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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Dec 30. 2021

재판정에서 생긴 일(01)

내 남자 이야기 (58)

갑자기 재판이 잡혔다. 그날은 아침부터 재소자들의 이동이 많아 무척 분주하고 어수선했다. 가장 먼저 고춧가루 밀수범 아저씨가 형이 확정돼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아저씨는 소지품을 정리하면서 입고 있던 하늘색 재소자복을 내게 물려주었다.


한꺼번에 떼거지로 잡혀 들어온 경제사범은 물론 마약사범들로 넘쳐나는 교도소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재소자복마저도 부족한 터라 속살이 훤하게 드러나는 찢어지고 해진 옷을 입고 있던 나로서는 새 옷을 받게 된 행운아인 셈이다. 마침  출소를 앞두고 병원동에서 돌아와 있던 약쟁이 형님의 추천 덕분이었다.


"막내야. 너 인마, 옷 좋아하면 안 된다! 밀수 형님 2년 받았는데 너도 그 옷 입으면 구치소에서 오래 살 수도 있어."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낡아빠진 옷을 입고 지내다 새 옷이 생기자 입이 귀까지 걸리도록 웃고 있는 내게 방장님이 장난스레 놀려댔다.

"아, 방장님 농담 좀 대충 하세요. 변호사 인간이 오늘내일하길래 사 입지도 못하고 보름씩이나 해진 옷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검찰 조사받을 때는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역시 비싼 옷이 좋긴 하네요. 저 하늘색 잘 받죠? 헤헤헤"


인간이란 참 단순하다. 첫 일주일 동안은 그렇게 힘들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자포자기 심정이 되어갔다. 매일 아침마다 면회나 변호사 상담 잡힌 일정이 없는지, 재판은 언제 잡히는지... 교도관을 붙잡고 귀찮게 했는데 지금은 문 앞을 지나치는 똥개 취급하고 있다.


낯설고 두려웠던 형님들과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시간이 오히려 재미있고 빠르게 지나갔다. 지루할만하면 새로운 재소자가 들어왔고 친해질 만하면 형 집행 또는 형 확정으로 이감되어 갔다.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인정이 존재했다. 밖에서는 범법자, 범죄자, 마약쟁이들이지만 이곳도 엄연히 인간이 모인 또 다른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새 옷으로 히히덕 거리고 있을 때 교도관이 나를 호명했다.

"000 재소자! 재판 잡혔다. 준비하고 대기하도록."


"야~ 막내!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재판 잡혔네!"

"너, 오늘 재판받고 나가는 거 아니냐?"
"IMF 경제범인데 뭐 오래 잡아 둘 일이 있겠냐."

"방도 좁고, 뭐가 좋다고 오래 있어. 후딱 나가야지."

"설마, 오늘 내보내 줄라고요..."


경험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도대체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래도 혹시 출소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방장님과 형님들에게 마지막 인사까지 하고 방을 나섰다.


검찰 조사를 받을 때처럼 포승줄과 수갑 그리고 하얀 고무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포승줄에 묶여 수갑을 차고 흰 고무신을 신었던 날, 가슴이 무너져 내렸는데... 지금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이것도 이제 면역이 되어 가는군.'


신창원 탈옥 이후 생긴 규칙으로 모든 재소자들은 이동 중에는 포승줄로 굴비 엮듯 줄줄 엮였고 고무신은 뒷굽을 접어서 신어야 했다. 고무신 신고 도망친 녀석, 그놈처럼 잘 뛸 놈이 또 있을라고.


"경찰들이 잘못해 놓고 애꿎은 재소자들만 인권 유린하는 거지. 이게 무슨 지랄들인지..."

"신창원도 대단한 놈이군. 검경 규범까지 바꿨잖아. "

"그래도 우리보다는 나은 놈일지 모르지"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앞에 서 있는 내 앞으로 수갑을 두 개나 찬 마약 재소자가 손을 들어 보였다. 멀뚱히 쳐다보던 나는 한숨을 쉬고는 한마디 건넸다.

"무겁겠어요. 은팔찌를 두 개나..."

(그것도 개그라고...)


이윽고 대형 철문이 삐거덩 소리를 내며 열리고 20여 명을 태운 닭장차는 인천 시내를 통과해 법원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철판으로 막힌 공간 너머로는 호위 사이드카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지나가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여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런 시선들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보일 리 없었음에도 차 안은 너도나도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쳐다보는 재소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이란... 참 이상도 하지.... 그렇게 자기는 죄 없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들이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는데 고개는 왜 숙이남...'


나는 불과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펼쳐질 암담한 현실을 상상하지 못한 채 사회와 격리된 내 모습에 회한이 젖어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푸른 죄수복, 포승줄, 수갑, 맨발에 하얀 고무신, 철판으로 덮인 호송버스, 호위 싸이카 그리고 군데군데 찢어지고 낡아 해진 옷을 입고 있는 재소자들까지 지금 한 공간에 있다니.. 이건 꿈일까. 언젠가 꿈이라 말할 수 있기나 한 걸까....'


깊은 한숨조차 제대로 내 쉬지 못하고 비참한 처지를 담아 얕은 숨으로 길게 내뱉었다. 이런 웃지 못할 현실이 제발 꿈이길 바랐다. 그리고 잠시 후 찍찍찍 거리는 스피커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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