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관에서 오는 고통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인간은 기억의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생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이 단층처럼 쌓이고 쌓일수록 '두 다리 쭉 뻗고 잔다'가 얼마나 희망적인 이야기인지 알게 된다. 쌓은 단층 속에 죄의식의 먼지가 붙지 않은 흙은 없으니까.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이러한 인간의 죄의식을 다룬다. 석탄 판매일을 하고 있는 펄롱은 매일 저녁 고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비누와 거친 솔로 석탄 가루에 검게 더러워진 손을 씻는다. 그저 검은 때를 벗겨낸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세게 솔로 손등을 문지르면서 말이다.
사실 펄롱이 매일 밤 지우는 건 석탄의 검은 때가 아닌 과거의 기억에 대한 죄의식이다. 교차돼 보이는 펄롱의 과거는 유복하지 않았다. 적어도 어머니가 쓰러져 이웃에 거둬지기 전까지는.
보통은 부모를 잃고 유복했던 집안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지만, 펄롱을 혼자 키우는 어머니는 아들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지고 싶었던 퍼즐 하나를 사주지 못할 만큼 가난했다. 그리고 펄롱은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고 배려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물론 어린아이에게 그런 성숙을 기대하는 게 되려 부당한 요구에 가깝다. 인간이 성숙에 가까워지는 데는 보통 모난 돌이 뭉툭해지는 만큼의 시간이 걸린다. 다만 우리는 비록 그 행동이 어렸을 때 일어났던 일일지라도, 어른이 된 이상 자신의 과거를 더는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기억은 속박이고, 때로는 무겁다.
펄롱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받아봤냐는 아내의 질문에 받지 못했던 퍼즐을 이야기한다. 어렸던 자신의 행동, 어려운 형편에 어렵게나마 선물을 구해왔던 어머니의 노력을 배신한 자신을 어른의 된 엄격한 시선에서 후회하기 때문일까.
어렸던 펄롱은 어머니와 이웃 남자의 연인에 가까운 관계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물론 펄롱의 잘못은 아니다. 그 나이의 아이는 보통 그런 게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웃의 남자는 펄롱에게 부재했던 아버지의 역할을 제법 잘 채워줬던 걸로 보인다. 크리스선물로 낙담한 그를 위로해 주고, 이발소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펄롱은 끝내 그를 아버지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스스로의 방관자
사실 살펴보면 펄롱의 죄의식은 사람에 따라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어머니의 선물에 토라졌던 것, 어머니와 이웃 남자의 감정에 동요했던 것, 노력했던 그를 끝내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모두 잘못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이기에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일이다. 오히려 몇몇 일들은 어른이었어도 마땅히 다르게 행동하기 어려웠을 법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펄롱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건 스스로가 자신의 '방관자'였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을 때도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와 자신의 슬픔에 대해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헛간에 숨어 화를 내는 방법을 선택했으며,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도 쓰러진 어머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를 자처했던 이웃의 남자와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 그에게 거리를 뒀으며 끝내 그가 자신을 필요로 했을지도 모르는 순간에도 방관자로 남았다.
펄롱은 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이야기하지도,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지도 못했다. 스스로가 자신의 방관자로서, 죄의식과 후회를 쌓으며 삶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매일 밤 죄의식에 검게 그을린 손을 씻으며, 내일은 다르기를 빌며.
그런 그가 수도원의 진실을 마주했을 때,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가족, 지인의 만류가 있었고, 모두가 자신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미 그는 방관이 만드는 죄의식의 고통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는 인간이었다. 수도원의 아이를 구하지 않은 채 건너는 긴 다리가 끝나지 않을 듯 길고 어두웠을 거다.
소녀를 구하기로 결정한 펄롱의 결심 뒤에는 마주해야 하는 수많은 불안과 갈등이 있다.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아이들과 아내가 자신을 원망할 수도 있다. 마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녀원장의 모함에 마을 전체로부터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펄롱은 소녀와 수녀원을 나와 길고 검은 다리를 건넌다. 끝나지 않을 듯한 다리를 건너고, 어두운 길을 지나 소녀가 오랜만에 느껴보는 온기가 있는 그의 집에 다다른다. 그리고 펄롱은 마침내, 더는 전처럼 검은손을 씻어내지 않는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여러 번 방관자가 된다. 때로는 스스로의 방관자가 되고, 때로는 가족의 방관자가 되며, 때로는 타인의 방관자가 된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가끔씩 예고 없이 찾아와 우리를 뒤척이게 만들고, 익힌 새우처럼 등뼈를 잔뜩 움츠리게 만든다.
방관했던 순간, 그 순간은 다르게 말하면 누군가를 외면했던 순간으로 이어지고는 한다. 나는 때로 나의 고통을 외면했으며, 때로 당신의 고통을 외면했다. 당장 그 고통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아서, 나누고 싶지 않아서 했던 그 행동은 오히려 괴롭게, 매일 밤 찾아와 답할 수 없는 물음을 던지고는 한다.
그 뒤 펄롱이 어떻게 됐는지를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할 수 있는 건 소녀는 아주 오랜만에 따뜻한 식사를 하고 푹 잠들었을 것이며, 펄롱도 그날만큼은 두 다릴 뻗고 잠에 들었을 것이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