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에서 '관부재판' 읽기
영화는 국가가 범한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서 꽃다운 인생을 짓밟힌 작은 개인들이 또다시 거대한 상대와 마주하게 되는 긴 여정을 담고 있다. 왜 이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직접 나서야만 했는가 그리고 왜 국가를 대표해야만 했는가?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영화가 끝난 한참 뒤에도 관객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관객들은 그저 묵묵히 앉아있는 것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다독일 뿐이었다.
그럭저럭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극의 역사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특별히 모르는 부분은 없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가 털어놓는 '위안부' 문제의 실체는, 이것이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감한 적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음을 새삼 느끼게 한다. 그리고 단순 '위안부 영화'라고 정의해버리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도피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영화에 이토록 묵직한 무게가 실릴 수 있었던 것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대배우들의 호소력 짙은 연기 덕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허스토리>는 실화인 '관부재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영화는 더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많은 부분을 각색하기도 했다. 결국 <허스토리>는 4명의 국가대표 할머니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일제에 짓밟힌 수많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로 다시 태어난 셈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그리고 영화를 본 뒤에도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들 그리고 영화와는 조금 다른 관부재판의 진실 5가지를 정리했다.
<허스토리>에서 '관부재판'을 가능하게 했던 인물은 배우 김희애가 연기한 문정숙 사장이다. 그녀는 여행사를 운영하며 위안부 문제를 접하게 되고, 정당한 보상과 사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사비로 피해자들의 재판을 돕는다. 뿐만 아니라 재판장에서는 할머니들의 참혹한 이야기를 직접 통역하며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한국에 널리 알리게 되는 일등 공신이 된다. 그렇다면 실제 문정숙 사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문정숙 사장의 실제 주인공은 '김문숙'회장으로 영화 속 문정숙 사장과는 비슷한 점이 많다. 실제 김문숙 회장은 영화에서처럼 1960년대부터 '아리랑 관광여행사'를 운영했고 '부산여성경제인협회' 회장, '부산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1989년에는 부산에서 최초로 '여성의 전화'를 설립하여 폭력 피해 여성들을 상담하고 문제 해결을 도왔으며 이후 '부산여성폭력 예방 상담소'를 설립하는 등 여성 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독도지킴이 운동본부' 상임 공동대표와 '부산여성수필문인협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김문숙 회장이 위안부 문제를 알게 된 과정은 영화와는 조금 다르다. 1990년 당시 김문숙 회장은 일본 관광객들이 한국에 '기생관광'을 온다는 사실을 알고 분개했다. 그래서 김 회장은 여성단체와 함께 공항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기생관광을 오는 일본 관광객들에게 항의했다. 그때 어떤 일본인이 김문숙 회장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던졌다. 한국 여자들은 '중일 전쟁'때부터 자발적으로 매춘을 했는데 왜 이제와서는 반대를 하느냐는 내용이었다.
이 충격적인 일화를 통해 위안부에 대해 알게 된 김 회장은 직접 수소문을 하며 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1991년에는 사단법인 '정신대문제대책부산협의회'를 설립하고 정신대 피해자들을 위한 신고전화를 설치했다. 영화 속 문정숙 사장이 집안일을 돌봐주던 할머니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거나, 여행사를 통해 '기생관광'에 개입된 것과는 매우 다른 지점이다.
현재 김문숙 회장은 부산 수영구 연수로의 한 작은 건물에서 사비를 털어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 곳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다양한 기록물들이 빼곡하게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김문숙 회장은 현재 경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어 폐관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국가의 지원과 관심이 부족한 까닭이다. 또한 김문숙 회장은 한국과 중국, 일본, 타이완 등 9개국 공동으로 일본군 위안부 자료를 취합하고 있다. 그들의 만행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역시 막대한 유네스코 분담금을 지불하고 있는 일본의 반대에 막혀 쉽지 않은 상태다. 김문숙 회장은 지금도 외롭게 국가를 대표하고 있다.
1991년 10월에서 12월까지, 김문숙 회장이 설립한 부산정신대대책협의회에 신고한 사람은 총 8명이었다. 부산 거주자 5명에 경북 2명 그리고 전북에서 1명이었다. 이들 중 하순녀, 박두리, 유찬이, 박소득 총 네 명의 할머니들만이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야마구찌 지방재판소 시모노세키 지부에 제소한 이른바 '국가대표 할머니'들이다. '위안부' 2명에 '근로정신대'가 2명이었으며 제소 날짜는 1992년 12월 25일이었다.
관부재판(시모노세키의 한자명 하관(下関) 그리고 부산에서 한 글자씩 따서 관부)으로 잘 알려진 이 소송의 정식 명칭은 "부산 위안부, 근로정신대 대일 사죄와 배상 청구 소송"이다. 최초 원고는 4명이었으나 이후 위안부 피해자 1명과 근로정신대 피해자 5명이 더해져 총 10명이 되었다. 할머니들은 98년 4월까지 약 7년 동안 이어진 21차의 공판 끝에 1심 판결을 받을 수 있었다. 일본 정부가 30만 엔을 지불하라는 내용을 포함, 최초의 일부 승소 판결이었다.
많은 부분이 각색되기도 했지만 이름만으로도 설명이 충분한 대배우들이(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이 네 분의 할머니 역을 맡았다. 캐스팅만으로도 이미 큰 화제가 되었던 만큼 배우들은 담담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비통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전하고 또 기록했다. 과거 비극적인 사실에 대한 재연이 없는 영화이기 때문에 메시지 전달에 있어 더 큰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배우들은 기대만큼의 묵직한 연기를 보여주며 고통의 역사를 시각화했다.
실제 할머니들이 참석한 재판에는 45개의 방청석을 구하기 위해 100여 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들었다. 대부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등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인 동시에 외국인이었던 할머니들이 이런 상황을 견뎌내기란 쉽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재판을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 박두리 할머니는 재판 중 울분을 토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9개월이나 기다린 끝에 열린 재판이 단 5분의 진술만으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박두리 할머니에게는 검사들을 마주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일제시대와 일본군들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검사들의 목을 졸라주고 싶었다”고도 말했다.
1993년 9월 6일 월요일 오후 1시 30분. 긴 기다림 끝에 제 1회 구두변론이 열렸다. 이 변론에는 3명의 판사와 4명의 원고(하순녀, 박두리, 유찬이, 박소득 할머니), 보좌인이었던 김문숙 회장과 3명의 변호사 그리고 피고 대리인으로 일본 법무성에서 2명, 외무성에서 2명, 히로시마 고검 검사 6명이 배석했다. 여기에 더해 방청인 45명에 보도 관계자도 10여 명이 배석했다. 다음은 실제 원고 의견 진술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하순녀 할머니
"올해 74세가 됩니다. 이름은 하순녀입니다. 19세 때 어떤 일본 사람이 돈벌이가 잘 된다고 하여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가 종전 뒤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군인들의 상대를 거부하다가 심하게 맞았습니다. 머리에 상처가 있고 비 오는 날에는 지금도 많이 아픕니다. 너무 비참하게 살고 있어요. 재판으로 잃어버린 나의 인생에 대해서 하루라도 빨리 보상해주시오. 결혼도 못했고 아이도 없어요. 재판이 살아있는 동안에 끝이 날까요 알려주세요."
박두리 할머니
"나이는 71세 이름은 박두리입니다. 위안부에 끌려가서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비참했는데 전쟁이 끝나고 생활은 더 비참했습니다. 그저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 위안부 시절의 생활은 1년 이야기해도 못 다합니다. 그 고통의 생활은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배고프고 얻어맞는 성노예의 생활을 여기서 다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17세 때 일본인이 '공장에 안 갈래?' 해서 따라갔습니다. 뱃멀미를 일주일 죽은 듯하고 있었더니 위안소에 넣어졌습니다. 일본 정부가 1억의 몇십 배를 주어도 이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일본인들이 나를 이 꼴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일본인들을 보고 있으니까 또 나를 비참하게 만들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3년이 지난 지금 재판이 시작됐는데 우리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내가 고생한 것은 일본 전부를 준다 해도 싫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 달라는 것만이 소원입니다."
박소득 할머니
“ 65세입니다. 박소득입니다. 14세 때 학교 선생의 강한 권유로 여자정신대에 지원했습니다. 그것이 일본에 대한 충성이라는 가르침으로 도야마의 후지코시 공장에 갔습니다. 처음에 공장에 가라고 했을 때는 공부도 시켜준다고 하며 돌아와도 된다는 선생님의 말을 믿고 아무 의심 없이 공장으로 갔습니다.
온종일 일하는 고생의 생활이었습니다. 밥을 너무 적게 주어서 언제나 배고팠고 월급은 한 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공부시켜준다는데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일뿐이고 공부는 시켜주지 않았습니다. 손끝이 날아간 사고로 추웠던 도야마의 겨울은 고생의 연속이었습니다. 단지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엄마가 있는 집에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견디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지도 돈벌이도 안됐습니다.
작년 12월 시모노세키에 왔을 때 시모노세키항에 가봤습니다. 14살의 단발머리가 왔던 이곳에 50년 후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서 또다시 올 줄 몰랐습니다. 너무나 슬퍼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울던 일, 고된 일에 시달린 슬픔은 지금도 생각납니다."
유찬이 할머니
“이름은 유찬이 입니다. 66세입니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과 면사무소의 직원이 와서 애국하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면 돈도 벌고 좋다고 해서 집이 가난했던 탓으로 그 말만 믿고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따라갔습니다. 도야마의 후지코시 공장에 도착해서 보니 일본 청년들이 선반을 깎고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했습니다. 배가 고파서 울고 있었습니다.
후지코시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여자정신대 노래를 불렀습니다. 제일 괴로웠던 일은 너무 배가 고파서 아무 풀이나 뜯어먹어서 배탈이 난 일입니다. 공습과 격심한 노동에 미쳐버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일 괴로웠던 것은 배고픈 일이었습니다. 1년 반 일했는데 10원도 받지 못했습니다.
카네무라라는 여자가 만든 정신대 노래를 모두 같이 불렀습니다."
"도야마 올 때는 신났다. 하룻밤 지나고는 슬퍼졌다. 언제나 이 공장을 떠나겠나, 언제나 후지꼬시를 떠나겠나, 아- 남몰래 눈물 흘린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피해자는 약 20만 명 정도로 파악되었고 그중 3분의 2 정도가 전쟁 중 사망 또는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중 불과 238명만이 정부에 피해자로 공식 등록했으며, 2018년 6월 현재 생존 피해자들은 28명이다.
일본은 일본군의 성적 위안을 목적으로 위안부 여성을 군대의 관리하에 두고 병사 와의 성적행위를 강요했다.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 군인 혹은 경찰이 직접 연행하거나 군이 위탁한 업자가 모집했으며, 조선총독부가 행정조직을 이용하거나 유괴 또는 폭력을 사용하여 강제 연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황이 불리해진 1942년 후반부터는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경찰이 지구별로 위안부 수를 할당하기까지 했는데, 이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연행하였고 무기와 탄약 등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배에 여성들을 태워 이송시켰다.
위안소는 보통 일본군이 직접 운영하거나 업자에게 위탁하여 관리하였다. 위안소에서는 대개 병사가 9~17시, 하사관이 18~20시, 장교는 20~22시, 그 이후는 숙박으로 정해져 있었다. 공휴일은 한 달에 한 번이었다. 하지만 공휴일에는 학과라는 명목으로 매춘의 중요성 등에 대한 훈시가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제일 많은 수입을 올린 위안부에 대한 표창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돈을 받지 못했다.
일본은 병사들이 성병에 걸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위안부들을 검사하여 성병을 치료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위안부들은 매일 몇십 명의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만성 성병을 앓기 일수였고,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이나 마약에 빠지기도 했으며 자살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종전 전 후의 일본군은 위안부들에게 자살을 강요하거나 현지에 방치하는 등 군수품과 동일한 취급을 했다.
<허스토리>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들이 또 있는데 그들은 바로 할머니들의 법정 대리인이었던 변호사들이다. 놀라웠던 점은 이들이 재일교포와 일본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국내의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내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들의 관심과 도움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다면 할머니들과 이들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91년 12월, 당시 '서울 태평양전쟁 유족회'의 사죄 소송이 시작되었고 이후 '광주 유족회'가 서울과 별도로 소송을 진행하게 되면서 그 변호단이 내한하게 되었다. 이때 이 소식을 들은 김문숙 회장이 위안부 관련 문제를 상담해보기 위해 변호사들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그 변호사들이 바로 야마모도씨, 야마자끼씨, 이박성씨 등이다. 그들은 부산에서 할머니들과 3차례 면담을 했고 소송을 결정했다. 당시 할머니들이 연세도 있으신 데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참한 일들이었기 때문에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 정부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피해자들에게 일시급 5백만 원에 생활비 15만 원을 지급하기로 결정된 상황이었지만 이조차 제대로 지급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음은 이박성 원고 대리인의 의견 진술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우리 원고 대리인으로서는 반세기 동안 법치국가를 선택해온 일본에 원고들의 인권 회복을 위한 법규범이 존재해 온 것을 믿고, 원고들의 청을 지지해줄 법규범이 어둠 속에서 빛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화를 유지하고 전제와 노예, 압박과 편협을 지상에서 영원히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국제사회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선언을 하고 있는 일본에서 원고들의 짓밟힌 인권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이 과연 있어서 되겠습니까. 죽음과 치욕스러운 침묵만 있었을 뿐 원고들이 경험한 사실은 지금까지 표면으로 내놓고 문제 삼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원고들이 침묵을 깨고 외치고 나온 이상 이제는 과거의 일로 지워버릴 수는 없습니다. 지워버리다니, 지금 이렇게 실존하는 인간의 절규로서 우리들의 귀에 또 마음에 확실하게 새겨졌습니다. 법이란 것이 이러한 인간의 절규에 대해 어떠한 구제의 방법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 변호사 이박성
또 <허스토리>에서는 서귀순 할머니(문숙 역)에게 근로 정신대를 권유했던 '일본인 선생님'이 증인으로 등장하는 극적인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실제 주인공인 박소득 할머니에게 정신대를 권했던 학교 선생님은 박소득 할머니가 6학년일 때 담임이었던 '모리야'씨로 재판 당시에는 이미 고인이었다. 그렇다면 관부재판 제 18회 구두변론에 증인으로 참석했던 실제 인물은 누구였을까? 그 주인공은 '스기야마 도미'씨로 박소득 할머니가 4학년 때 담임이었던 인물이자 모리야 선생님의 동료 교사였다.
진술에 따르면, 마음 한편에 죄책감을 느끼며 살고 있었던 스기야마 선생은 지인을 통해 관부 재판에 대해 알게 되었고 재판 중 본인의 이름이 거론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스기야마 선생은 전화번호를 수소문하는 등 적극적으로 박소득 할머니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 결과 93년 4월 17일 후쿠오카에서 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회가 개최되고 그 결성 집회에 박소득 할머니가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스기야마 선생은 몇 차례 연락 시도 끝에 공항으로 찾아가 박소득 할머니와 눈물의 상봉을 했다. 49년 만에 이루어진 눈물의 재회였고, 그 날로부터 4년 후 스기야마 선생의 증인 심문 신청이 겨우 통과되면서 구두변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정숙 사장의 간절한 설득 끝에 증언을 하게 된 영화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다.
스기야마 도미 선생은 4학년이었던 박소득 할머니가 귀여운 단발머리의 소녀였다고 또렷하게 기억했다. 또 학교(경상북도 달성 국민학교)에서는 여기가 일본 나라이며 모두가 일본인이라고 인식시키고 천황에게 충성하겠다는 노래를 매일 부르게 했다고 말했다. 또한 주로 남자 선생님들이 졸업생들의 집을 찾아가 근로 정신대를 권유했고 매우 명예롭고 훌륭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했었다고 말했다.
관부재판의 결과는 길고 긴 투쟁 끝 최초의 일부 승소라는 값진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원고의 청구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소장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국회 및 국제연합총회에서 공식 사죄할 것
원고 하순녀 및 박두리 에게 각 1억 천만 엔, 원고 유찬이 및 박소득에게 각 3천3백만 엔
또 <허스토리>의 변호사들은 '도의적 국가로서의 의무'를 주된 근거로 삼아 소송을 진행했지만 실제 원고 청구의 근거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1. 도의적 국가로서의 의무에 따른 국가배상법
2. 일본국에 의한 특별한 손실에 대한 손실 배상
3. 전후 국회가 사죄 배상을 하기 위한 입법을 하지 않고 방치한 것은 헌법이 정한 입법 의무를 게을리한 것.
사실 '도의적 국가로서의 의무'라는 것은 다소 추상적이고 그 근거가 미약했다고 볼 수 도 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강제 노동에 대한 조약(ILO 29호 조약)'을 근거로 하더라도 일본군이 위안부들에게 저질렀던 만행은 명백한 위법 행위였다. 이유는
1. 지원자가 아닌 외국인을 강제 동원했다는 점
2. 강제 노동은 60일을 초과할 수 없고, 초과 시 반드시 본인의 동의를 얻었어야 했다는 점
3. 노동자를 무사히 귀환시켜야 할 의무를 어겼다는 점
그럼에도 재판부는 원고들의 요구를 대부분 무시하고 30만 엔의 금전 보상만 인정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원고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진심이 담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였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원고들이 금전적인 보상을 위해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1995년 7월 18일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 발족하고, 보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민간 기금을 모집했다. 결과적으로 사과와 보상은 하되 교묘히 책임은 회피하고자 했던 명백한 꼼수였다. 결국 국가대표 할머니들은 다시 길 위에 서게 되었다. 후원 단체들과 함께 낯선 타지에서 민간 기금 보상을 거부하는 투쟁 시위를 수차례 열어야 했다. 이 사실만 봐도 위안부 문제가 합의와 보상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1991년 준비 단계부터 시작해 1998년 1심 판결을 받을 때까지. 길고도 길었던 관부 재판은 일부 승소의 기쁨보다는 또 다른 고통만 가득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들의 눈물겨운 작은 승리에만 주목하는 것이 사실이다. 진짜 주인공이어야 했을 일본과 한국의 정부는 대체 어디 있었는가? 다음은 관부재판의 판결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우리가 관부재판을 '일부 승소한 의미 있는 재판'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담겨있다.
1. 증거에 따라 사실을 검토하니 종군 위안부 제도는 철저한 여성차별, 민족차별로, 여성의 인격과 존엄을 근본적으로 침해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은 것으로 일본 헌법 13조가 인정한 근간적 가치에 관한 기본적 인권의 침해를 보이지만 그것으로 일본국 헌법 제정 전의 사건이므로 즉시로 동 헌법에 따른 현재의 의무로서 배상 입법의 의무를 도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법의 해석 원리로써 또는 조리로서 선행법의 침해에 기본을 둔 그 후의 보호 의무를 법적 침해자에게 부과할 것을 허용되어 있어, 그 법에 따르면 제국 일본과 동일성인 국가인 피고 국은 종군위안부로 강요된 여성에 대하여 보다 더한 피해의 증대를 가져오지 않게 배려, 보증해야 할 법적 작위의 의무가 있었는데 다년간 위안부들을 방치하여 그 고통을 배가하여 새로운 침해를 행하였다. (중략)
피고 국은 입법부작위에 의한 국가배상으로서 위안부 원고들에 대하여 각각 금 30만 엔의 위자료 지불 의무가 있다. 그러나 공식 사죄의 의무까지는 없다.
2. 결코 정신대 원고들의 피해를 경시하지는 않지만 원고들의 피해는 이것을 방치하는 것이 일본국 헌법상 묵시할 수 없는 중대한 인권침해를 가져왔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