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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Jan 19. 2021

인생 사각지대(02)

내 남자 이야기 56

형님이라고 해야 하나, 아저씨라고 해야 하나.

특별한 인연이었던 만큼 편의상 형님이라고 해야겠다.


형님은 당시 50대 초반에 머리는 밤송이처럼 빡빡 민 상태였다. 어깨는 떡 벌어진 다부진 체격에 팔자걸음으로 뒷짐 지고 다니는 사람. 늘 말없이 뚱하게 앉았다가 식사 때만 되면 한마디 던지고 큰소리로 헛기침하며 먹던 사람.


"밥상 펴라!"


그렇다. 첫 운동시간에 앞으로 달려와 넙죽 폴더 인사하던 깍두기들을 보고 태연하게 인사하던 바로 그 사람이다.

"형님! 식사하셨습니까?"

"요즘 관에서 누가 밥 굶냐..."


유치장에서 경험으로 듣고 알게 된 사실로 '형님'이 마약범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말로만 듣던 거물을 실제 눈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빡빡 민 머리와 몸에서 비릿한 듯 묘하게 향긋하게 풍겨 나오는 냄새, 게다가 마약범이라고 밑장을 깐 몇 사람이 은연중에 수발을 드는 듯한 모양새에 우리와 '다른 세계' 사람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이런 거물이 같은 방 재소자라니. 슬기로운 감방생활도 아니고...'


그러나 결과적으로 '형님' 덕분에 출소할 때까지 편안한 구치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혈압이 급상승해 정신을 잃어 갈 때, 교도관을 통해 응급 의약품으로 고혈압 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군것질은 물론, 식사 때마다 맛있는 반찬을 먼저 먹을 수 있도록 챙겨주었다. 또한 형이 확정된 재소자가 교도소로 이감될 때 입고 있던 고급 원단의 사재 죄수복을 챙겨 주어서 폼나게(?) 입을 수 있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박근혜, 이명박 전 대통령들이 재판정에 출두할 때 입는 것과 비슷하다. 이 사재 죄수복은 영치금으로 구입하는데 가격대가 상당히 비싸 웬만한 죄수들은 잘 입지 못하는 옷이다.)



이렇게 '형님'으로부터 편의를 제공받은 이유? 물론, '형님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리 만무하다. 사실인즉슨,


첫 운동시간 이후 '형님'의 위력에 쫄아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런 내게 형님은 IMF 이후 경제사범들을 많이 봐 왔는데 그 가운데 인상이 제일 좋고 젊다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절대 밖에서 만나지 말라며 진심 어린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여기는 전부 죄 없는 놈들만 들어오는 곳이야.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들 자기만 억울한 곳이지. 그럼 법은 왜 만들었겠나? 내가 볼 때 도둑놈, 사기꾼, 강간, 과실치사, 조직놈들, 강도... 모두가 다 딱 봐도 죄지은 놈들이 맞아... 내가 달고 있는 별만 헤아려도 손이 부족하거든. 앉아서 천리 본다. 자네도 IMF 탓하지 말고 이번 기회에 이곳에서 내가 뭘 어떻게 하면서 살았는지 돌아보는 게 좋아.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깊이 반성하다 보면 시간도 금방 지나가고 그러다 보면 밖에서 좋은 소식이 올 거야.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어."


사실이 그랬다. 너무 억울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고 너무 분해서 어금니를 악물었다. 나오는 건 한숨뿐이라 가슴에는 한이 쌓이고 쌓여갔다. 그 때문에 출소 후에는 스트레스로 급성 고혈압 환자가 되었고 어금니 신경이 다 녹아내려 지금은 12대의 임플란트로 버티고 있는 중이다.



어느 날, 형님은 속이 좋지 않다며 소화제를 신청했다. 구치소에 소화제가 있을 리 만무한 터라 의약품을 요청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소화제를 먹어도 나아지지 않고 계속 속이 메스껍다며 물만 마시고 버티다 구치소에 상주해 있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는데도 특별한 소견 없이 휴식만 취하도록 조처를 받았다. 그 때문에 교도관의 배려로 하루 종일 누워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누워 있는 형님의 배가 남산처럼 불쑥 올라와 있어 살짝 의심스러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 형님. 배가 원래 이렇게 많이 나오셨어요?"

"그래. 내가 여기 들어오면서 이곳 체질인지 살이 좀 찐 편이지. 나가면 금방 빠지더라구."

"혹시 좀 만져봐도 돼요?"

"왜.. 남사스럽게 남의 배는 만진다고 그래?"

"그냥 좀, 살짝 촉진 좀 해보게요."

"너. 의사냐?"

"아니요!! 무슨! 그런 게 아니고 저는 무역을 하는데, 예전부터 건강에 관심이 있어서 의학서적이나 건강 관련 논문들을 많이 읽었거든요. 그런데 형님이 누워계신 배 상태가 왠지 이상해서 좀 눌러보려고요. 혹시 아픈 데 있으시면 말씀 주세요."


난 부풀어 오른 형님의 배 이곳저곳을 살짝살짝 눌러보고 계속 질문을 했다.

"형님. 의사가 뭐래요?"

"최근에 고기 먹은 것 있냐고 묻던데. 재판 준비가 잘 안돼냐고 묻고 그만 신경 끄라고.. 그리고 위장약 조제해줘서 가져왔지."

"저, 죄송한데, 여기 누르면 많이 아프시죠..."

"억!! 아.. 너무 세게 누른 것 아냐? 좀 아픈데..."


나는 조금 멋쩍게 웃으며 형님의 눈동자를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한숨을 길게 쉬고 말았다.

"저... 형님..."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방안 누구도 말이 없었다. 형님이 순간 벌떡 일어나 앉았다. 방장이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막내야, 뭔데 그래?"

"저. 그게요. 제가 의사는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형님. 지금 여기 말고 외부 큰 병원으로 진료 의뢰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 뭔데? 어떤 거 같은데? 그냥 편안하게 얘기해 봐, "


"아까 제가 누른 부위가 간 쪽이에요. 갈비뼈로 쌓여 있어서 보통은 잘 모르거든요. 그런데 형님은 간이 많이 커져 있는 것 같아요. 촉진할 때 많이 아파하시는 것이... 살쪘다고 하시는데 사실은 배 주위가 전체적으로 부어있는 것 같아요. 복수가 차기 시작한 느낌이에요. 눈동자 색도 많이 안 좋고요."

"아. 눈 색깔은 내가 약쟁이라 그런 거 아냐?"

"하여간 빨리 신청해 보시는 게 좋을 듯해요."


다음날 형님은 변호사를 통해 외부 진료를 받았다. 오전에 교도관과 나갔던 형님은 오후 늦게서야 귀소 했다. 그러나 형님은 방 벽을 향해 모로 누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도관에게 허락까지 받아가며 준비해 둔 저녁식사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날은 나 역시도 재판이 밀려 있어 일주일 이상을 더 구치소에 있어야 한다고 변호사를 통해 통보받은 상태라 기분이 좋지 않았고 컨디션까지 난조를 겪고 있어 부쩍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형님은 그런 나를 의식했는지 자신을 걱정하고 있냐며 가까이 불렀다.

"막내야, 딸 만나고 왔다. 니 덕분에... 그래서 기분이 좋다. 근데 넌 얼굴이 왜 그모양이야. 풀이 잔뜩 죽어가지고. 난 조만간 출소한다. 막내 덕분에 이것저것 정리가 잘 될 것 같다. 너도 금방 나갈 테지만 어쨌든 있는 동안이라도 내가 잘 챙겨줄게. 편하게 지내라"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방장이 의아하다며 한마디 던졌다.
"동생. 무슨 소리야? 출소라니... 재판도 안 잡혔다며..."


"형님, 음... 재판 잘하셔서 꼭 건강하게 출소하세요. 큰 일하실 분인데, 우리 같은 무지렁이랑 너무 오래 계시면 안 되죠. 저는 검사가 사건 종결 처리시키고 1~2주 안에 출소시켜 준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딸도 만나고... 뭐. 이래저래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그러고 있어요. 뭐가 뭔지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좀 그렇습니다."

"아니, 병원 진료받으러 갔다며?"

"그게 말이죠. 후~~(긴 한숨) 저 간경화 말기랍니다. 간이 다 썩었데요. 3개월밖에 못 산다도 합니다. 너무 늦게 발견했다고... 평생 약만 하다가 딸내미한테 미안해서 이제 좀 정상적으로 살아볼까 했더니... 이제 시간이 없네요. 너무 늦었다면서 정리 잘하라고 그냥 내보내 준답니다. 막내야. 나한테 썩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맙다. 아무것도 모르고 구치소에서 썩을 뻔했는데. 다행이지 뭐냐. 고맙고, 너 나가면 지금이라도 공부해서 의사 해라."


설마 했지만 막상 사정을 알고 나니 당황스러워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형님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며칠 후 형님은 구치소에 있는 입원실로 옮겨졌다. 그렇게 형님과의 짧은 만남의 끝이었다.


다음날부터 많이 바빠졌다.

"막내야. 오늘 내 눈 색깔은 어떠냐, 형 봐봐"

"김 사장! 나 오늘 똥 못쌌거든. 장에 문제 있는 거 아니겠지?"

"미스터 김! 나도 건강 상담해주면 안 될까??"


"형님들!!

저... 의료법 위반 추가되는 꼴 보고 싶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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