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진짜 마지막 이야기
역대 한족 왕조는 장안이나 낙양, 북경에 수도를 삼다가 북방민족들에게 침입을 받으면 장강 이남으로 내려와 정권을 세우며 저항해왔다. 기마전에 능숙한 북방민족은 바다와 같이 넓은 장강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나라도 낙양을 도읍으로 삼다가 북방민족이 침입하자 장강 남쪽 건강(남경)으로 이동하여 동진을 시작으로 남조를 형성하며 저항해왔고, 송나라도 개봉을 버리고 장강 이남 임안(항저우)으로 수도를 옮기며 남송으로 연명했다.
명나라 역시 여러 대신들과 황족들이 장강을 요새삼아, 명초 수도였던 남경으로 피신하여 정부를 수립한다. 명나라는 원나라라는 북방 몽골을 상대하기 위해 북경을 수도로 삼으면서도 남경에는 도성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유지하였기 때문에, 즉 명나라는 북경과 남경이라는 이름을 쓰며 예비도성을 운영해왔다. 따라서 명나라는 남경에 새로 정권을 수립하기 용이하였다.
남경으로 모였던 대신들은 망명정부를 수립하는데, 누구를 황제로 올린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숭정제는 자결하고 그 황태자는 이자성에게 생포된 후 아무도 생사를 알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남경으로 피신한 황족 중에서 황제를 옹립해야할 터였다.
이 때 두사람이 후보에 올랐는데, 한명은 복왕 주유승, 또 한명은 노왕 주상방이었다. 가장 간명하고 정통성이 있는 방식은 누가 적자의 혈통에 가까운가인데, 혈통으로 따지면 복왕 주유승이 가까웠다. 문제는 복왕이 주색에 빠지고 사람들에게 포악하게 대응하며 관리들 일에 세세하게 관여한다는 이유 등 7가지 이유를 들며 일부 신하들이 크게 반대하였다. 반면, 같은 후보로 거론된 노왕은 반듯한 인물로 황제에 더욱 적합하였다.
이런 이유로 대신들 사이에는 친親(혈연적으로 가까움)이냐 현賢(어진 황제의 자질)이냐를 놓고 극심한 정치적 대립을 일삼는다. 누가 황제가 되느냐에 따라 그를 지지한 자들이 권력을 쥐기 되므로 치열한 정쟁으로 치달았다. 남명은 단합하여 청나라에 대항해도 모자랄 판국에 그 작은 망명정부에서도 서로의 권력을 위해 다투고 있었다. 결국은 복왕이 황제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남명의 1대 홍광제가 된다.
홍광제는 애시당초 황제에 어울리는 자가 아니었다. 망명정부에서도 홍광제는 후궁을 뽑는데 열중하였고, 술에 빠져 방종을 일삼았다. 대신들이 술을 자중하라며 강하게 간언을 올리자, 반성하는 홍광제는 하루에 딱 한잔만 마시게 하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는 큰 황금잔(망명정부에 황금잔이라니!)을 가져와 하루 종일 마시는데 한 잔을 다 마시지 않았다며 계속 마셨다. 심지어 계속 첨잔하며 한 잔을 다 마시지 않았다고 우기며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다.
황제는 이렇게 방종을 일삼는데, 대신들마저 그 작은 망명정부 내에서도 권력다툼을 벌이게 된다. 당시 장강을 배경으로 남명방어의 총사령관이던 좌량옥左良玉과 남명정권 권력자인 사마영馬士英이 권력다툼을 펼친다.
그 무렵 한 남자가 우연히 발견된다. 그의 속옷에는 용문양의 내의가 발견되었다. 정체가 무엇인가 물으니 젊은이가 말하길
"내가 바로 황태자이다."
이자성에게 생포된 뒤 실종된 숭정제의 태자, 주자랑이었다. 적통을 가진 주자랑이 나타나자 남명정부는 크게 출렁이게 된다. 주자랑의 진위에 대해서 조정은 술렁댔다. 다행히 태자를 가르친 적이 있던 왕탁이 젊은이에게 몇가지 질문을 던져서 진위를 가리기로 한다. 왕탁도 어린 주자랑만 기억하느라 단번에 알 순 없었다.
왕탁이 젊은 이에게 물었다.
"혹시 내가 누군지 아십니까?"
"모른다."
왕탁은 과거 태자 주변의 놓여있던 물건들에 물었고 가짜 황태자는 답을 해내지 못했다.
물론 이는 가짜였다. 군권을 쥔 좌량옥이 정권을 쥔 사마영을 비롯 황제를 갈아엎고, 거짓 태자를 앞세워 남명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좌량옥은 적통을 이은 황태자를 모시겠다는 이름으로 결국 최전방의 군대를 돌려 남경으로 향한다. 이성계와 전두환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좌량옥은 가장 제거하고 싶었던 사마영에게 한편으로는 생일축하 서신을 보내고 한편으로는 사마영을 적폐로 공표하는 표문을 발표한다. 이 사실에 남명조정은 긴급히 전방의 다른 부대, 황득공과 유량좌의 군을 끌여들여 반란군을 제압한다. 좌량옥은 전투에 패해 분사하고 그 잔여병력을 이끌던 좌몽경은 청에 투항해버린다. 외적을 앞두고도 내분이 벌어지니, 청나라에게 장강방어선은 허술해질 수 밖에 없었다.
남명정부가 자중지란에 빠지자 청나라는 도로곤의 동생 도도가 군사를 이끌고 장강 이남으로 진출하는데, 양주를 지키는 명나라 마지막 충신인 사가법이 최후의 저항을 했다. 이런 사가법마저도 남명정부의 대신들은 시기하였다. 그들은 사가법이 군사권력을 독점할까 염려하여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사가법은 청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양주는 함락된다. 충신인 사가법은 순국함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증명했다. 끝까지 저항했던 양주를 함락한 청나라는 양주에서 80만명을 도륙하는 대학살을 벌인다. 이 때 겨우 살아남은 왕수초라는 자가 그 참혹함을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양주십일(기)'이다. 양주대학살의 잔혹함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양주가 무너지자 장강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후 청군은 남경을 쉽게 함락하니(1644년), 남명의 홍광제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가 결국 청군에 사로잡힌다.
홍광제마저 사로잡히자, 남은 명나라의 신료들은 모두 복주로 달아났다. 이들은 다시 당왕 주율건을 황제로 세우며 저항하기로 한다. 그가 남명 2대황제 융무제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융무제는 홍광제와 달리 성군의 자질을 갖추었다. 그는 망명정부를 잘 추스려 청나라에 저항하여 고토를 수복하려 했다. 융무제 덕분에 복주는 점차 저항기지로서 모습을 갖추어갔다. 이런 데에는 당시 복건성에서 해상세력을 가지고 있던 정지룡의 지지 덕분이었다. 정지룡은 해적질과 무역업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고 중국 남동부 바다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선제인 홍광제부터 남명정권은 정지룡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융무제는 아예 복주에 자리를 잡으며 정지룡의 지지에 힘입어 반청저항을 계속했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남명정부는 정지룡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정지룡은 남명정권의 병권은 모두 넘겨받는다.
정지룡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일본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정성공이다. 정성공은 한족과 일본인 사이에 태어났고 어릴 때는 일본에서 자랐다. 이후 정지룡은 아들을 중국으로 불러와 중국식 유교교육을 밟게 하였다. 이 때문에 자유분방한 정지룡과 달리 정성공은 보다 충성스러운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성공이라는 이름도 융무제가 뜻한 바를 이루라는 뜻으로 하사한 이름이다.
다음해 1645년, 청군은 복주마저 공략해온다. 아무리 지역패자인 정지룡도 청나라의 공습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지룡은 일본까지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융무제가 포로가 되는 지경에 이르자 정지룡은 청에 투항할 것을 고려한다. 그러자 아들 정성공은 완강히 거부하며 아버지와 뜻을 달리한다. 이렇게 아버지 정지룡은 청에 투항하고 정성공은 떨어져나와 계속해서 청나라에 저항한다.
한편, 복주를 잃고 융무제마저 포로가 되자, 명나라의 남은 신료들은 모두 광주로 내려가 다시 남명정권을 이어가게 된다. 융무제의 동생 주율유를 황제에 올리니 남명 3대 황제 소무제가 된다. 여기서 문제는 또다른 대신들을 다른 곳에서 피난했는데, 이들 역시 남명정권을 세우며 4대 황제 주유랑을 황제에 올리게 되었다. 그가 바로 영력제가 된다. 망명왕조인 남명에 두 명의 황제가 동시에 즉위한 셈이다.
이는 또다른 내분을 야기했다. 청나라 군대가 밀고 와서 명조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에서, 소무제측과 영력제측이 서로 적통을 주장하며 권력다툼을 벌였다. 대신들도 황제를 옹립한 자들만이, 그 작은 권력마저 누릴 수 있기에 양측은 서로 권력다툼을 벌인다. 가뜩이나 초라한 남명정부는 내분에 빠지고, 결국 소무제와 영력제로 나뉘어, 같은 명나라 군대들끼리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전투에서 소무제가 승리하여 정권을 쥐는가 했는데, 이 틈을 노리고 청나라 군대가 들이닥친다. 두 생쥐가 서로 생사를 건 다툼을 하고 나자, 고양이가 나타나 승리한 쥐를 후려친 것과 같았다. 소무제군은 청군에 패배하고, 소무제는 자결하였다.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두 황제 중, 영력제만 남았다. 영력제는 전쟁에서 패하고서도 명나라를 이어가게 되었다.
내부권력 투쟁에서 이겼으나 영력제의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영력제는 청군을 피해 서쪽으로 계속 도망갔다. 정성공은 복건성에서 계속 청군과 교전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영력제가 청군을 피해 달아날수록 정성공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영력제는 조칭에서 난닝, 곤명까지 달아났다. 이 때는 대서군을 이끌던 장수 이정국의 도움을 받아 이동하게 되었다. 이정국은 원래 이자성 아래 농민반란군의 일개 장수였으나 사천지역을 장악하고는 독립하여, 대서大西국을 세웠다. 그러나, 청나라와 이자성의 대순국으로 공격을 받고 운남으로 도망쳐 온 군벌이었다. 그는 운남에서 남명정부를 만나서 합치게 된다. 대서국 출신들은 가난한 농민출신으로 남명과 합침으로써 자신의 신분상승을 노렸다. 그 초라한 남명정권이 가진 그 권위를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남명정부도 군부세력이 필요하였으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남명정부는 근본적으로 위태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결국 남명정권은 버마지역으로 달아나게 되었다. 버마라니 다소 황당한 장소인데, 곤명에서는 가깝기도 하지만 간신 마길상의 농간 때문에 버마로 가게 된다. 원래는, 곤명이 함락되려 하자 대신들은 사천지역, 즉 촉으로 가기를 바랬다. 영력제도 중국을 벗어나기 보다는 사천을 더 선호했다. 그런데 마길상은 실권을 가진 이정국에게 아부하며 간계를 부린다. 마길상은 이정국에게 말했다. ‘사천으로 가면 이자성의 잔당들 즉 대순국의 장수들이 있어서 권력을 나눠가져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정국은 자신이 배반해온 사천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남명조정을 버마로 가도록 종용했다. 마길상 역시 영력제를 핍박하여 모두 버마로 가게 된다. 보잘 것 없는 망명정부의 권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마길상은 사천을 버리고 버마로 향하게 한 것이다.
당시 버마는 꼰바웅 왕조였는데, 남명왕조가 입경하려면, 모두 무장을 해제하는 조건부로 입경하게 했다. 남명왕조는 이를 받아들인다. 그들은 무기하나 없이 강을 건너 버마로 입국한다. 버마는 영력제를 받아들이긴 했으나, 영력제를 대명제국의 황제는 커녕 일국의 왕으로 대접해주지 않았다. 그저 벌판에 대나무성을 만들어 남명의 황제와 신하들 약 2천명이 그 안에서만 살게 해주었다.
그 와중에서도 권력의 맛에 헤어나지 못한 남명의 신하들은 버마에서도 대접받기를 원했으며, 남은 향락을 누리며 버마 여인들을 희롱하는 등 문제만 일으켰다. 이 때문에 남명정권은 버마 사람들에게서도 버림받기 시작했다.
그 사이 버마에서 정변이 일어나 버마왕의 동생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새로운 버마의 왕은 영력제에게 축하선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유교적 명분에만 사로잡힌 명나라 대신들은 쿠테타를 통해서 왕권을 차지한 새 버마왕을 인정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물론 당시 선물을 준비할 여력도 되지 않았다. 처지가 안되니 중국 특유의 유교적 명분을 내세우며 거절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듣고 새 버마왕은 분노하였다. 이 때문에 버마왕은 남명정권 사람들을 궁으로 초대해 죽이려했다. 남명의 대신들도 버마왕의 초대에 무엇인가 음계가 있다고 여기며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버마왕은 다시 한번 초대했다. 이번에도 오지 않는다면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남명왕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왕궁으로 갔다. 이 때 명나라 대신들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남명왕조를 버마로 이끌고 온 마길상도 이 때 죽었다. 그리고 영력제와 태후, 태자와 그 남은 자들 25명을 모두 한 집에 몰아넣어 살도록 조치했다.
한편, 오삼계는 영력제를 사로잡아 남명조정을 멸할 수 있도록 청조정에 여러차례 요청하였고, 오삼계는 영락제를 추격하여 운남까지 쫓아왔다. 오삼계가 영력제를 잡기 위해 버마로 진입하자, 버마왕은 영락제를 오삼계에게 넘긴다. 결국 오삼계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를 청국에 상납하고, 그 공로로 평서친왕에 오르게 된다. 명의 마지막 황제 영력제는 체포되어 그 다음해에 죽었다. 이것이 잘 알려지지 않은, 명나라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후, 중국은 청나라가 통일했다. 오직 정성공만이 명나라의 깃발을 들고 하문에서 최후의 저항을 펼치고 있었다. 정성공은 강력한 수군을 바탕으로 바다를 통해 두 번의 북벌을 감행했다. 목표는 남경탈환이었다. 첫 북진은 항저우만에서 태풍을 만나 무너졌고, 두번째 도전은 장강을 거슬러 남경까지 진출, 남경을 포위공격하였으나 청나라군의 거짓항복에 속아 다시 괴멸된다.
연이은 북벌의 실패에 정성공은 타격을 입었고, 청나라군은 점점 하문을 좁혀왔다. 결국 정성공은 바다 건너 포모사, 즉 지금의 대만으로 건너가게 된다. 당시 대만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점령하고 있었다. 동인도회사라지만 무역회사가 아니라 네덜란드 해군과 다름이 없었다. 정성공은 약 8개월간의 맹공을 퍼부어 포모사를 함락에 성공한다. 그러나, 아버지 정지룡이 자신 때문에 모든 권력을 잃고 투옥되어 처형되었고, 영력제도 죽은 것을 알게 된다. 그 충격 때문이었을까? 정성공 역시 포모사를 함락하고 4개월 뒤에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망국의 역사는 언제나 비슷하다. 망국에는 반드시 간신이 있고, 망국의 황제는 간신의 말을 듣는다. 간신들은 충신을 절멸시키며, 내부 권력투쟁에 몰두한다. 겉으론 누구보다도 조직을 위한다는 이름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자신의 이득을 극대화할 뿐 조직의 성쇠에는 개인의 이권 다음이다. 역사는 이런 사례를 수차례 증명해왔다. 간신들은 정치를 일삼고, 충신은 사라지니, 조직은 부식되고 무너진다. 따라서, 모든 조직의 쇠망은 간신에서 시작하고, 간신이 중용된 조직은 반드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끝)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