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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스타 May 10. 2024

비가 내린 후

기룬 것은 다 님이다



© maxwbender, 출처 Unsplash



 날이 계속 흐리고 비가 쏟아졌다. 손발이 차가운 나는 구름이 조금만 해를 가려도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특히 맞벌이 부부의 딸로 자란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늘 비를 맞으며 돌아갔던 학생 때의 기억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집에 오면 이미 운동화 안은 빗물로 그득했고 교복을 대충 걸어둔 뒤 어두운 방 이불 속에서 쉬는 게 나의 체온을 올리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어른이 된 뒤로는 해가 높이 떠서 위용을 자랑하는, 조금 더 적도 쪽에 가까운 나라들에 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잠깐 비가 쏟아져도 달궈진 땅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습기는 날아가 버렸고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햇살이 손발은 물론 내장 구석구석까지 따뜻하게 쬐어주었다. 


그런데 올봄은 유난히 비가 쏟아져도 나쁘지 않았다. 비가 온다 싶으면 몸을 번쩍 세우고 베란다로 달려나갔다. 화분을 내놔야 했기 때문이다. 바질, 대파, 양배추를 심은 화분이 비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아빠가 엄청나게 화분을 길렀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식물과 멀었다. 물을 주고 분갈이를 하는 것이 만만치 않음을 옆에서 봤기 때문이다. 아빠는 자그만 가게 창가를 화분으로 가득 채우고 모자라 집에도 베란다를 커다란 화분들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화분의 뒤처리는 엄마 몫이라 가게 일로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화분을 모조리 꺼내 물을 주고 물이 밑으로 빠지면 또 그 화분 받침을 전부 다 씻고 닦아내는 일을 군말 없이 했다. 난 그래서 화분 기를 생각을 하질 않았다. 


 결혼 후 남편이 베란다에 화분 몇 개 두는 게 어떻겠냐 하길래 나는 썩 내키지 않았다. 그거 물 주는 게 쉬운 줄 알아? 나는 고생스러웠던 엄마를 떠올리며 모르는 척했다. 그런데 몇 달 전 장을 보러 가면 하루가 다르게 가격이 올랐다. 신문에서도 연일 물가 안정 대책에 대해 1면에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그럼, 기르기 쉽다는 대파나 한번 심어볼까?


흙은 음식물 쓰레기 퇴비화를 한다고 한 포대 사놓은 게 있었다. 화분은 없지만 택배로 와서 버리기 직전이었던 스티로폼 박스가 있었다. 


아무 데서나 잘 자란다고 하니깐.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귤껍질이나 양파 껍질을 잔뜩 묻어두어 퇴비화한 촉촉한 흙을 스티로폼 박스에 깔고 적당히 거리를 둔 채 대파를 심었다. 음식에 쓰느라 목을 치듯 댕강 줄기를 잘라냈는데도 신기하게 하루만 지나도 새 잎이 쑤욱 올라와 있었다. 수돗물을 주며 기르다가 인터넷에서 '식물은 역시 빗물!'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는 은근히 비를 기다리게 되었다. 태어나 처음 기다린 비였다. 벚꽃이 질 때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리나케 베란다로 달려가 창문을 열고 대파 화분에 비를 맞게 해주었다. 정말인지 조금 시들시들했던 녀석이 다음날 생기가 있었다. 그 뒤로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화분을 사고, 다이소에서 바질과 양배추 씨앗까지 사서 새 화분을 늘려갔다. 비가 오면 이 화분 저 화분 돌려가며 비를 고루 맞게 해주었다. 빈 그릇에 비를 담았다가 화분에 물을 주기도 했다. 


혼자 하교하던 어린 내 양말과 신발을 젖게 하고, 책가방 속까지 스며들어 책을 우글우글 못나게 만들었던 비. 비 오는 날엔 땅바닥을 보며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이젠 비가 오면 화분들에게 새 빗물을 맛 보여줄 생각에 집으로 가볍게 뛰곤 한다. 심지어 여름이 와서 비가 쏟아질 것을 생각하면 약간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기룬 것'은 다 님이라고. 아파트 구석, 스티로폼 화분에서도 잘 자라난 새싹들이 어쩜 나를 기룬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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