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데이즈

당신의 일의 무게는 무엇인가

by 골돌한돌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작년 여름, 극장가에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라는 영화가 개봉했다. 영화는 일본 시부야의 공중 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그는 매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반듯이 갠 뒤 즐비한 화분에 물을 준다. 그러고는 출근 준비를 마친 뒤 집 앞 자판기에서 음료수 한 잔을 뽑아 마시고 청소용품이 가득 담긴 작은 차에 몸을 싣는다.

히라야마의 일상은 묵묵하게 반복된다. 공원에서 우유와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성실하게 공중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이 영화를 보며 반복되는 히라야마의 일상에서 안정감과 동질감을 느꼈다. 어쩌면 그가 일을 하는 이유도 ‘일상의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을 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나 또한 일을 통해 얻는 안정감이 그 이유에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기에.


일을 한다는 건 분명 많은 장점이 있다. 생활할 수 있는 자금을 벌 수 있고, 때로 성취감이나 만족감을 느낄 수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사회의 일원으로써 책임을 다 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할 수도 있고.


하지만 일이 삶에 의미를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만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 매일 반복된다는 표현이 대게 부정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얼핏 이상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매일 할 일이 있다는 건 분명 중요하다.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으니까.


왜 매일의 일에서 안정감을 얻는가

‘노인의 4고(苦)’라는 말이 있다. 뜻 그대로 노인의 주된 4가지 괴로움이라는 건데, ‘질병’ ‘빈곤’ ‘고독’ ‘무위(無爲)’가 포함됩니다. 질병과 빈곤, 그리고 고독은 익숙한 단어다. 실제 많은 노인이 이러한 문제를 겪고 있고, 나라나 사회단체에서도 무료 급식, 독거 노인 방문 등 여러 방법을 통해 도움을 주려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단어와 달리 다소 낯선 무위란 무엇일까? 무위는 사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할 일이 없다는 게 괴롭다는 거다. 빨리 많은 돈을 벌어서 일을 그만두고 싶어하는 젊은 세대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매일 할 일이 많아서 괴로운데, 할 일이 없어서 괴롭다는 말이 공감되기 어려울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무위감은 때로 다른 3가지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괴로움을 안기기도 한다. 누군가의 하루는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지만, 때로 어떤 하루는 하루 종일 할 일이 무엇도 없어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갈 수 있는 법이다.


무위의 두려움은 모두에게 있다

이는 비단 노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취업을 하기 위해, 더 풀어 이야기하면 ‘나의 쓰임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경험이 있을 거다. 수십 번 이력서를 고쳐 쓰고, 셀 수 없을 만큼 서류 심사에서 탈락하다 몇 번, 가뭄에 콩 나듯 가득 긴장하고 면접장을 드나들고, 마침내 합격 통보를 받고 회사에 첫 발을 내 디딘 경험 말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메슬로는 ‘인간의 기본 5대 욕구’를 정의하며 생존의 가장 기본이 되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 욕구를 지나 3단계에 ‘소속과 애정 욕구’를 배치했다. 그의 풀이처럼 우리는 모두 이미 사회의 일원으로 소속되기 위해 고군분투한 셈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사회의 일원이 됨으로써 무위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쓴 거다.


그러나, 감당할 수 있는 무게로

다시 한 번 퍼펙트 데이즈 속 히라야마의 삶을 떠올려보자. 맡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차를 타고시부야 일대를 돌며 여러 공중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하다 보면 해가 기울기 시작한다. 퇴근하면 자전거를 타고 근처 단골 가게에 가서 저녁밥을 먹고, 집에 돌아와 자기 전에는 독서를 한다. 주말이면 목욕탕에 가고, 때로 책을 다 읽으면 작은 서점에 들러 흥미가 가는 책을 사기도 한다.


히라야마의 삶은 관찰만으로도 안정감을 준다. 가득 찬 기분이 든다. 무위감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관찰자가 느끼는 감정은 당사자인 히라야마도 느낄 거다. 매일 하루가 꽉 채워진 기분이 들 것이다. 만약 그의 하루가 아침에 일어나 온종일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면 그를 관찰하는 우리도 불안하고 괴로웠을 거다.


한 가지 중요한 건 이렇듯 무위에 늪에 빠지지 않게 해주는 일이라는 건 ‘매일 감당할 수 있는 무게’여야 한다는 점이다. 히라야마는 일에서 만족을 얻고, 일이 끝나면 단골 식당에 들러 밥을 먹고 좋아하는 책을 읽을 시간과 육체의 여유가 있다.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의 일이기에 매일 반복할 수 있고, 무위에 빠지지 않고 살아갈 동력을 얻을 수 있다.


당신의 무게는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특히 젊은 이들이 이러한 무게를 간과하고 살아간다. 한 가정의 가장이라면 그 무게를 알면서도 무리해 지탱할 수밖에 없을 수 있지만, 히라야마처럼 스스로를 책임지는 데 국한된다면 한 번 지금 지고 있는 무게가 무위에 빠지지 않을 동력을 주는 무게인지, 아니면 버겁게 지탱하다 무너져 자칫 무위의 늪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될 무게인가를 가늠해야 한다.


작년 통계청에 따르면 3년 이상 취업하지 않은 청년 중 직업 교육을 받거나 취업 준비를 하지 않고 완전히 취업 전선에서 물어난 청년의 수는 약 8만 명에 달했다. 반대로 유튜브에 ‘2교대 생산직’ 등 키워드를 검색하면 새벽같이 일어나 밤까지 일하는 청년들의 모습 또한 수두룩하게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어째서인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같은 무게감을 느끼고 있다고 느껴진다. 2023년에도 연간 1874시간의 노동시간으로 OECD 평균보다 130시간 가량 많은 시간을 일하는 강도 높은 근무 환경의 무게 말이다.


오늘 아침도 출근해 저녁 해가 지고 퇴근하는 우리는 어떤 무게를 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가 맨 일의 무게는 과연 물레방아를 움직이는 물의 낙차처럼, ‘퍼펙트 데이즈’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동력일지, 아니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무위의 늪에 젖어 드는 버거움일지 생각해 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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