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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Feb 02. 2021

인생 사각지대(03)

내 남자 이야기(57)

구치소에서의 인연을 떠올리다 보니 참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한평생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수십 년 살며 스치듯 지나간 인연도 소중한 것이라던 어느 스님의 말처럼 그 모든 만남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일까. 갑작스럽게 의문이 밀려온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24시간 붙어 있다 보면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게 되는 구치소의 생활. 덕분에 다양한 인연들이 굴비 엮듯 엮여 듣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택시 운전하던 중 사망사고를 내고 들어온 사람, 입만 열면 보험 이야기를 떠들어대면서도 자신 때문에 고통당할 피해자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직장 스트레스 때문에 힘들어하던 중 친구의 꼬임에 딱 한 번 먹어본 산부인과 진통제로 마약 중독자가 된 대기업 직장인도 있다. (요즘 우윳빛 주사라는 것과 같은 성분인 것 같다. 썰에 의하면 산모가 분만 통증이 심할 때 투약하던 약품이었다고 하는데 마약 성분이 강해 불법 마약류로 분류되어 생산 정지당했다고 한다. 그러자 해고를 당한 제조업자가 몰래 불법으로 제조해 회현동 뒷골목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얼토당토않는 이야기는 단지 루머에 불과하지만...)


'나 같은 무지렁이가 들어도 야부리다. 인간아!'


하여튼 마약중독자였던 대기업 직장인은 검찰 측이 제시한 조건에 아무것도 모른다고 새로운 협상 카드를 달라고 했단다. 마약사범은 자신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서는 다른 투약자 몇 명의 명단이나 마약 공급자 한 명의 실명을 반드시 실토해야 한다. 검찰 측은 이런 조건을 제시하며 그래야 집행유예로 나갈 수 있다고 했음에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니...


'검사가 법 공부를 고스톱판에서 배웠겠냐!! 그런 말에 속을 것 같아!!'


한술 더 떠서 간통죄로 구속됐다는 유부녀 환장남, 자신은 사랑한 죄 밖에 없다며 서로 합의 하에 관계를 가졌는데 왜 법으로 해결해야 하느냐며 오히려 큰소리 뻥뻥 친다. 결국 교도관에게 불려 나가더니 그 뒤로 볼 수 없었다.(물론, 지금이야 간통죄가 폐지되었지만 이런 인간을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고 말해야 할까? )


이렇게 다양한 군상들을 대하면서 특별히 기억해야 할 죄목이 떠오른다. 이 죄목은 몇몇 재소자들이나 말하는 이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편견일 수 있지만 가장 추악한 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강간.


유치장과 구치소, 교도소 그리고 재소자들과 경찰, 검찰에서 가장 더럽고 추잡한 죄로 취급한다나 어쩐다나. 그래서 강간미수로 입건되면 어딜 가나 나이 불문 죽을 만큼 두들겨 맞는다고 한다.

'참 별난 세상이다.'

이쯤 되면 누군가 말한 것처럼, 모든 재소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정말 특이해서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한 사람. 고춧가루 밀수범이다. 그의 수법은 그야말로 기막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밀수법을 무용담을 섞어가며 풀어냈다. 중국의 청도나 연태의 농산물 시장에는 한화로 kg 당 10원부터 수천 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격의 고춧가루가 존재한다고 한다. (벌써 수십 년 전 이야기이니 만큼 지금의 환율가치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저 아저씨는 부자라면서 왜 밀수까지 하지?'

속으로 궁금증을 삼키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당시에는 중국 농산물에 대한 보도가 우리나라 9시 뉴스에 단골로 등장하던 때였다. 싸구려 중국산 고춧가루를 한국의 품질 좋은 토종 고춧가루와 섞어 시장에 유통시켜 비싼 가격에 팔아 문제를 일으킨 때문이다. 원산지 표시를 제도화하기 전이라 눈속임이 쉬웠던 것. 그래서 값싼 중국 농산물을 밀수하려는 밀수범들이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밀수 때문에 잡혀 들어온 아저씨, 그는 제법 잘 사는 사람이었다. 영치금도 항상 상한 선에 달하는 백만 원이 꽉 채워져 있었고 폼나던 하늘색 재소자 옷을 입었다. 사실, 그 옷을 결국 내가 물려 입었지만. 안면을 익히고 아저씨의 존재에 대해 인식을 하면서 그는 마치 영웅담을 들려주듯 자신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나도 밀수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워낙 농산물 도매가 돈이 안되다 보니 유혹에 흔들리더라고.... 사실, 들여오기만 하면 완전 노다지야. 배 타고 오는 조선족들도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이유가 다 있거든. 특히 고춧가루는 국산하고 비교해 가격이 워낙 차이가 많이 나니까... 해본 거지. 정식으로 수입해서는 답이 없고... 건축자재 세관 통관까지 다 끝났는데... 직원 하나가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이 꼴로 뉴스까지 나오게 됐어. 완전 개망신이지. 전국에 얼굴 다 팔리고...."

"고춧가루 라면서요? 근데 무슨 건축자재요?"

그는 고개를 숙이며 살짝 소리를 죽이는 바람에 듣는 사람의 귀를 더욱 쫑긋하게 만들었다.


"이게 말이야. 어떻게 하면 대량으로 고춧가루를 안전하게 들여올까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아이디어인데. 고춧가루가 수분을 흡수하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거든. 그럼 이게 또 무게가 엄청 나간단 말이야. 그래서 이 돌덩이를 중국산 대리석으로 둔갑시켜 버렸지."

그는 숨을 한 번 고르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우선 싸구려 대리석을 수십 장을 쌓는 거야.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넓게 쌓아 시멘트로 붙이는 거지. 물론 겉에서는 그냥 대리석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뿐이야. 완전히 시멘트가 굳으면 대리석 안쪽을 그라인더로 파내는 거야. 이게 보통 일이 아닌데, 중국 인건비가 워낙 싸니까. 그래서 가능한 거야. 그렇게 대리석 안쪽을 파낸 빈 공간에 싸구려 고춧가루를 일정한 두께로 깔고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가며 수분을 머금게 해주고 단단하게 두드려주면 돌처럼 굳어버리거든. 이런 과정을 계속 반복해서 채우고 마지막으로 맨 위에 대리석을 붙이면 끝이야. 누가 봐도 완벽한 건축자재 대리석이 되는 거지.... 외형도 대리석, 무게도 만족하는 완벽한 제품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야."

이건, 말도 안 돼! 이런 수법이 있었다니... 속으로 생각하던 감탄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올 뻔했다.


"그렇게 세관을 통과한 고춧가루는 도매 창고로 옮겨지고 일일이 돌을 깨는 거지. 그런 다음 고춧가루를 일일이 부숴 더운 바람에 건조해야 해. 그리고 국산 고춧가루와 10:1, 10:2, 10:3 등의 비율로 섞어 시장에 유통시키는 거야. 그렇게 하면 20억이 떨어지는 건데... 말야..."

'헉! 그깟 고춧가루... 생각했는데 20억이라니...'

입이 쩍 벌어졌다. 참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아슬아슬하게 인천 세관 통관까지 하고 잘 마무리가 되는가 싶었는데 트럭에 옮겨 싣는 과정에서 세관원이 담배 한 대 피우고 연기를 내뿜다가 딱 집어냈다나....

세관원은 전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수법이라고.

분명 직원이 말실수해서 걸린 거라고.

그때까지도 그는 억울해했다.


'아저씨. 세관 공무원도 화투 치다 된 거 아니거든요!!'


드라마나 영화로만 봐왔던 감방 생활. 유치장, 구치소, 교도소...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여겨졌던 일들이었다. 그러나 여기도 사람이 살고 있다. 보통 사람들과 조금은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상.


난 그곳이 인생 사각지대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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