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헨리 8세를 위한 변명
이혼의 상징(?)이 된 헨리 8세를 양덕들이 밈으로 만든 짤을 먼저 소개한다.
근데, 헨리 8세에게 이런 이미지는 좀 억울하다.
헨리8세는 바람기로 여러 왕비를 갈아치운 것이 아니다. 그가 훗날 왕비 카뜨린과 이혼하고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며까지 앤 불린과 결혼한 것은, ‘그녀의 까만 눈에 반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혹하다’. 영국사를 쓴 프랑스사람 앙드레 모루아의 평이다. 헨리 8세의 이혼은 바람둥이라서가 아니라 대부분 정치적 의도가 컸다. 당대 프랑스의 왕들처럼 여러 여인을 거느리더라도 굳이 왕비를 교체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헨리 8세가 교황에게 이혼의 명분을 들 때, ‘자신의 결혼 자체가 형수와 결혼한 반성경적 행태라서, 제대로된 결혼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들었다. 그러므로 이 결혼은 ‘이혼’이 아니라 오히려 ‘무효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반성경적 결혼이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첫부인 카뜨린은 스페인 왕의 딸이었다. 원래 헨리 8세의 형과 혼인하기로 되어있었다. 헨리8세의 부친인 헨리 7세는 당대 최강국 스페인의 딸과 자신의 장자 아서(헨리 8세의 형)와 혼인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서가 죽어버리자 헨리 7세는 다른 아들인 헨리 8세와 결혼을 성사시키면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형수와 결혼한 셈이 됐으니 반성경적이고 따라서 이혼은 성경에 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첫부인 까뜨린은 병약했고 블러디 매리를 낳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했다. 이 점이 반성경의 이유를 들어가며 이혼하게 된 진짜 이유다. 적장미 랑카스터가는 힘들게 장미전쟁을 겪으며, 라이벌 백장미 요크가를 무너뜨리고 영국의 왕위를 차지했다. 랑카스터가는 아버지 헨리 7세 시절에 겨우 왕권을 다질 수 있었다. 그 직후였던 헨리 8세 역시 왕권을 이어가려면 반드시 아들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에서 헨리 8세는 까뜨린과 이혼하고 앤 블린과 재혼한다. 그 과정에서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자 영국국교회를 연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졌으므로 여기선 생략하기로 하고.
두번째 부인인 앤 블린은 훗날 대영제국을 일으키는 엘리자베쓰1세를 낳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아들을 낳지 못했다. 앤 역시 동일한 이유로 이혼을 요구받았다. 앤은 자신의 딸 엘리자베쓰가 왕위를 계승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왕비의 자리를 지켜야한다며 고수했다. 결국 간통죄를 뒤집어쓰고 참수당했다. 앤은 처형당하며 예언적인 말을 남긴다.
”당신이 어떻게 해도 엘리자베쓰는 당신의 뒤를 이어 왕국을 이끌 것이며 이 왕국은 엘리자베쓰에게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두번째 이혼 역시 바람기가 아니라 아들이 필요해서였다.
다음에 제인 시모아를 만나 결혼한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으나 출산 중에 죽고 만다. 이 아들이 에드워드 6세이고 리차드라는 이름으로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 모델이 된다.
제인 시모아는 아들을 낳았으나 죽었으므로, 왕비가 공석이 됐다. 왕은 3년 내내 새 왕비를 찾았다. 이번에 맺어진 새 왕비 앤 역시 바람기가 아닌, 유럽 국제정세를 염두하고 맺은 결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바람기 때문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외교행위이었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동시에 구애를 받으면서도 강대해진 그들과 대립해야했다. 때문에 이들을 견제할 중부유럽의 제후와 전략적 동맹이 필요했고, 중부유럽 독일지역의 클레브 공작의 딸, 앤과 결혼했다. 그러나, 사랑없는 정략적 혼인인 탓이 그녀와는 6개월만에 이혼하게 된다. 세간의 평처럼 바람나서 한 결혼이었다면 허니문 기간도 없이 이렇게 짧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외로워하던 헨리는 카터린 하워드라는 17-19세의 여인을 만나면서 다시 활력을 찾는다. 그러나 젊은 그녀에게 나이든 헨리 8세는 여러모로 성이 차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외도를 저지르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쯤되면 헨리8세는 바람둥이라기 보다는 안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말년에 헨리는 카트린 파를 마지막 부인으로 만난다. 그녀는 왕비로써 안정적으로 왕실 안팎을 다스리고 왕비로서 영향력을 미치다가 헨리가 죽은 다음해 죽는다.
헨리8세는 영국의 절대왕정을 수립하고 그의 딸 엘리자베쓰 1세의 전성기를 열어준 왕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실제로 튜터가문의 왕실을 열고 네차례의 반란을 진압하며 개혁에 박차를 가한 그의 아버지 헨리 7세의 공을 이어받은 바가 크다. 그런 맥락 속에서 헨리 8세는 장미전쟁에서부터 이어진 왕권강화에 집착했고 그래서 오히려 절대왕정을 이루었다. 그런 이유로 꼭 남자 후계자를 찾아야했고, 그 속에서 그의 수많은 이혼들을 이해할 수 있다.
아 곁가지로 또 한가지 첨언하자면, 그가 국교회를 연 것은, 이혼을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당시 카톨릭 교회세력을 무너뜨리고 그들이 가진 막대한 경제적 재산을 몰수/압수하기 위한 개혁이었다는 유력한 견해가 있다. 이로 인해서였는지 왕권은 강화되었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졌으며 강력한 해군을 건설하게 된다. 자신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는 이 때부터 다져진 해군력을 바탕으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며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이후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으로 제해권을 장악하고, 무역을 통해 상업이 번성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며, 파운드화를 등에 업고 유럽의 세력균형자로서 적극 개입하게 된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