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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ldsmiths Nov 23. 2021

오다 사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떻게 권력을 쥐었나?

- 오다 사후, 계승자를 둘러싼 정치와 전투 (대폭 수정)

* 정제하여 자세히 쓰지 못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가볍게 읽힐 수 있는 이야기들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변변치 않은 브런치를 구독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래 이야기는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던 오다 노부나가가 갑자기 죽자, 어떻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그 권력을 장악하는가 하는 테마를 갖고 써보았습니다.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열상 매우 높지 않았음에도 가장 용맹하고 오다 가문의 최고장수인 시바타 가츠이에를 어떻게 물리치고 권력을 쥐는지 지켜보신다면 훨씬 흥미로우실 것입니다. 


전국시대 전투

이야기의 배경, 전국시대의 형세

오닌의 난 이후, 일본조정은 지방에 대한 통치권력을 잃어버렸다. 지방은 각자의 영주들, 즉 다이묘들이 독자적 자치권을 갖게 된다. 일본 전역이 각자의 나라(쿠니)들로 쪼개지는 이 시기를 전국시대라고 부른다.

처음에 다이묘는 슈고(수호)라는 벼슬로 각지의 지방행정관으로 파견된 자들이 자치를 시작했으나, 하극상이 발생하고 무사 등 군권을 가진 자들이 다이묘로 등극한다. 이제 힘만 있다면 누구나 지역의 영주(다이묘)가 될 수 있었다. 전국 각지에 여러 다이묘들이 난립하는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합집산이라고 했던가? 오랜 전란이 이어지면서 극심하게 분열된 일본을 통일하려는 시도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누구든 수도 교(경; 교토)로 진군하여 천황과 쇼군을 등에 업고 천하를 군림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당대 최대군벌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상경을 시도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뜻밖에 오다 노부나가라는 신인에게 덜미를 잡히고 만다. 오케하자마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기습을 감행, 최대군벌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어이없는 죽음을 당한다. 


그 다음으로는 가이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이 상경을 노린다. 다케다 신겐은 강력한 기마부대를 자랑하고 있었다. 다케다는 배후인 에치고에 필생의 라이벌 우에스기 겐신과 측면인 지금의 도쿄 지방에 호죠 우지야스와 삼국정립으로 대결을 벌이면서도 언제나 상락을 노렸다. 그러나, 다케다 신겐 앞에는 최대군세를 자랑하는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있기 때문에 상경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어디서 들어보지 못한 오다 노부나가라는 자에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마가와가 무너지자 다케다는 그 영지를 재빠르게 기습하여 차지한다. 그리고 이마가와가 사라진 이제, 다케다는 풍림화산 깃발을 세우고는 자신의 자랑인 기마부대를 이끌고 상경한다. 전쟁의 신이라는 다케다 신겐은 오다의 동맹국인 마츠다이라(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단숨에 짓밟고 오다의 영지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나, 다케다 신겐이 갑자기 급사하고 만다. 그 바람에 다케다군의 진공은 멈추게 된다. 만약 전성기의 다케다 신겐이 진격했다면 오다 노부나가가 이길 수 있었을까? 당시의 무게감이라면 오다 노부나가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다케다가 상경에 성공했다면 일본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다케다의 기마대


이제 다케다를 물리친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과업을 준수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천황의 부름을 받고 근기(수도권) 지역을 차지하면서 핵심 세력으로 부상한다. 물론 근기 지역을 차지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아사이 가문와 아사쿠라 가문, 그리고 승병연합세력들과 처절한 전투를 통해 근기 지역을 통합했다. 근기 지역은 최대의 수확량을 자랑하고, 무역과 상업으로 세금을 얻기 좋았다. 때문에 오다는 단숨에 일본을 통일할 세력으로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훌륭한 장수들을 발굴한다. 오다가 거느린 맹장들을 살펴보자면, 우선 시바타 가츠이는 오다 노부나가가 가장 총애하는 최고의 맹장으로서 노부나가를 제외하고는 가장 서열이 높았다. 또 한 명, 근본도 없는 미천한 바늘장수 출신에 원숭이를 닮은 자, 하시바 히데요시가 전투를 통해서 급격하게 승격한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훗날 토요토미 히데요시로 개명하게 된다. 그야말로 일개 군인에서 군단장까지 올라간 실력자이다. 귀족 스님 출신인 아케치 미쓰히데는 근기지역을 통합하면서 얻은 새 장수이다. 오다 가문의 오래된 가신은 아니지만 당시 첨단무기인 총포부대를 잘 운용하는 것으로 인정받으면서 성장했다. 그 외에 오다 노무나가의 숙노라는 자로는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쯔네오키 등이 포진해있었다. 또 하나, 오다 노부나가의 직속부하는 아니지만, 긴밀한 동맹국이자 부용국으로서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맹활약했다. 


시바타 가츠이에

혼노지의 변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와 근기지방을 장악한 뒤, 일본 통일을 향해 나가갔다. 

서쪽에는 모리 데루모토라는 거대 다이묘가 있었고,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진군했다.  

동쪽에는 에치고에 군신이라는 우에스키 겐신이 있었다. 이곳에는 서열 1위 시바타 가츠이에가 진격했다.

남쪽 시코쿠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친아들이 진군하면서, 동서남으로 확장하며 통일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중에서 서쪽의 최대 강자 모리가문과 대결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서국들을 점령하며 서쪽으로 확장하고 있었는데, 모리가 대군을 이끌고 맞서 나옴으로써 서로 대치하게 된다. 강력한 모리의 군세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하시바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파병해 원군으로 지원하게 했다. 이렇게 다 방면으로 군대를 보내고 나면, 오다 노부나가 손에 있는 병력은 많지 않게 된다.


한편, 히데요시를 지원하러 가던 아케치 미쓰히데는 평소 오다 노부나가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영화나 소설, 만화 등에서 다양하게 묘사가 되고 있다. 어찌되었건 아케치 미스히데는 평소 오다에 대해 큰 두려움과 불만이 많았다. 그는 서국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했다. 그런데, 갑자기 깃발을 반대로 돌리고는 무방비에 가까운 오다 노부나가를 치러 왔다. 쿠테타였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에서 유흥을 즐기며 혼노지라는 절에 머물고 있었다. 그 날 축제의 일환으로 바둑종주가인 본인방과 바둑명인을 불러 시합을 시켰다. 그런데 불길한 징조가 나타났다. 두 사람의 바둑에서 삼패빅이 나왔다. 삼패빅이란 한 판의 바둑에 패가 세 번 나오는 것으로 매우 드물게 발생한다. 무엇보다 삼패빅은 불길한 징조라고 불렀다.

  
과연 그 날 밤, 아케치 미쓰히데는 군대를 돌려 혼노지를 야간에 습격한다. 가볍게 저항하던 오다 노부나가는 혼노지를 불태우고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마감한다. 일본 전국시대 최대 영웅, 오다 노부나가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횡사했다. 그는 혼란한 전국시대를 통일하는데 기초를 마련해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문제는 오다 노부나가라는 거대세력의 수장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수도 교토를 비롯 중부지역을 장악한 오다가 사망했으니, 일본은 다시 통일에서 멀어지며 깊은 분열에 빠질 수가 있었다. 


혼노지의 변

당시 서부전선에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는 모리가문과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급히 모리 측과 강화를 맺었다. 모리는, 오다가 보낸 아케치 미쓰히데의 원군이 도착하면 승부를 알 수 없다고 판단해 강화를 수락하면서 빠르게 타결됐다. 이제 히데요시는 누구보다도 재빠르게 회군하여 반역자 아케치 미쓰히데를 치러 갔다. 한편, 서열 1위 시바타 가츠이에도 이 소식을 들었다. 시바타 역시 당시 동부전선인 에치고에서 우에스기와 전쟁 중이었다. 패주한다는 오명을 들으면서도 군대를 일단 철수시켰다. 그러나 미쓰히데를 치는 데는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한창 전투 중에 철수한 것이므로 아케치 미쓰히데를 치러가다가는 그 간 빼앗은 에치츄 등을 모두 다시 잃어버릴 수 있었다. 시바타는 그 간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돌리며 회군할 수 없었다. 시바타는 갑작스런 오다의 죽음을 두고 사태를 관망했을지도 모른다. 또는, 히데요시와 미츠히데의 전투상황을 보고 어부지리를 취하려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여기서 시간을 보낸 것은 결정적 패착이 되었다.


한편,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쓰히데는 오다 노부가를 제거하는데에는 성공했으나 이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치 오다를 죽이는 것까지만 염두해둔 것처럼 이후 행보를 보면 우왕좌왕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고 이후 우왕좌왕했는데, 이 역시 거사를 일으키는 데에만 몰두했지 이후 전략이 없었다. 너무 두려운 인물을 죽인다는 점에서 너무 그 부분에만 몰두했던 것일까? 아케치 미쓰히데는 뒤늦게 주변 오다의 성들을 점령하면서, 쿠테타를 굳혀보려했다. 문제는 많은 성주들이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믿고 있던 아케치의 사위마저도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다. 아케치는 당황하게 된다. 


그 사이 하시바 히데요시는 매우 빠른 속도로 행군하여 어느 새 교토 주변까지 나타났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히데요시를 막아야 했다. 그러나, 아케치는 동부전선에 있는 시바타 가츠이에가 올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점 때문에 가뜩이나 열세인 병력을 나누어, 서쪽의 히데요시와 동쪽의 가츠이에를 상대하도록 분산배치하였다. 그 대신, 교토로 진군해오는 히데요시군을 상대로 유리한 지형을 선택해서 전투를 벌이도록 해서 괴멸시키려했다. 아케치는 협로를 빠져나오는 히데요시군을 그 자리에서 족족 격파시키는 전략을 구상했다. 평소 귀족 승려출신인 아케치는 바늘장수 출신의 원숭이 히데요시를 무시해왔다. 그 동안 히데요시를 무시한 댓가는 처참했다. 히데요시 군은 아케치가 설정한 그 협로로 들어왔다. 아케치 군은 히데요시 군을 분쇄하고 있다고 판단할 무렵, 히데요시의 일지군이 옆의 요도강을 뚫고 우회하여 진군해왔다. 그 곳이 뚤리면서 전황이 급변한다. 하시바 히데요시군은 아케치 미쓰히데군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케치 미쓰히데는 여기서 패하면서 도망다니다가 죽게 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시의 부상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복수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해결해주었다. 그리고, 다음 문제. 누가 오다의 뒤를 이을 것인가가 중요했다.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무찌르고 오다의 본진인 미노(기후현)으로 왔다. 그 사이 시바타 가츠이에가 미노에 도착해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 장수 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고 가장 용맹했던 시바타 가츠이에가 후계자를 결정하기 위한 가신들의 회의를 주최한다. 당연히 오다 노부나가 다음서열이었던 시바타 가츠이에는, 자신의 위계를 인식시키고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뽑는 자리로, 키요쓰 회의라고 부른다. 이 중요한 회의를 주관, 개최함으로써 시바타 가츠이에는 서열 1위임을 확인시키려하였다. 미노(오와리)에 도착하고 보니, 하시바 히데요시가 미쓰히데 토벌전을 성공시킨 뒤라, 어느 새 정국을 주도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의 복수전에 참전하지 못했던 가츠이에는 회의를 주관하며 상황을 만회하려 했다. 


키요쓰 회의가 열렸다. 시바타 가츠이에는 가장 상단에 앉았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쓰히데를 토벌하며 명분을 얻었으나, 아직은 중간정도의 좌석에 앉았다. 오다의 가신들은 후계자를 논의했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는 이미 죽었다. 그러므로 차남 노부카츠와 삼남 노부타카 중에서 유력했다. 시바타 가츠이에는 뜻밖에 삼남 노부타카를 지지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회의 분위기를 주도하며 사실상 삼남 노부타카가 후계자에 적합할 것임을 선언했다. 모두 경악했다. 차남 노부카츠가 있는데 삼남 노부타카를 후계자로 하다니! 누가 봐도 난데없었다. 시바타는 가능성 낮은 삼남을 자신이 옹립함으로써 권력을 쥐고자 했다.


키요스 회의; 4대 가신

시바타 가츠이에는 모든 가신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고 용맹한 장수였다. 오다 노무나가 시절이라면 노부나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에게 토를 달 수 없었을 것이다. 시바타는 그런 위엄을 알고 밀어부치고자 이 회의를 소집하고 선언했다. 그러자 몇몇 가신들이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다. 서열상 차남인 노부카츠가 잇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했다. 시바타의 무리수에 키요스 회의는 소란스러웠다. 이 때, 하시바 토요토미가 뜻밖의 말을 뱉는다.

'차남 노부카츠와 삼남 노부타카를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러다가 형제 간에 분쟁이라도 생길 수 있으니, 차라리 장남 노부타다의 아들, 즉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인 산보우시三法師가 계승하도록 합시다!'


산보우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적자인 장남, 그 장남의 적자이므로 혈연적으로 가장 정통에 가까웠다. 다만 산보우시는 아직 2-3세에 불과한 유아였다. 히데요시의 발언은 판을 흔드는 한 수였다. 히데요시다운 지략이 돋보였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시바타 가츠이에를 정면으로 거부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의도를 무너뜨렸다. 또한, 나중에 자신이 권력을 장악할 때는 더 어린 주군을 등에 업고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뜻밖의 타협안에 많은 이들이 동의했다. 차남과 삼남의 골육지쟁을 염려한 것이다. 오다의 중요 숙노인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쯔네오키가 동의하면서, 대세는 기울었다. 이런 중신들이 주장하니 시바타도 마냥 힘으로 밀어부칠 수 많은 없었다. 마침내 유아인 산보우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차남 노부카츠와 삼남 노부타카, 그리고 시바타 가츠이에는 분함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아케치 미쓰히데


이제 오다 노부나가의 장례식이 남았다. 오다의 시신이 있는 교토의 큰 절에서 장례를 치루기로 하였다. 산보우시는 아직 어리므로, 아케치 미쓰히데를 물리치고 그 곳에 주둔하던 히데요시가 장례를 주관하여 진행하였다. 사실상, 교토 일대는 히데요시가 장악했다. 히데요시는 교토에서 불순한 무리들이 장례를 방해할지 모른다는 구실을 삼으며 3만의 대군을 풀어 일대를 경계했다. 사실은, 시바타 가츠이에 측이 장례에 참석하여 주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히데요시는 이 두가지 과업, 즉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복수 그리고 장례를 치뤄냈다. 이것으로 마치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잇는 장수처럼 여겨졌다. 명분과 세력 모두 히데요시가 얻게 되었다. 


이후 영지를 재배분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히데요시는 교토와 그 일대에 계속 주둔하며 그 지역을 그대로 흡수했다. 과거 오다 노부나가가 근기지역을 흡수하면서 성장한 것처럼 히데요시도 알짜배기 땅을 가져갔다. 시바타 가츠이에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시바타의 주력군이 있는 동부 전선 지역으로 배분했다. 현재 주둔군이 있는 위주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처럼 보였으나 모두 히데요시의 계략이었다. 그리고 시바타의 서쪽에는 그가 교토로 진군해올 것을 대비하여, 히데요시를 따르는 무장들에게 영지를 배분하면서 배치했다.


이렇게 오다 노부나가의 복수, 장례, 후계자 논의가 끝났다. 시바타 가츠이에는 다시 에치고와의 전쟁터로 떠났다. 히데요시는 모리 데루모토와는 화평을 하였으므로 서쪽 전선으로 떠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교토와 일대를 장악하며 권력중심에 주둔하게 된다. 그렇게 오다 노부나가의 뒷 수습을 하는 사이, 실질적인 권력은 하시바 토요토미가 장악해갔고, 오다의 주요 병력까지 흡수했다. 


시바타 가문의 문양

시바타 가츠이에, 칼을 뽑다

하시바 히데요시의 결정을 따르는데는 가장 불만인 세력이 둘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과 삼남. 그리고 또 한사람을 꼽는다면, 서열 1위 가신인 시바타 가츠이에였다. 오다의 차남과 삼남은 자신이 후계자가 될 뻔한 상황에서 유아에 불과한 산보우시에게 빼앗기면서 히데요시에 대한 불만이 높았다.


시바타 가츠이에 역시 오다 노부나가 다음은 항상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나이도 어리고 서열도 낮은 히데요시가 사실상 2인자의 행세를 하며 정국을 이끌며, 점점 세력이 커져가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자신의 이름, 하시바를 지을 때, 오다 가신 중 서열이 가장 높은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의 와(하)羽와 시바타 가츠이에柴田勝家의 시바柴 따서 성을 하시바羽柴로 정할 정도였다. 이들을 선망하던 비천한 신분출신에 원숭이 같이 못생기고 나이도 어린 놈이 어느새 자신을 경멸하고 자기보다 높은 자리로 올라서려 하고 있다. 시바타 가츠이에는 그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히데요시의 갑작스러운 독주는 일부 가신들과 장수들의 불만을 사기 시작했다. 오다의 내부장수들은 파가 갈리기 시작했다. 기존의 1인자 시바타를 따르는 무리, 새로운 권력자 히데요시를 따르는 무리. 히데요시는 머지 않아 시바타 가츠이에측과 일전을 벌일 것을 예상하며 성을 보수하며 사태를 대비한다.  


동시에 히데요시는 오다의 삼남 노부타카가 반심을 품고 있음을 알고 미리 그를 자극했다. 삼남 노부타카는 시바타 가츠이에와 결탁하여 군대를 일으켜 반기를 든다. 여기에 타키가와 카즈마스와도 함께 봉기했다. 문제는 노부타카가 반기를 들었는데, 시바타의 군대가 진군해오지 않았다. 시바타가 에치고에서 넘어오려 하였으나 당시 겨울이라 행군이 어려웠다고 전해진다. 시작부터 손발이 맞지 않았지만, 시바타 가츠이에는 '미천한 히데요시 쯤은...'하고 쉽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바타의 원조가 오기 전에, 노부타카는 항복해버린다. 그리고 히데요시 측은 타키가와를 진압하기 위해 진군했다. 타키가와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농성을 시작했다.

전국시대 전쟁도 (세키카하라 전투)

마침내 눈이 녹았다. 히데요시 측이 타키가와와 긴 농성전 중이라는 것을 노리고, 그 틈에 시바타 가츠이에가 드디어 출병한다. 시바타 가츠이에는 군을 몰고 히데요시의 성을 차례로 점령하며 내려왔다. 항복했던 노부나가의 삼남 오다 노부타카도 다시 거병했다. 히데요시는 노부타카의 성도 포위하며 봉쇄해야 했다. 


이제 시바타와 히데요시의 대결이 남았다. 시즈카타케라는 요처를 두고 양군은 전투를 벌인다. 시바타 측은 시즈카타케를 얻는데 실패한다. 이후 히데요시가 직접 출정해 생각보다 빨리 진공해왔으며, 시바타를 따르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히데요시 측으로 돌아선 것이 결정타가 됐다. 시바타 가츠이에군은 빠르게 괴멸되기 시작한다. 수세에 몰린 시바타 가츠이에는 결국 자결하고 만다.

"이 카츠이에의 할복을 보고 후학들은 보범으로 삼아라!"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를 호령하던 시절, 최고의 장수로 인정받으며, 당대 최고미녀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오다와 함께 전장을 호령하던 시바타 가츠이에는 근본없고 자신의 이름마저 따라 짓던 원숭이 닮은 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사라지고 말았다. 반란을 노렸던 삼남 노부타카는 용서받았지만, 이후에도 몇번 반발하다가 히데요시로부터 자진을 명령받고 사망한다. 오다 노부나가와 가장 닮았다는 오다 노부타카는 그렇게 제거되었다.

또한, 하시바 히데요시는 시바타 가츠이에를 물리치면서 이렇게 오다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런데, 히데요시에게도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은 아니지만 오다가문을 따르던 유력한 동맹세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었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에게는 복속하지만, 자신보다 미천했던 하시바 히데요시에게는 복속하진 않을 것이었다. 또, 아직 오다의 차남 노부카츠도 살아있었다. 노부카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하시바 히데요시는 차남 노부카츠를 등에 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대결이 남아있었다. 

하시바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둘 다 비슷한 위치였다. 히데요시는 오다의 핵심가신, 에이야스는 동맹국이나 사실상 부용국이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뒤에 그의 가신 히데요시에게 굽힐 마음은 없었다. 그러던 중, 나부카츠가 이에야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마침내 히데요시와 대결할 명분이 생긴다.


둘은 군사적 충돌을 벌인다. 여기서 하시바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힘으로 제압하려고 했으나, 이에야스는 당대 명장이었다. 두 영웅의 대결은 일진일퇴의 공방으로 팽팽해졌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상대로 힘의 우위를 확인하지 못했다. 또한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아서 대치가 길어질 것 같았다. 이제 막 권력을 차지한 히데요시는 오사카를 비운 채, 동쪽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묶여있다가는 권력기반을 다시 잃을지 몰랐다. 그리고 서쪽에는 강대한 모리가문이 있었다. 결국 지장 히데요시는 노부카츠를 구워삶는다.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와 화해를 하면서 이에야스는 중간에서 붕 떴다.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츠를 명분으로 군대를 일으킨 도쿠가와 이에야스인데 노부카츠가 히데요시와 화해해버리니 전쟁의 명분이 없었다. 이에야스도 자칫 헛발을 딛으면 몰락하느니 다시 한번 인내하기로 한다. 하시바 히데요시 역시 동쪽의 이에야스를 같은 편으로 두고, 서쪽의 모리를 치러 가야했다. 결국 이렇게 히데요시는 어정쩡하게 이에야스를 남겨놓은 채 일본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히데요시의 사망하고 나서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침내 권력에 도전한다. 세키카하라 전투를 기점으로 이에야스의 세상이 왔고, 이후 쇼군에 오르면서 에도막부 시대를 열게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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