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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호 Aug 29. 2021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다

오마이뉴스 게재, <정의란 무엇인가> 서평.

[김성호의 독서만세 81]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때로 우연히 집어든 책에서 기묘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특별한 생각 없이 집어든 책이 요즘 고민하는 주제를 건드리거나 최근 읽은 영화나 책, 그림 같은 것들을 깊이 있게 다룰 때, 단순한 우연을 넘어선 어떤 힘이 내 주변에 작용하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가끔은 이런 우연이 그저 우연만은 아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얼마 전 오랜만에 이런 순간을 맞이했다. 군복무 시절 친구로부터 선물 받고 수년 째 책꽂이에만 꽂아두었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였다. 새해를 맞이해 쌓아만 두었던 베스트셀러들을 완독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꺼내든 책이었는데 책장을 열자마자 다른 책과 영화 등에서 흥미롭게 봐 둔 이야기들이 펼쳐졌던 것이다.

            

▲ 정의란 무엇인가 책 표지ⓒ 김영사


책의 시작부터 한꺼번에 쏟아진 이와 같은 내용들은 마치 어떤 거대한 힘이 있어 내게 가장 적절한 독서계획을 세우게 한 듯한 착각까지 일으켰다. 책 자체가 워낙 유명한 작품인지라 읽기 전부터 기대가 컸지만 구체적인 내용이나 구성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독서를 시작했기에 이런 경험에 마음이 쏠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책은 제목 그대로 '정의란 무엇인가'를 찾아나가는 대중 철학서다. 하버드 대학교 인기 교수인 저자가 실제 수업시간에 한 강의를 그 구성에 따라 편집했다. 교양강의답게 관심을 끌어당기는 사례의 나열로 시작해 각 문제와 연관된 철학자의 사유가 이어지며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를 놓고 정의란 무엇인가를 찾는 본래의 주제로 귀결된다. 다소 무거운 제목과 달리 철학에 특별한 지식이 없는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교양서라 할 수 있겠다.


사람들은 매순간 판단을 한다. 단순히 좋고 싫음의 판단도 있겠으나 옳고 그름을 가리는 판단도 상당수다. 다양성을 근간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좋고 싫음에 대한 판단은 취향의 문제로 개인의 자유이지만 옳고 그름의 판단은 가치의 문제로 취향 이상의 것이다.


옳음과 그름, 즉 의로움에 대한 개별적 판단이 모여 정의를 이룬다. 정의란 작게는 한 시대, 한 사회가 공유하는 옳음이며 넓게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공유하는 옳음이다. 이 책이 목적하는 바는 그 정의의 내용, 우리 시대 인간들이 공유하는 옳음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되겠다.


사유실험을 통해 판단의 근저에 자리잡은 가치관을 끌어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사람들이 무심코 내리는 판단의 근저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표면으로 끌어내 밝히는 작업을 시작한다. 철학에서 트롤리학(trolleyology) 혹은 사고실험이라 불리는 방식을 통해서다(관련기사: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트롤리학은 현실의 수많은 딜레마와 마주해 도덕적 직관과 윤리적 사유를 단련하기 위한 일종의 사유실험이다. 철저하게 통제된 상황 가운데 일정한 변수를 두고 그 변인에 따라 어떠한 결과가 일어나는지를 살피는 자연과학에서의 실험과 마찬가지로 딜레마 상황에서의 판단을 통해 참여자가 어떤 가치를 다른 가치보다 무겁게 여기는지 알아볼 수 있는 연구수단이다.


저자 마이클 센델은 독자들을 트롤리학의 사유실험에 끌어들여 가치판단을 내리게 하고 그를 통해 독자 개개인이 어떤 가치에 입각해 결정을 내리는지를 살피게 하는 것으로 책의 서두를 시작한다.


그가 마련한 사유실험 가운데는 트롤리학에서 흔히 사용되는 '기찻길 위의 뚱보' 사례도 있지만 그보다는 실제로 발생했던 다양한 딜레마적 상황이 더욱 많다. '정신적 타격을 받은 퇴역군인에게 상이군인훈장을 주는 것이 옳은가'의 문제부터 '경제파탄에 책임이 있는 금융사를 구제금융으로 살리는 것이 옳은가'의 문제, 영화로도 만들어진 '아프가니스탄의 염소치기 문제, 빅토리아 여왕시대 영국 사회를 뒤흔든 '더들리-스티븐슨 사건'(관련기사: 포경선 에식스호의 비극) 등이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 나와 세상을 바라보다


책은 사건이 있었던 당시에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딜레마적 사례들을 통해 독자의 관심을 성공적으로 끌어잡는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사안마다 하나의 선택을 내리게 되고 곧이어 각 선택의 근저에 깔린 가치들을 마주한다.


마이클 센델은 아리스토텔레스, 임마누엘 칸트,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 등 철학계의 거두를 한 명씩 소환해 현대사회의 딜레마적 상황에 통용될 수 있는 이들의 사유를 들려준다. 마이클 센델의 친절한 해설을 통해 독자는 이들 철학자들의 사유를 어렵지 않게 접하고 거인의 어깨에 올라 문제를 효과적으로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저자는 책의 후반부까지 본인의 생각을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지만 그가 지향하는 바는 책 전반에 걸쳐 자연스레 묻어난다. 존 스튜어트 밀의 수정 공리주의와 존 롤스의 <정의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그의 지향은 다원적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바람직하고 성숙한 태도를 가진 선장의 지휘 아래 뛰어난 철학자의 어깨에 올라서는 영광을 누린다. 그리고 그로부터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고자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즉, 이 책이 가진 최대의 미덕은 독자 스스로가 자신을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더불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확장하도록 돕는다. 이는 내가 추구하는 의로움이 무엇이며 우리 시대가 합의한 정의는 또 무엇인지를 깨닫는 여정이며 이 과정을 통해 독자를 한 층 더 성숙한 시민으로 거듭나게 한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마이클 센델의 강의가 하버드 대학교가 자랑하는 최고의 명강의로 꼽힐 수 있었던 비결일 것이다.


다음은 인상적인 대목.


집에서, 철학 수업에서, 또는 윤리 책을 읽고 그 내용을 필요한 곳에 적용하면서 건전한 도덕철학을 배울 수는 없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식으로는 미덕을 갖출 수 없다고 말한다. "도덕적 미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긴다." 행동으로 터득하는 것이다. "미덕은 우선 그것을 연습해야 얻을 수 있다. 예술이 그러하듯이."

이 점에서, 미덕 갖추기란 플루트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악기연주를 책이나 강의로 배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연습을 해야 한다. 뛰어난 연주자의 연주를 듣거나 그들의 설명을 들으면 도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직접 연주해보지 않고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될 수 없다. 도덕적 미덕도 마찬가지다. "공정하게 행동해야 공정한 사람이 되고, 절제된 행동을 해야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행동을 해야 용감한 사람이 된다." - 276p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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