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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Oct 03. 2024

1100만명이 굶어 죽었다, 소련이 감추려던 진실

오마이뉴스 게재, <미스터 존스> 영화평

[김성호의 씨네만세 294] <미스터 존스>


우크라이나를 지나는 열차에서 뛰어내린 20대 청년이 있다. 추격을 피해 반대편 열차에 올라타자 세상은 온통 검고 흰 무채색의 세계로 뒤바뀐다. 이곳은 1930년대 초 스탈린 치하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공화국이다.


청년은 웨일스 출신 저널리스트다. 말이 저널리스트지 속한 매체도 없는 사실상 백수다. 로이드 조지 영국 수상의 외무고문으로 일한 경력을 살려 소련으로 들어왔는데 그마저도 해고돼 내세울 게 없다.


청년의 목표는 스탈린을 인터뷰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거쳐 사회주의 실험을 계속하던 당대 소련 지도자를 만나 알리는 게 그가 지닌 야심이다.


그랬던 그가 우크라이나행 열차에 탄다. 모스크바에서 목격한 상황은 기대와 정말 달랐다. 언론은 검열됐고 뜻있는 기자가 강도에게 살해됐으며 미행과 도청이 공공연히 이뤄졌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월터 듀란티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지국장(피터 사스가드 분)과 다른 기자들은 스탈린의 앵무새로 전락한 지 오래다. 진실 위엔 가위표가 그려지고 흔하고 뻔한 정부홍보문구만 기사로 나간다. 청년은 진실을 찾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떠날 수밖에 없다.

   

▲ 미스터 존스 포스터 ⓒ (주)디오시네마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진실


우여곡절 끝에 마주한 우크라이나는 참담하다. 그가 가방에서 빵을 꺼내자 같은 칸 모든 사람들이 "먹을 거다"하고 수근 거린다. 그가 바닥에 오렌지를 떨구니 아귀처럼 몰려들어 입에 쑤셔 넣는다.


기차에서 내린 뒤 마주한 현실은 더욱 끔찍하다. 역엔 아사해 쓰러진 시체가 얼어붙어 있다. 군인은 청년을 다짜고짜 일하라며 내몬다. 곡식자루를 트럭에 옮겨 싣는 일이다.


곁에 선 노인에게 "대체 어디로 보내는 거냐"고 묻자 "모스크바"란 답이 돌아온다. 노인은 군인에게 청년이 스파이 같다고 귀띔한다. 빗발치는 총탄을 뒤로 하고 청년은 도망친다.


굶주리다 들어간 오두막집엔 주인 부부가 굶어죽어 나란히 누워 있다. 길가 눈밭엔 죽은 어미와 울부짖는 아이가 있다. 시체를 잔뜩 싣고 지나가던 이들이 아직 산 아이까지 시체더미 위에 올린다.


어린아이들은 제 오빠의 살점을 뜯어 고깃국을 끓여 먹는다.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먹을 건 나무껍질뿐이다. "대체 얼마나 죽은 거죠?"하고 묻는 말에 "수백 만 명"이라 답한 여자는 머리에 두건이 씌워져 어디론가 끌려간다.

   

▲ 미스터 존스 스틸컷 ⓒ (주)디오시네마

 

1100만명 사망한 홀로도모르를 알리다


우크라이나의 아이들은 노래를 부른다. 추운 겨울이 오자 먹을 것도 잠들 곳도 없었다고. 남겨진 건 죽음 뿐이다. 스탈린의 황금창고 우크라이나의 현실은 이랬다.


<미스터 존스>는 인간과, 인간의 적과, 인간이 이룩해 마땅한 가치를 말한다. <토탈 이클립스>에서 제 눈이 머는 줄도 모르고 태양을 좇던 랭보(레오나르도 디캐프리오 분)를 담았던 아그네츠카 홀란드가 제 목숨을 내던지고 오직 진실만을 향한 가레스 존스(제임스 노턴 분)를 스크린 위로 불러온다.


채 서른을 채우지 못하고 죽은 이 기자는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대기근, 이른바 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를 서방에 알린 실제 인물이다. 소련이 끝끝내 감추려 했던 인위적 재난으로,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숨진 이들만 최대 1100만 명에 이른다.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을 막고 연방을 배불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수탈한 결과였다.


우여곡절 끝에 영국으로 돌아온 존스는 거짓말쟁이로 매도된다. 모스크바 주재 서구 언론사 대부분이, 특히 퓰리처상 수상자 듀란티가 존스의 보도가 허위라고 비난한다. 조지 수상까지 나서 존스에게 사과를 종용한다.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존스가 보고 겪은 것들을 믿는다. 인간을 착취하는 모든 억압에 저항해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가 가능하지 않느냐고 믿었던 이들만이 그 실패에 절망하면서도 존스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에릭 아서 블레어와 같은 이들이다. 필명 조지 오웰로 기억되는 바로 그 사람이다.

   

▲ 미스터 존스 스틸컷 ⓒ (주)디오시네마


양들은 울부짓고 돼지는 안채로 들어갔지만


홀란드는 특유의 감각으로 존스의 이야기 가운데 오웰의 소설을 녹여낸다. 오웰이 당대 소련을 빗댄 <동물농장>을 집필하며 내용 일부를 직접 낭독해 들려준다. 온갖 언론이 거짓을 일삼을 땐 양들이 울부짖는 장면을, 듀란티가 모두에게 찬사를 받을 땐 돼지와 인간이 더는 분간되지 않는 장면을 가져다 대는 식이다.


이를 통해 <미스터 존스>는 인간이 지나온 길과, 싸워온 적과, 나아갈 곳을 제시한다. 인간의 적은 인간 그 자신이며, 스탈린과 듀란티가 대변하는 온갖 욕망과 비겁을 넘어서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우크라이나에선 수백 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모스크바를 비롯해 러시아 전역에서 저항한 이들도 살해당했다. 심지어 존스조차 몇 년 뒤 내몽골에서 총을 맞고 죽었다. 30살 생일을 고작 하루 앞둔 날이었다.


월터 듀란티는 그보다 22년을 더 살았다. 73살을 일기로 숨을 거뒀다. 퓰리처상 수상자 명단엔 여전히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란드는 존스와 오웰을 이야기한다. 양들은 여전히 울부짖고 있지만, 돼지는 안채를 차지했지만, 동물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가늠하지 못하지만, 인간의 적은 인간 그 자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빼앗아 지켜야 하는 인간다움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 <미스터 존스>는 결국 희망에 대한 이야기다.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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