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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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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Nov 10. 2024

할리우드가 장악한 세상에 홀로 남은 동양 판타지

오마이뉴스 게재, <적호서생> 영화평

[김성호의 씨네만세 319] <적호서생>


▲적호서생포스터찬란

 

세계관을 창조한다는 건 위대한 일이다. 저 위대한 J.R.R.톨킨은 엘프와 오크, 드워프와 드래곤이 인간과 함께 뛰노는 드넓은 세계를 빚어냈다. 그 뒤로 아주 많은 작가와 그보다 많은 독자들이 그의 세계관 안에서 웃고 감격하고 울고 분노했다.



조앤 K. 롤링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 너머에 마법사들의 세계를 창조했다. 그 세계는 톨킨의 것만큼 드넓고 탄탄하진 않았으나 한 시대 수많은 독자들이 빠져들어 유영할 정도는 되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펼쳐내는 건 대단한 일이다. 많은 작가들이 그에 도전했으나 자신의 세계 안에 그 시대의 독자를 초대하는데 성공한 사례는 많지 않다.


하나의 세계관은 다른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다음 시대에 어느 서양 작가가 새로운 세계를 빚어 수많은 작가와 독자를 초대한다면, 그 안에서 톨킨과 롤링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일 것이다. 이전과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펼친다는 건 문화권을 벗어나지 않고는 쉽지 않다.

 

▲적호서생스틸컷찬란

 

요괴들이 뛰노는 환상의 세계


중국 문화계엔 톨킨과 롤링, 또 지난 한 시대를 풍미한 마블과 DC코믹스의 것과는 전혀 다른 나름의 세계관이 있다. <서유기>를 전후해 정립된 세상, 각양각생 요괴들이 인간을 위협하며 여러 차원을 건너 공존하는 그 드넓은 세상 말이다.


중국은 저만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다채로운 영화와 문학작품을 창조하는 몇 안 되는 국가 가운데 하나다. 분서갱유와 문화대혁명 따위의 폭압적 순간들을 건너가며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끝끝내 생존한 세계관이 오늘날 중국 영화계가 지닌 최상의 무기로 활약하고 있다.


<서유기> 시리즈를 비롯해 <천녀유혼> <백발마녀전> <영웅문> 등 다양한 걸작들이 이 같은 세계관 위에서 태어났다.


여기 온갖 동물로 둔갑하고, 사람을 속이고, 인간 안에 심은 구슬을 모아 꼬리를 늘려가며 지혜를 늘리는 여우들이 있다. 우리가 아는 구미호를 꿈꾸는, 아직 꼬리 아홉 개를 모으지 못한 어른 여우들이다. 개중 여우취급 못받는 혼혈 여우가 한 마리 있다. 십삼(리시안 분)이다.


우여곡절 끝에 지상으로 내려가 구슬을 회수하는 임무를 맡은 십삼은 우연찮게 자신의 구슬을 가진 왕자진(천리농 분)을 만난다. 십삼은 왕자진의 신뢰를 얻어 가까이 하게 되고, 호시탐탐 그 안에 깃든 구슬을 뽑아낼 기회를 노린다.

  

▲적호서생스틸컷찬란

 

구미호 설화에 모험기를 더하다


<적호서생>은 동양에서 널리 알려진 구미호 설화에 중국 특유의 요괴들을 등장시켜 일종의 모험기를 빚어낸다. 음흉한 목적으로 접근했다 다른 마음이 싹터 일을 달성하지 못하는 흔한 이야기 가운데 다양한 설화를 덧대 제법 신선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되었다. 특히 동양적 세계관을 접하지 못한 이들에게 그 신선함은 증폭될 게 분명하다.


앞서 언급한 여러 걸작에 비하여 <적호서생>이 지닌 영화적 가치는 여러모로 부족하다. 이야기는 느슨하고 캐릭터 역시 평면적이며, 드라마도 깊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적호서생>의 세계관은 넓고 풍성하다. 이 영화 한 편을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서 더욱 그렇다. 한 편의 영화가 얼마나 뿌리 깊은 문화적 토양에 빚지고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중국의 발전된 영화기술도 놀랍다. '선비가 삼일을 보지 못하면 눈을 씻고 봐야한다'는 옛 중국 고사처럼, 중국영화의 기술력도 한해 한해가 새롭다. 영화 속 여우들이 숲을 가르며 달리고 두꺼비와 여러 요괴들이 출연하는 장면은 할리우드가 선 곳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음을 알리는 듯하다.


히사이시 조가 참여한 영화음악도 인상적이다. 그 역시 요괴와 인간 사이의 우정이란 설정에 매력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단조로운 구성과 설정, 캐릭터에 실망하고도 언급할 가치가 있는 영화라는 게 놀랍다. 중국영화가 거둘 다음 십년의 성취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대단할지도 모른다.

 

▲적호서생스틸컷찬란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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