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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경 Sep 17. 2020

6월 광장에서

62년생 박미경 이야기

한 작가가 있었다. 그가 최종적으로 다닌 학교는 중학교였으며 미술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 사실 그는 목수였다. 그는 서울 근교의 직접 지은 허름한 집에 살고 있었다. 그는 국민학교 동창생인 한 화가의 부탁으로 벽화를 그리기 위한 사다리를 짜주러 갔다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통일을 기원하는 내용의 벽화에 그는 꽃 몇 개를 그렸는데, 그 벽화가 '이적표현물'이라는 이유로 다른 화가들과 함께 경찰에 붙들려 가게 된 것이다. 경찰에서 그의 직업을 물었는데 그가 목수라고 답하자 경찰은 난색을 표했다. 그리고 조서란에 직업을 "화가"라고 썼다. 그렇게 그는 국가에서 공인한 정식 화가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화가가 된 그는 이후 정말로 미술계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민중미술 운동을 하던 그의 국민학교 동창과 함께 이런저런 현장을 방문하게 되고 현장에서 그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하던 목수일의 경험을 살려 당시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필요한 다양한 시설물과 미술품을 만들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민주열사들의 죽음이 이어졌고 많은 시위 현장이 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쓰일 걸개그림과 영정도 등의 작품 제작뿐만 아니라, 시설물의 설계, 장례행렬의 구성과 배치도 등을 직접 만들고 연출했다. 또한 당시의 무분별하고 주먹구구식의 시스템을 개선하고자 기존의 문화운동판과 많은 싸움을 해가며 일의 체계화를 도모했다.


예를 들어 큰 걸개그림을 그릴 경우, 그리기 전에 바닥에 물감 등이 묻어 지워지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먼저 바닥 전체에 빈틈없이 방수천을 까는 것, 재료나 장비들을 정리정돈하는 것 등, 그에겐 가장 기초적인 일 조차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는 많이 놀랐다고 했다.


또한 그는 감독의 역할이었기에 큰 그림을 보고 현장을 지휘해야 할 경우도 많았는데, 걸개그림 같은 경우도 밑그림만 그가 그리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그림이 그려지고 색이 칠해지는 것을 보면서 확성기로 이래라저래라 하고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반발하고 오해하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들과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설득하며 많은 것을 체계적으로 진행해 나갔다.


그는 걸개그림이 걸리고 올라가는 그 전체 과정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기본이고, 모든 작품을 그 현장 속에서 사고하고 상상하며 연출했는데, 입시미술을 거쳐 미대에서 고전적인 미술교육을 받다가 갑자기 현장으로 나온 민중미술가들이 갖출 수 없었던 그러한 사고방식과 체질이 그의 결정적 강점이었다.   


그를 만난 건 내가 속해있던 연구회에서 작가로 초빙했을 때였다. 그의 독특한 이력과 새로운 활동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흥미롭고 매력적인 것이었다. 그는 겸손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는 특유의 혜안으로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었고, 우리가 모르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를 보면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는 우리들의 한계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당시 연구회에서 민중미술 현장을 지원하는 일을 맡았는데, 민중미술 전시를 기획하고 평문이나 리뷰를 쓰고 공부를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런 일을 하다 보니 그와 마주칠 일이 많았고, 우리는 친해졌다. 많은 부분에서 그와 나는 달랐지만, 의외로 얘기가 잘 통했다. 솔직히 그처럼 나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을 만난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그와 신기하게 생각이 같았고 나는 대부분 그에게 동의했다. 우리는 같이 많은 일을 도모했고, 그의 작업실에서 둘이 낄낄거리며 재미난 일을 기획하기도 했다.


1991년 6월, 눈부신 초여름의 햇살이 내리쬐는 거리는 폭풍전야 같았다. 그 해 몇 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의해 목숨을 거두었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연일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 그 해 4월부터 6월까지 13명의 젊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1987년의 6월 항쟁이 재현되는 듯했다.


그와 나는 신촌의 시위대 속에 있었다. 그날은 대학생과 시민들이 차도를 점거하고 가득 모여있었다. 연세대 앞 굴다리 위에서 누군가 또 떨어졌다는 소식이 시위대 틈에서 들려왔다. 시위대는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하였고 대치는 점점 격화되었다. 나는 무섭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감정에 격앙되어 점점 시위대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그가 나를 시위대 밖으로 잡아끌었다. 우리는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 거리시위에 쓸 제작물을 설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거리를 탐사하고 시위를 답사하러 나온 것이었다. 사진을 찍고 측정을 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내가 감정에 휩쓸려 시위를 하고 있으면 본분을 망각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와 나는 시위대를 빠져나와 국밥을 먹었고 그의 작업실에 갔다. 그는 밥도 너무나 잘 먹었고 여유로웠다.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나는 저쪽에 시위대가 있는데 이쪽에서 국밥을 여유롭게 먹는 것이 뭔가 찜찜하고 죄책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단호했다. 우리가 할 일을 정확히 하자는 것이었다. 우리가 지금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일은 틀어지고 계획한 대로 진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위의 효과를 더 극대화시키고 세상에 알리기 위한 우리의 작업을 위해서 지금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시위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작업은 문화예술면이 아니라 사회면이나 뉴스에 나와야 하며, 그때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으려면 철저하게 계획해서 훌륭한 작업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왜 나 같은 학삐리 나부랭이랑 다른지, 그가 왜 프로인지 그때 제대로 알게 되었다. 다시 한번 그에게 수긍하며 감탄했고 반성했다. 그리고 그의 계획은 대부분 잘 맞아 들어갔다.  지금 봐도 그가 설계하고 연출한 현장들은 전무후무한 장관들이 많다.


게다가 그는 아주 일찍부터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이후에는 환경문제에 관한 작업을 했으며 해외에서도 그를 초청하는 등 다양하고 활발한 활동을 해나갔다.  


나는 한때 나만큼 그를 아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고, 그의 작업에 관한 책을 쓰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의 작업실에서 꼼꼼하게 자료들을 모으고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그의 작품론을 쓰고자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능력의 한계를 느꼈다. 그와 그의 작업들은 그 당시 내가 가진 경험과 언어로는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평가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다른 차원의 접근방식과 언어가 필요한데 그것에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는 굉장히 앞서간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제대로 설명해낼 수가 없었다.  

 

가끔 멀리 있는 그의 소식을 듣게 될 때면 마음이 무겁다. 특유의 그 여유로운 성격으로 그는 잘 살고 있을 텐데 나 혼자 마음의 빚을 진 느낌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작업들이 제대로 빛을 받지 못하고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굳이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하겠지, 했는데 아무도 안 한 것 같다. 갚아야 하는 일들이 어디 한두 가지 일 까만은 아직까지도 큰 빚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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