 하지만 영화 <신과 함께>는 동명의 원작 웹툰을 과감하게 각색하여 스토리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고 이를 뒷받침하고도 남을 수준급 CG 효과를 통해 원작보다 참혹한 지옥 여행을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원작자인 주호민 작가가 독자들의 상상에 맡겨두었던 지옥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을 생생하게 스크린으로 옮겨놓았다.
사실 원작 웹툰에 그려진 이미지들만 가지고는 인물들의 지옥 체험 과정과 디테일한 지옥의 모습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영화를 연출한 김용화 감독은, 지옥을 구체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참고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신곡>은 서양 문화와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불교와 한국의 토속 신앙을 근간으로 하는 <신과 함께>를 영화화하는 작업에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한다.
* 13세기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신앙인인 알리기에리 단테가 쓴 <신곡>은 주인공인 단테가 로마의 시인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따라 지옥과 연옥(지옥과 천국의 중간 단계, 정죄의 공간)을 지나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상상의 답사기이며 그가 존경하고 흠모하는 여인 '베아트리체'를 만나기 위해 천국으로 오르는 이야기를 담은 장편 서사시다.
하지만 <신곡>은 명실상부 지옥 안내서의 고전이자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과 함께>와 비슷한 듯 또 매우 다르게 '지옥'을 묘사하고 있다. 쉽게 손이 가는 책은 아니지만 <신곡>을 통해 불교 사상이 아닌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또 다른 지옥, <신과 함께>와는 다른 세계를 체험해 볼 수 있다.
1. <신과 함께> vs <신곡> : 지옥 여행
두 작품 속 지옥은 각각 완전히 다른 사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그 구조가 다르지만 내부의 참혹한 분위기는 서로 닮았다. 먼저 주호민 작가가 그린 <신과 함께>의 지옥은 불교와 한국의 토속신앙을 바탕으로 하는데, <신과 함께> 책 뒷부분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10명의 왕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불설예수시왕생칠경"이 원작의 기둥이 된다.
이에 따르면 지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인 남섬부주의 지하에 위치해 있다고 전해지며, 경전마다 다르긴 하지만 10개의 지옥이 다음과 같은 순서대로 이루어져 있다.
제 1 지옥 : 진광대왕의 도산(刀山)지옥
제 2 지옥 : 초강대왕의 화탕(火湯)지옥
제 3 지옥 : 송제대왕의 한빙(寒氷)지옥
제 4 지옥 : 오관대왕의 검수(劍樹)지옥
제 5 지옥 : 염라대왕의 발설(拔舌)지옥
제 6 지옥 : 변성대왕의 독사(毒蛇)지옥
제 7 지옥 : 태산대왕의 거해(鋸骸)지옥
제 8 지옥 : 평등대왕의 철상(鐵床)지옥
제 9 지옥 : 도시대왕의 풍도(風塗)지옥
제 10 지옥 : 오도전륜대왕의 흑암(黑闇)지옥
망자는 10개의 지옥을 지나는 동안 총 두 번 환생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중 첫 번 째는 죽은 지 49일째가 되는 제 7 거해지옥에서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는 제 10 흑암지옥에서 잡을 수 있다.
먼저 거해지옥을 관장하는 태산대왕은 주로 음식이나 쌀을 속여파는 사기꾼들을 심판하는데, 죄가 있는 경우에는 큰 톱과 작은 톱으로 토막토막 분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만약 이 곳에서 태산대왕의 심판을 통과하게 된다면 망자는 6개의 문 앞에 설 수 있게 된다.
6개의 문은 각각 천상문, 인간문, 축생문, 아귀문, 아수라문, 지옥문이다. 축생문까지는 그래도 환생을 하게 되는 처지니 괜찮은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아귀문부터는 말 그대로 굶주림과 귀신들에 의해 또다시 끊임없는 고통을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죽은 뒤 49일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망자를 위해 49재를 지내는 이유 중 하나다.
다행히(?) <신과 함께>에서는 주인공 자홍이 죽은 후 49일째의 심판을 무사히 통과하여 환생의 문을 지나기 때문에 제 7 지옥 까지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또 영화에서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를 심판하는 제 5 발설지옥을 맨 마지막 단계에 배치시키며 자홍과 어머니의 스토리를 부각하는 극적인 효과를 더했다. 제 5 지옥은 그 유명한 염라대왕이 관장하는데 영화에서는 이정재가 그 역할을 맡아 자신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반면 <신곡>에서는 본격적인 지옥에 이르기 전에 '지옥의 안뜰'에 해당되는 개념이 존재하는데 이곳에는 태만한 삶을 살았던 자들이 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을 위한 일에만 몰두했던 자들로 세상의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그들은 이 곳에서 파리와 벌 떼에 시달리고 있다.
이 곳을 지나면 '아케론 강'이 나타나는데 이 강을 지나고 나면 비로소 아홉 개의 원으로 이루어진 지옥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 이곳 지옥의 입구에는 유명한 글귀가 쓰여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희망을 버릴지어다"
[지옥편] 3곡 9행
먼저 제 1원에는 세례를 받지 못한 채 죽은 아이들의 영혼과 그리스도 이전의 위대한 시인과 철인들의 영혼이 떠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지 못한 상태로 죽었으나 생전에 선행을 행한 자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 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게 되지는 않지만 하느님을 알고자 갈망한다 한들 이 갈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이 구간을 벗어날 수 없다.
본격적인 지옥은 제 2원부터다. 제 2원의 문턱에는 크레타 섬의 전설적인 왕이며, 막강한 함대를 이끌고 아테네를 정복한 '미노스'가 기다리고 있다. 그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반인반수 괴물인 미노타우로스에게 제물로 바친 무시무시한 인물이다. 그의 뒤편 제 2원에서는 애욕의 죄를 범한 자들의 영혼이 고통받고 있다. 죄를 지은 영혼들은 불교 사상의 지옥에서와 마찬가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의 고통을 받게 된다.
이어지는 제 3원은 탐욕가들, 제 4원은 낭비를 하거나 인색했던 자들, 제 5원은 분노한 자들, 제 6원은 이교도들, 제 7원은 폭력을 사용해 죄를 지은 자들, 제 8원은 사기꾼들 그리고 제 9원은 배반자들의 영혼이 극도로 끔찍한 형벌을 받으며 고통받고 있다. 다만 매 지옥마다 말 그대로 '지옥'을 겪어야 했던 망자 김자홍과 달리 <신곡>의 단테는 여행자의 신분이기 때문에 벌을 받는 영혼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 옆을 지나간다.
끝으로 모든 원의 중심이자 지옥에서 가장 깊은 곳에는 지옥의 마왕인 루시퍼가 있다. 그는 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입도 세 개다. 각각의 입에는 유다(예수를 배반한 죄)와 브루투스, 카시우스(카이사르를 배반한 죄)가 물려 있고 루시퍼는 이들의 영혼을 잔혹하게 물어뜯고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럽게 벌을 받고 있는 자는 유다인데 '등 껍데기가 홀랑 벗겨진 채 남아 있었다. 그의 대가리는 안으로 다리는 밖으로 나와 있었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단테는 3일간의 '지옥' 답사를 마치고 다시 3일에 걸쳐 정죄와 희망의 왕국인 '연옥'을 지난다. 그리고 그 끝에 '천국'에 다다른다. <신과 함께> 김자홍의 지옥 여행이 49일이었다면 단테의 여정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딱 7일이다.
만약 김자홍이 일곱 번째 지옥에서 심판을 통과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음 지옥으로 떠돌아야 했다면, 그가 만났을 마지막 제 10 지옥은 '오도전륜대왕'이 관장하는 흑암(黑闇) 지옥이다. 이 곳이 바로 죽은 지 무려 3년이 지나고 나서야 심판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흑암지옥은 인간세상에서 남녀 구별을 못하고 자식 하나 보지 못한 죄인을 벌주는 곳인데 죄인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끔찍한 지옥에 갇히게 된다. 어찌 보면 이 흑암지옥은 칠흑 같이 어두운 루시퍼의 입속에 머리를 처박혀야 하는 <신곡>의 마지막 지옥과 닮았다.
2. <신과 함께> vs <신곡> : 지옥의 안내자
무시무시한 지옥이지만 <신과 함께>의 자홍과 <신곡>의 단테에게는 든든한 '지옥 안내자'가 있다.
먼저 자홍을 도운 강림, 덕춘, 해원맥은 원작보다 적극적으로 자홍을 돕는다. 그 이유는 염라대왕에게 천년 동안 49명의 망자를 환생시키면 자신들 역시 인간으로 환생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원작에는 없는 전혀 새로운 설정이다. 하지만 이 과감한 각색 덕분인지 자홍을 환생시키기 위한 삼차사들의 고군분투는 더 큰 설득력을 갖추게 되었고, 자홍과 삼차사들 사이에는 더 끈끈한 '동맹관계'가 생기게 되었다.
반면 <신곡>의 베르길리우스는 지옥 체험 중 혼절하기 까지 하는 단테를 묵묵히 이끌며 천국을 향해 나아가지만 정작 본인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채 죽었기 때문에 지옥의 제 1원인 '림보'에 머물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환생을 눈앞에 둔 영화 <심과 함께>의 삼차사들 보다는 원작의 삼차사들과 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베르길리우스는 단테가 이미 예전부터 존경하던 시인이었고, 지옥과 연옥을 지나면서 단테에게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며 더 큰 존경을 받게 된다. 따라서 이 둘은 자홍과 삼차사들과 같은 일종의 동맹관계라기보다는 사제관계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3. <신과 함께> vs <신곡> : 어느 소중한 여인
영화 <신과 함께>는 원작의 사상관을 충실히 재연해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감한 각색을 통해 스토리의 중요 부분을 완전히 다르게 풀어나갔다. 그중 가장 극적인 부분으로는 원귀와 원귀의 어머니를 자홍과 가족관계로 엮으면서 영화 전체를 가족애와 효도의 감정선으로 이어나갔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신파'라는 비판을 받게 된 결정적인 요소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영화에서 자홍은 어머니를 다시 만나기 위해 더욱 간절히 지옥을 헤처 나가게 되었다. 그러니 관객들은 그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게 되고 또 그에게 깊이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설정은 <신곡>의 단테와 '베아트리체'를 떠올리게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신곡>은 단테가 자신이 흠모하고 존경하는 대상인 '베아트리체'를 만나기 위해 지옥을 통과하여 천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단테는 지옥의 다음 단계인 연옥의 끝에서 그를 안내해주던 베르길리우스를 떠나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그리고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천국으로 오른다.
물론 단테의 사랑과 자홍의 사랑은 그 결이 다르다. 하지만 존경하고 사랑하는 우상으로서의 여성이 지옥길에서 등대 역할이 되어준다는 점은 어느 정도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집을 나간 자홍이 시장 골목 어귀에서 몰래 어머니를 바라보던 장면은 영국의 화가 헨리 홀리데이의 작품과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을 전한다.
또한 <신곡> 중 [천국편]에는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바치는 시구가 있다. 다시 읽어 보면, 환생의 문 앞에 섰던 자홍이 그의 어머니에게 들려줬음직하다.
오, 여인이시여. 그대 안에 내 희망이 힘을 얻고
그대 나의 구원을 위해 저 지옥 속에
발자취를 남기시는 괴로움을 겪으셨습니다.
내 보아 왔던 그 많고도 많은 것들을
그대의 힘이며 그대의 선에서 온
은혜와 덕으로 나 이제 받아들입니다.
그 모든 길과 그 모든 방법으로써
나를 속박에서 자유로 이끄신 그대,
모든 것을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
그대의 너그러움을 내 안에 간직하시어
그대가 건강히 치유해 준 나의 영혼이 그대의
뜻을 따라 육체에서 풀려나게 하소서
[천국편] 제31곡 79~90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