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게재, <닥터 후: 저주 받은 자들의 항해> 비평
SF콘텐츠를 논할 때 빠지는 법이 없는 <닥터 후>는 2000년대 이후 제작된 뉴 시리즈만 13개에 이르는 장수 콘텐츠다. 높은 인기로 한국 방송국에서까지 방영하며 소위 '영드' 열풍을 이끌었고 그 인기가 여적 식지 않아 OTT 서비스에서도 잦아들지 않는 시청률을 자랑한다.
<닥터 후>는 기본적으로 시즌제 드라마이지만, 시즌만큼이나 휴방기에 한 편씩 제작돼 방영하는 별도의 '스페셜' 콘텐츠도 인기가 높다. 큰 틀에서 진행되는 서사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독자적인 에피소드로 꾸려지며, 닥터 외엔 출연진 역시 새로운 얼굴이 많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저주 받은 자들의 항해>는 시즌3과 시즌4 사이, 그러니까 2007년 제작된 스페셜 에피소드다. <닥터 후>를 애호하는 '후비안'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사, "알롱지, 알롱조!"가 태어나는 에피소드로 오랜 생명력을 얻었다. 이 시리즈의 다른 여러 명작 에피소드들을 생각해보자면 이 에피소드는 반 세기가 지나더라도 꾸준히 시청자와 만날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타이타닉을 우주선으로, 이 드라마의 변주
이야기는 닥터(데이비드 테넌트 분)의 그 유명한 전화박스 우주선이 다른 우주선의 항로에 휩쓸리며 시작된다. 다름 아닌 초대형 호화유람선으로, 이름부터가 그 유명한 '타이타닉'이다. 우주선에 탄 이들은 지구가 아닌 외계의 생명체들이지만 그 대다수는 인간과 외모가 구별되지 않는 종이다. 이들은 저들이 원시문명쯤으로 치부하는 지구를 찾는 관광을 하는데, 지구에 가까이 왔을 즈음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타이타닉'이란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우주선은 재난상황에 내몰린다. 우주선은 유성과 충돌하고 심지어 생존자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은 로봇에 의해 배 안은 아비규환이 되고 만다.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고 닥터는 언제나처럼 이들을 구하려 동분서주한다.
40여 분에 불과한 짧은 에피소드 안에서 한 편의 재난이 완성된다. 닥터가 위기에 맞서 생명을 구한다는 점만 같을 뿐, 매 에피소드가 새로운 이야기인 <닥터 후> 가운데 전형적인 구성을 따른다. 말하자면 배나 비행기나 건물 등 재난 이후 고립된 이들이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재난물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재난 앞에 드러나는 인간의 격조
생존자 중에선 제 목숨만 귀히 여기며 다른 이를 배려하지 않는 이가 있다. 반면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이도 있다. 또 누구는 쉽게 좌절하고, 다른 누구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성실하려 노력한다. 제 역할을 다하려는 이가 있고 포기하거나 심지어는 배반하는 이도 있다. 이러한 모습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재난물의 가장 큰 미덕은 평시라면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후비안들에게 이 에피소드를 특별하게 한 대사, "알롱지, 알롱조!"는 닥터가 우주선 선교를 끝까지 지킨 수습 항해사에게 건넨 말이다. 그의 이름이 바로 알롱조로, 프랑스어로 가자(Let's go)는 뜻의 알롱지(ALLONS-Y)에 이름을 더한 것이다.
알롱조는 유성과 우주선이 충돌할 때 입은 부상에도 끝까지 선교를 지킨다. 선교가 폐쇄되어 탈출할 수 없음을 알고서도 기꺼이 선교를 지키려 한다. 그건 선교에 우주선의 여러 장비를 조작할 수 있는 장비가 있기 때문이며, 살아남은 생존자며 혹여 있을지 모를 구원의 손길과 교신하기 위해서다. 선박이 만들어지고 대양으로 항해를 시작하며 있어왔던 오랜 전통, 책임자는 마지막까지 제 자리를 지킨다는 전통을 알롱조는 저버리려 하지 않는다.
이 드라마가 포착한 특별한 순간
알롱조의 선택이 감동적인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가 행하지는 않음을 드라마를 보는 이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많은 해난사고에서 선장과 선원들이 제 역할을 저버리는 모습을 우리는 목격하지 않았나. 한국에 큰 상처를 남긴 2014년 세월호 침몰참사가 그러했고, 그 전후로 이어진 해외 여러 선박사고가 또 그러했다. 그때마다 각국 정부는 생존한 책임자에게 엄벌을 처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감하고 말았으나 그 근저에 소명감이며 자긍심, 직업의식과 같은 것이 무너져가는 실태가 있다는 걸 주목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닥터 후>에서 닥터는, 그 많고 많은 에피소드에서 언제나 끝의 끝까지 내몰리면서도 제 역할을 회피하지 않는다. 언제나 당당히 나서 맞서고 위험이며 손실에 물러서지 않는다. 그건 그가 인간보다 훨씬 지적인 종족으로 그려지는 덕분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부단히 노력하고 용기를 내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이따금 만나는 알롱조와 같은 이들은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보고 있자면 때로 불빛은 다른 불빛이 있어 더욱 밝게 빛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알롱지, 알롱조!"는 닥터가 알롱조에게 건넨 헌사이며, <닥터 후>가 알롱조로 대표되는 헌신의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 바치는 대사이다. 그리하여 전 세계 수많은 후비안들은 <닥터 후>를 대변하는 대사로써, "알롱지, 알롱조!"를 이야기하곤 하는 것이다. 이 또한 얼마나 멋진 일인가.
김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