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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상

악의 분업화에 대하여

단상

by 김성호

지난 주 알고 지내는 후배와 만날 일이 있어서 신림사거리에 있는 커피전문점에 갔었다. 워낙 오랜만의 만남이라 이런 저런 주제들로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이야기하다 해가 떨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가게를 나왔는데 나오기 전 후배가 문 앞쪽에 있는 모금함에 동전을 넣는 것을 보게 되었다.


궁금한 마음에 무엇인데 돈을 넣느냐 물었더니 후배가 말하길 아프리카의 커피농가에 보내는 지원금이라 한다. 나는 몹시 당황스러워져 어째서 거기에 돈을 넣느냐 물으니 후배는 잔돈도 귀찮고 가난한 커피농가를 돕는 것도 좋은 일인 것 같아 넣었다고 한다.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악보다 더 좆같은 것이 있다면 그건 위선일 것이다. 대놓고 출몰하는 악이야 교화의 대상으로 삼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면 제거의 대상으로 삼을 수가 있지만 위선의 경우에는 그것이 변화하길 기대하기 어려울 뿐더러 선과 구분하여 제거의 대상으로 삼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면에서는 위선이 악보다도 더욱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다른 존재와 차별화되는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직면함으로써 보다 나은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하지 못한 인간은 자신과 직면할 수 없고 더 이상 바뀔 수도 없게 되어버린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존엄성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가능성'이라는 존엄을. 그렇기에 위선은 그 자체로 최악의 것인 것이다.


내가 후배의 행동에 아연한 것은 그것이 거대한 회사의 위선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위선을 더욱 강화시키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 캠페인은 아프리카의 커피농가를 착취하는 대표적인 회사에서 착취당하는 농가를 돕는답시고 손님들에게 기부를 독려하는 모금운동이었다. 내 후배가 그곳에 넣은 돈은 회사의 이름으로 농가에 전달되어 그들의 생계를 유지시키고 농가들의 파탄을 막는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러면 농가는 계속해서 커피를 생산하여 말도 안되는 싼 가격에 그 회사에 커피를 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지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당한 입찰 경쟁을 허용하고 적절한 가격에 제품을 구매할 것을 요구하는 커피농가들의 요구를 너무나 쉽게 무시하면서도 소비자들에게 커피농가를 지원하는 캠페인을 벌여 수익금의 일부와 소비자들의 기부금으로 커피농가를 지원하는 이러한 부조리한 시스템을 목격하면서 어찌 인간으로서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느냔 말이다.


커피를 수확하는 농민들은 거지가 아니다. 이들은 그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원할 뿐이다. 그러나 이들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고 싼값에 노동력을 착취해온 독과점 형태의 초국적 회사들은 그 두꺼운 낯짝을 들고서 커피농가를 위한 기부금 모금 캠페인을 벌여 소비자들에게 회사이미지를 제고시키는 동시에 커피농가를 착취하는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내가 분노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미국에 본사를 두고있는 초국적 커피회사들은 스스로 독과점 형태의 농가지배구조를 타파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식의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커피농가의 자생력을 잃게 하고 나아가 이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더욱 강화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거대자본의 캠페인이야말로 통제되지 않은 자본의 위선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분명 이 위선의 저금통에 고작 동전 몇개를 굴려넣으면서 스스로 악에 동조하고 있다는 죄의식으로부터 심정적인 자유를 획득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단순한 개인의 의식을 넘어 이 거대한 회사 스스로조차도 이러한 캠페인을 통해 착취로부터 이윤을 낳는 거대한 악의 고리를 합리화하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마찬가지의 경우로 나는 맥도날드아니면 롯데리아에서 지구온난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차라리 몰랐다면 그 무지를 탓할 것이지만 삼림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소를 키움으로써 삼림의 파괴와 소가 배출하는 가스로 온난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환경파괴의 주범들이 그 생산과정의 문제를 개선하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환경캠페인을 수차례 벌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위선이고 자기합리화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선이 어디 스스로의 힘만으로 판칠 수 있었겠는가. 소비자 없이는 기업도 없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변하지 않을 격언을 모두가 알고있는 바,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무지와 '나 하나 쯤이야'라는 생각으로 부조리한 기업의 행태를 방조해온 소비자들의 탓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도로 분업화 된 사회에선 비단 재화의 생산뿐만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선과 악 같은 가치를 생산하는 행위 조차도 분업되게 마련이다. 가치와 책임, 그리고 존재감마저 말살되는 분업화의 문제가 익히 지적되어 왔듯이 이 시대의 소비자들도 이러한 부당한 생산과정과 유통구조를 갖고 있는 회사의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을 완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비자 스스로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부조리에 동조하게 될 우려가 있는, 다시말해 그만큼 위선이 판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무지는 곧 죄악이라 생각한다. 당장의 즐거움을 위해 스스로의 행위가 다른 존재에게 미칠 파급효과를 무시하거나 생각하지 않음도 분명 잘못이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단순히 회사가 파는 재화를 구입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다. 소비자들이야말로 유통고리의 주체이고 궁극적으로 재화를 소비하는 유통과정의 목적이다. 앞에도 적었듯 소비자가 없는 기업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진리와도 같은 말이거니와 소비자의 책임과 권리에 대해서는 여기다 일일이 적지 않아도 충분히 그 내용과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불어 '나 하나 쯤이야'라는 생각으로 이러한 위선에 동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나는 몹시 화가 난다. 이런 놈들은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흔해빠진 격언조차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인가. 비단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같은 거창한 논의에서만이 아니라 이런 썩어빠진 생각을 갖고있는 놈들은 삶 그 자체가 타인에게 장애가 되는 존재들이다. 한마디로 논의의 가치가 없다.


햄버거 하나를 만들기 위해 평균 2제곱미터의 삼림이 사라진다고 하는데 만약 이 사람들이 햄버거를 먹을 때마다 눈앞에서 2제곱미터의 삼림이 사라지는 것이 직접 보여진다면, 그리고 별다방의 커피를 마실 때마다 그 회사에게 푼돈을 받고 한 달을 노동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보여진다면 과연 그 햄버거를 먹고 커피를 마실 수 있을지 궁금할 뿐이다.


나는 위와 같은 이유로 소비자들이 이러한 위선적 유통구조에 책임이 없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모든 소비자들이 이러한 위선에 책임이 있는 주체들이며 이런 부조리를 막을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하루빨리 깨닫고 소비자로서의 지위를 의식있게 영위해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2008. 9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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