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인천스텔라> 영화평
한국 에로영화에 봉만대가 있다면, 병맛영화엔 백승기가 있다. 그 이름이 특별한 건 기존엔 예술이 설 자리가 아니라고 여겨졌던 영역에서 예술을 추구하기 때문이고,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나름의 성취를 거뒀기 때문이다.
병맛영화는 저예산으론 구현이 불가능한 부분을 포기하고 장르성만 챙기는 B급영화와는 차별화된다. 필연적 허술함과 비논리성, 연출상의 어설픔을 전면에 내세우고 뻔뻔하게 제 갈 길만 가는 영화인 것이다. 외딴 휴게소에 아시아항공우주국이란 자막을 붙인다거나, 정비소에 입고된 BMW를 다짜고짜 우주선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거짓을 말하면서도 최대한 사실적이고자 하는 영화들에선 찾아볼 수 없는 뻔뻔함이 도리어 매력으로 작용한 걸까. 여전히 소수이긴 하지만 병맛영화만 찾아보는 관객들도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병맛영화로 유명한 작품들을 몇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레슬리 닐슨이 주연한 <에어플레인> <총알탄 사나이>부터 그 뒤를 잇는 <못말리는 람보> <무서운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직접 제작한 성공한 병맛영화들이다.
병맛에도 역사가 있다
병맛계 최고 걸작으로 추앙받는 <토마토 공격대> 시리즈는 4편까지 제작되는 큰 인기를 누렸다. 도시에 갑자기 킬러 토마토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다닌다는 내용으로, 황당무계한 설정이지만 구성과 그 저변에 깔린 상징이 웬만한 할리우드 영화보다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토마토 공격대> 1편은 특정 계층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작품을 뜻하는 컬트영화 중에서도 유명한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짜고짜 나타나는 좀비들과의 격투로 후반부를 가득채운 조지 클루니 주연의 <황혼에서 새벽까지> 같은 영화는 병맛영화의 상업성이 어디까지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할리우드 탑 배우를 기용해 전 세계적으로 유통하는 영화도 얼마든지 병맛일 수 있음을 입증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로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피터 잭슨 감독도 병맛 하면 빠지지 않는 영화인이었다. 그의 데뷔작 <고무인간의 최후>는 호러를 넘는 슬래셔 고어무비인데, 장르 그대로 팔 다리가 얼마나 충격적으로 잘려나갈 수 있는지에 전력을 기울여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악명이 높다.
위에 언급된 서구 병맛영화는 대체로 1980년대 이후 제작됐다. 저예산 B급영화가 활성화되고도 수십 년이 지나서야 기존의 작법을 완전히 뛰어넘어 단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작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저예산으로 빚어진 상황을 장애물이 아니라 특성으로 받아들인 놀라운 작품들, 그것이야말로 병맛영화의 시작이었다.
병맛 황무지에서 자라난 백승기
한국 병맛영화는 할리우드보다 다소 늦은 200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대놓고 키치적인 설정을 덕지덕지 붙인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부터 서세원이 제작한 <긴급조치 19호>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 영화엔 병맛 그 자체의 가능성을 탐구했다는 평가 대신, 신세대를 겨냥한 일회성 일탈이 아니냐는 평가가 붙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10년대에 들어서야 한국에도 제대로 된 병맛영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바로 백승기 감독이 있다.
<숫호구>, <시발, 놈: 인류의 시작> 등 제목에서부터 병맛이 철철 흐르는 이들 영화를 찍은 감독으로, 연출부터 각본, 촬영, 편집까지 도맡아 제 색채를 그대로 불어넣었다. 부족한 자본은 장애가 아닌 장점으로 승화시켜, 뻔뻔함과 무모함으로 밀어붙이는 역량이 일품이다.
그런 백승기 감독이 전격적인 SF에 도전했다. 아시아항공우주국 ASA 대원들이 미지의 행성인 갬성(StarGam)에서 보내진 구조신호를 따라 탐사에 나서는 이야기를 다뤘다.
능청스러움은 여전하지만
줄거리는 다소 아쉽다. 갬성에서 보내온 구조신호엔 우주선을 제작하는 방법이 담겨있었고, 그에 따라 만든 우주선을 타고 갬성 탐사에 나선다는 이야기가 기본적인 얼개다. 탐사대장과 그의 딸을 좋아하는 대원 사이의 갈등 아닌 갈등부터, 문제가 풀리는 과정 모두가 기성 영화에서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형 병맛 영화를 기대한 이들에겐 여러모로 실망스러운데, 감독은 이야기 대신 형식에서 병맛을 추구하는데 집중한 듯 보인다.
<인천스텔라>의 장점과 단점은 서로 통한다. 장점은 능청스러움이다. 달성하기 어려운 수준의 완성도를 위해 노력하는 대신, '나는 그건 못해' 하고 퉁치고 들어가는 패기가 적잖이 신박하다. 우주 공간에서도 물건이 아래로 뚝뚝 떨어지며, 우주선은 자동차로 눙치고 지나간다. 그러면서도 '이게 다 저예산의 멋이지' 하고 넘어가는 뻔뻔함은 매력적으로까지 느껴진다.
다만 <인터스텔라>의 구성을 그대로 가져와 저만의 줄거리를 고민하지 않은 점은 실망스럽다. 독창성에 대한 고민이 얼마간 엿보인 전작과 달리 <인천스텔라>는 <인터스텔라>의 얼개를 그대로 따라가는데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패러디라기엔 재치가 부족하고 진지하다고 하기엔 완성도가 떨어져 관객을 좀처럼 만족시키기 어려울 듯하다.
병맛영화는 진지한 영화보다 더 진지해야만 경쟁력이 있다. 능청스러움과 허술함이 장점이 되기 위해선 관객을 감탄시킬 만한 장치가 적어도 몇 가지쯤은 있어야 한다. 그저 허술하고 조잡할 뿐이라면 초등학교 학예회보다 나을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인천스텔라>는 백승기 감독의 다음을 기대하게 한다. 한국에선 여전히 독보적인 병맛영화 감독일뿐더러, 그런 영화를 기다리는 팬들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중 하나다.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